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vs. 탄수화물.
한 세대 동안 다이어트 식단을 둘러싸고 고지방저탄수화물 진영과 고탄수화물저지방 진영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비만 만연이 “탄수화물
때문이다”(고지방 진영), “아니다. 지방 때문이다”(고탄수화물 진영)라며 서로를 탓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학술지 ‘셀 대사’ 6월 14일자 온라인판에 공개된 논문에 따르면 오히려 이 둘의 연합군이 너무 강해 이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 두
다이어트 방법이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즉 지방과 탄수화물이 적절하게 들어있는 음식으로는 도저히 다이어트를 하기 어려워 둘 중 하나를
없앤(실제로는 크게 줄인) 식단이 나온 것이다. 고지방 다이어트를 하든 고탄수화물 다이어트를 하든 평범한 식단보다는 효과가 있을 거란
말이다.
경매 방식으로 음식 가치 평가
미국 예일대 의대가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연구자들은 뇌에서 지방 섭취를 감지하는 경로와 탄수화물 섭취를 감지하는 경로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최근 발견을 토대로 두 가지 영양분이 충분히 들어있는 음식이 지방이나 탄수화물만 많이 들어있는 음식보다 만족감(보상)을 더 준다고 가정하고 이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먼저 심리학 실험으로 어떤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인 경매를 이용했다. 즉 실험참가자들(성인 206명)에게 컴퓨터 모니터에 뜬 음식을
보고 5유로 이내에서 값을 제시하게 했다. 낙찰될 경우 음식과 함께 5유로에서 차액을 받는다. 참가자들의 식욕 상태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빈속으로 오게 한 뒤 426칼로리의 아침식사를 먼저 제공했다. 그리고 세 시간 뒤 실험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사탕을 비롯해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 13종(평균 탄수화물 74%, 지방 1%), 치즈처럼 지방이 풍부한 음식 13종(평균
탄수화물 4%, 지방 28%), 치즈크래커처럼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꽤 들어있는 음식 13종(평균 탄수화물 57%, 지방 26%)을 대상으로
경매에 참여했다. 그 뒤 각 음식에 대한 선호도를 표시하고 에너지 밀도(단위 무게 당 칼로리)를 추정하게 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세 그룹의 음식 모두 에너지 밀도가 높은 종류일수록 입찰가가 높았다. 다만 참가자가 추정한 에너지 밀도보다 실제
에너지 밀도와 비례관계가 더 높았다.
한편 세 그룹 가운데서는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많이 들어있는 음식이 평균 입찰가가 높았다. 설사 칼로리가 같더라도 크래커나 치즈보다는
치즈크래커에 돈을 더 쓸 의사가 있다는 말이다.
‘그거야 치즈크래커가 크래거나 치즈보다 맛있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 텐데, 실제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많이 있는 음식
13종에 대한 평균 선호도가 나머지 두 음식 그룹보다 높았다.
연구자들은 이 점을 반영해 이 그룹에서 선호도 상위 2종을 빼고 나머지 두 그룹에서 선호도 하위 2종을 빼 평균 선호도를 비슷하게 맞춘 뒤
평균 입찰가를 다시 산출했다.
그 결과 역시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많이 있는 그룹에서 가장 높았다. 즉 입찰가를 매길 때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많이 있는 음식에
우리가 맛 이상의 어떤 가치를 추가로 부여한다는 말이다.
한편 참가자들이 추정한 에너지 밀도를 실제 에너지 밀도와 비교한 결과 지방이 풍부한 음식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확도로 맞춘 반면,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이나 둘 다 꽤 들어있는 음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확했다. 음식에 들어있는 탄수화물의 칼로리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모니터에 나온 음식을 보고 경매로 값을 매기는 실험을 한 결과 지방과 탄수화물이 꽤 들어있는 음식에
지방이나 탄수화물만 많은 음식보다 높은 값을 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보상회로인 선조체(striatum)가 관여했다. ⓒ 셀
대사
둘 다 꽤 들어있을 때 보상영역 더 활발
연구자들은 피험자들이 경매를 할 때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의 활동패턴을 기록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탄수화물과 지방 둘 다
많이 있는 음식을 볼 때 보상회로를 구성하는 배측 선조체(dorsal striatum)와 중앙복측 시상(mediodorsal thalamus)이
더 크게 반응했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음식의 탄수화물이 촉발한 자극과 지방이 촉발한 자극이 합쳐져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음식에
들어있는 실제 칼로리보다 더 들어있는 것으로 과대평가해 강한 식욕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뇌는 왜 두 영양소를 따로 계산해 결과적으로 오류로 이어지는 회로를 갖추게 된 걸까.
자연상태에서 지방과 탄수화물이 동시에 많이 들어있는 음식은 드물다. 즉 인류는 잡식동물로 진화했지만 사냥에 실패한 날에는 주로 탄수화물로
이뤄진 식물성 음식을 먹었고 성공한 날에는 지방이 많은(뼈를 깨 골수까지 먹었다) 고기를 먹었다. 그 결과 두 영양소에 대한 신호 경로가 따로
존재하게 됐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동원대 오류를 유발하는 음식은 드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번 연구결과는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늘날 비만의 주범으로 꼽히는 가공식품 대부분 지방과 탄수화물(특히
단맛이 나는 단당류와 이당류)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더울 때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을 떠올려보라. 즉 이런 조합이 돼야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많이 먹는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실험에서도 지방이나 탄수화물만 많이 들어있는 사료일 경우 마음대로 먹게 해도 비만이 되지 않는 반면, 지방과
탄수화물 조합 사료를 주면 다들 비만이 된다. 보상회로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서 충분히 먹었다는(포만) 신호가 방해를 받아 식욕이 조절되지 않은
결과다.
고지방 다이어트 또는 고탄수화물 다이어트는 물려서 오래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며칠 주기로 두 방법을 바꿔가며 실시한다면 좀 더
오래 다이어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결과적으로 두 영양소의 섭취도 균형이 맞아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두
다이어트 진영이 손을 잡을 때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