<연재6>
땀의 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를 다시 기억하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최양업 신부의 11년 6개월에 걸친 사목 생활은 교우촌과 공소 방문을 중심으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어려운 삶들을 보듬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조선 선교지의 본토인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한글 서적을 통한 문서 전교와 천주가사를 통한 구두 전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 자료를 수집하여 다블뤼 주교에게 정리해 드렸고, 사목 생활에서 겪은 여러 가지 영적 체험들을 스승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왕국 스스로 개방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외교적인 노력으로 도와 달라는 간접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선종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므로,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유품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기존에 소개된 열아홉 통의 서간과 최근에 추가로 발견된 2통의 서간이 전부다. 그가 사제로 서품된 뒤, 베르뇌 주교 앞에서 친필로 서약한 ‘중국 의례와 예식에 관한 선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1857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한양에 열린 시노드(성직자 회의) 곧 한국 교회의 첫 시노드에 최양업 신부도 참석하였다는 점이다. 앞으로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유물은 찾으면 더 나올 것이므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자료들이 좀 더 찾아지고 연구되기를 바란다.
1859년 10월 12일 서간에서 최 신부는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면서도 혼자 여행하기에 힘들고 하루에 고작 40리 밖에 걷지 못하며, 먼 공소 순방 때는 말을 타고 있다고 쓰고 있다. 40리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그의 표현을 보았을 때 몸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때쯤 체력적으로 약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경신 박해는 그에게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많은 압박을 주었을 것이므로 이때 좀 더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회복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양업 신부는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스승 신부에게 인사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열아홉 번째 서간, 1860년 9월 3일).
[부록 : 편지에 나타나는 최양업 신부의 전교 활동]
동정 생활을 갈망하는 소녀, 바르바라 이야기(일곱 번째 서간, 1850년 10월 1일)
7세부터 책을 읽을 줄 알았던 바르바라는 어렸을 때 동정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올케가 옷 한 벌을 지으며, ‘혼인날에 입을 옷’이라고 하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열한 살이 되자 그는 어느 날 방에 글을 써 놓고 산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방에 붙여 놓은 쪽지에는 “사랑하는 부모님, 저를 당신들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딸로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짧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허망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천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천주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자를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사흘 만에 굴속에서 소녀를 찾아냈는데, 그 굴속에서 편안히 책을 읽고 기도하면서 친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소녀는 오빠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바르바라는 규칙적으로 1주일에 두 번 금식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았다. 집안일이나 들판 일을 할 때도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그는 매우 긴 기도문들을 모두 암송하고, 한글로 쓰여진 작은 신심서들도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성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열네 살 때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고해 사제는 동정 결심을 바꾸어 혼인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조선 교회에서는 동정 서원을 할만한 수도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가 열여섯 살 되는 해에 외교인에게 청혼이 들어오자, 그는 산속으로 도망갔다. 주교님조차 바르바라의 동정 서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사를 금지시켰다.
최양업 신부는 바르바라가 사는 마을 근처를 지나갔지만, 관할 구역 밖인데다가 성사 금지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성사를 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대관절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용서받게 될까?” 하며 잠도 자지 않았다. 그러면서 병이 들면 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병든 친구를 부러워하였다. 바르바라가 기도와 울음으로 밤을 꼬박 새우자, 갑자기 병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양업 신부는 그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다음날 성체를 영해 주었다. 최양업 신부는 병자성사까지 주려고 하였으나, 바르바라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날 밤에 사제를 청하다.
최양업 신부가 마지막 성사를 줄 때, 바르바라는 육신은 비록 앓고 있었지만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다. “저는 이 병든 육체를 떨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천상 아버지께 가서 제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원이 없어요.” 마지막 숨을 거둘 즈음에 의원들이 침과 뜸을 놓으려 하자, 바르바라는 거부하였다가 주변 사람의 권유로 참고 받아들였다. 바르바라는 1850년 9월 23일 저녁에 열여덟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양업 신부는 이처럼 순결한 영혼에게 성사를 금지하고 동정 생활을 막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교우촌으로 숨어 들어와서 사도의 사명을 받은 양반 조 바오로와 파괴된 교우촌(여덟 번째 서간, 1851년 10월 15일)
조 씨라는 지체 높은 양반이 천주교에 대해서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 알고 있었다. ‘멍에목’이라는 산골 근처에 농사를 지으며 살 집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멍에목 교우촌에 불이 나는 바람에 마을이 다 타 버렸다. 그런데 조 씨가 보기에는 그곳 마을 사람들이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근심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였고, 그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게 되었다. 조 씨는 천주교를 믿기로 하고, 집안을 정리하러 갔는데, 조상들의 위패와 가문의 제약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식구들을 분산시키고, 우연히 불이 난 것처럼 꾸며서 집과 우상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다 끊어 버렸다.
다음은 그 뒤의 이야기를 최양업의 편지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 씨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가운데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을 지웠습니다.”
그러자 조 씨는 동생에게 전교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동생은 조 씨에게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고 하였다. 조 씨는 하는 수 없이 ‘멍에목’ 공소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조 씨의 동생은 형을 입교시킨 신자들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함에 따라 그 공소 집은 헐리고 신자들은 흩어져서 결국 그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다.
전교하려고 공소의 전례 행사를 자랑하였다가 공소 집이 완전히 파괴당함(열세 번째 서간, 1857년 9월 14일)
기해박해 때 피난을 간 한 여인이 충청도의 한 부유한 집에 종으로 들어가서, 여주인을 개종시켰다. 남편은 부인을 천주교 신자로 고발하려다가 도로 집으로 데려왔다. 이 사실이 이웃에 알려지면서 몰래 숨어 지내던 천주교 신자들이 모였고, 성사를 받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노파가 성사와 전례의 은혜에 큰 감동을 받고 주위에 자랑하다가 그만 외교인에게 알려지면서 공소 집은 파괴되고 신자들은 다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최양업 신부는 짧은 기도를 바쳤다.
“주님께서는 저 불쌍한 여인들을 인자하신 눈으로 굽어보시고 그들의 착한 뜻을 굽어보소서.”
공소 회장을 끈질기게 졸라서 교리를 배운 젊은이가 공소 집을 준비(열세 번째 서간, 1857년 9월 14일)
간월(肝月:현 울주군 상북면)이라는 마을에서 한 젊은이가 공소 회장을 찾아와 천주교에서 대해서 물었다. 처음에는 공소 회장이 거부하다가 세 번째로 찾아온 젊은이를 보고 신뢰하는 마음이 들어 교리를 가르치고 교리서와 기도서를 건네 주었다. 그 청년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필요한 책들을 직접 손으로 베끼면서 온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많은 가족을 모두 입교시킨 다음 신앙생활을 위해서 간월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제가 지난번에 성사를 집전하려고 그곳에 갔을 때, 이 청년은 자신과 함께 세례받을 준비가 아주 잘 된 어른들을 6명이나 공소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또 이듬해에는 그의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세례받을 준비를 시키고 또 그의 마을에 공소집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약속을 지켜서 그해에 최양업 신부는 새로운 공소 집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 집에 도착하니, 교우들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최 신부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간신히 진정시켰다. 다음은 이듬해 1858년 10월 3일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기도와 교리 문답을 익혔는지 제가 공소 방에 들어가 찰고를 받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겨우 8, 9, 10세 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암송하여 외우는 광경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사람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노파들이 우둔함을 무릅쓰고 열성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마디도 입에 담지 못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열다섯 번째 서간, 1858년 10월 3일) .
복음을 통해서 마귀의 괴롭힘을 이겨 냄(열세 번째 서간, 1857년 9월 14일)
“이 가정은 몇 대째 마귀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습니다. 이 가정의 집안 식구는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린이거나 갓난아기거나 할 것 없이 모두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습니다. 귀신이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주자주 그들의 어깨나 등을 무시무시하게 큰 짐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같은 장소에서 얼마 살 수조차 없었습니다. …… 어떤 신입 교우가 ……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교우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거기서 그 가족은 훨씬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열심히 기도와 교리 문답을 배우면 조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고, 그 반대로 교리 공부를 조금 게을리하고 냉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다시 그전처럼 마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마귀 자신이 그들의 신심을 단련시켜 더욱 열심 하도록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 지금은 건강하게 잘 살며 기쁨 속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합니다.”
교만한 양반에서 비천한 시골뜨기로 변한 김 베드로(열다섯 번째 서간, 1858년 10월 3일)
한양의 유력한 양반 가운데에 김 베드로는 스물네 살까지 주색잡기로 방탕하게 살았다. 자신의 말로는 첩이 넷이 있었고, 여러 시골을 유람하며 살았다. 그는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토속 신앙을 포함한 온갖 종교들을 믿어 보다가 마침내 천주교 교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줄 신자를 찾지 못하여, 자신의 친구가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친구가 사는 마을로 찾아갔다. 교우촌 신자들은 외인인 김 베드로를 경계하였지만, 그가 교우촌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입교할 결심을 하자, 천주경, 성모경, 천주 십계, 삼덕송 등을 알려주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배워 암송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형제들, 첩들, 남종, 여종, 가문의 권력, 위패, 많은 친구, 많은 논밭 등 끊어야 할 것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김 베드로를 반대하여 큰아들에게 동생을 죽이라고까지 위협하였으나, 김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는 어머니와 형님에 의하여 기쁘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를 죽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저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지도 않으시면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마침내 설복되었다. ‘네가 좋게 여기는 것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 김 베드로는 조상의 위패와 미신적인 물건들을 불살라 버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교우촌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갑자기 부자에서 가난뱅이가 되었고, 교만한 양반에서 비참한 시골뜨기로 변하였습니다.”
공소를 지어 주고 화려한 촛대까지 선물하는 외교인(열일곱 번째 서간, 1859년 10월 11일)
“간월이라는 교우촌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지만 모두 가난하여 공소 집이 너무 초라하였습니다. 어떤 외교인이 와서 보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집 꼴이 이래서야 쓰겠는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더 좋은 공소 집 하나를 지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과연 작년에 그 외교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공소 집을 지어 주었고, 장식품으로 화려한 촛대까지 사 주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뿐 아니라 조선 전국적으로 이곳만큼 훌륭한 공소 집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외교인들 가운데서도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교우촌의 생활이 얼마나 고난과 위협 속에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오늘 신자들이 잘 지내던 교우촌이 내일 불시에 쑥대밭으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동료 사제들이 어느 곳에 거주한다든가, 무슨 성물이나 물건을 맡긴다든가 할 때, 일 개월 동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모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물뿐 아니라 돈이나 재물이나 다른 물건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대한 남몰래 간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인이나 양반이나 포졸들한테 빼앗기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