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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과의 약속
미국의 개척기 때의 사람인 윌리엄 펜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다른 백인들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존중해 주었으며, 늘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이 그에게 농담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펜,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을 모두 가져도 좋네. 하지만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오는 땅만 주는 걸세.” 펜은 그들의 말을 믿고서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마자 길을 떠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인디언들에게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여보게, 자네들 말대로 오늘 아침부터 걸어서 이제 돌아왔네. 약속대로 땅을 주게나.” 인디언들은 놀랐습니다. 농담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펜이 자신들의 말을 믿고 실행해 준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인디언들은 약속대로 그가 걸어서 돌아온 땅을 그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 땅으로 인해 윌리엄 펜은 펜실베이니아의 창설자가 되었고, 오늘날 그 땅은 필라델피아 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무슨 약속이든 간에 그것을 제안한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신앙과 약속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존 와나메이커(1838~1922)는 서점 점원으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신앙인입니다. 미국의 체신부 장관도 지냈으며, 교육사업, 위생사업, 사회사업에도 투자했고, 주일학교를 설립했으며, YMCA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헌금과 구제 봉사를 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절대 의무”라고 했습니다. 그가 중국에 시찰 갔을 때, 어느 시골 길을 걷다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쟁기를 보니까 왼편에는 소가, 오른편에는 청년이 끄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광경을 본 와나메이커는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왜 사람이 소와 함께 밭을 갈게 합니까? 그 청년이 어디 견디겠소?”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저 청년은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은 예수를 잘 믿는 주일학교 교사인데 작년에 저기 보이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 소 한 마리를 팔아 예배당에 건축헌금을 하고 자신이 소를 대신해 밭을 갈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마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시던 주님처럼 그는 소와 함께 멍에를 메고 약속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와나메이커는 크게 감동을 받고 그 청년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 신학공부를 시켰는데, 그가 바로 중국 복음화의 기수 성문삼 목사입니다.
한국에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처음으로 왔을 때 일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의료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떤 양반이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몸에는 심한 종기가 나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프니까 염치 불구하고 선교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기의 상처 난 곳을 선교사님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보시다시피 제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겼습니다. 듣자하니 선교사님에게는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이렇게 체면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님은 그에게 페니실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최근에 개발된 아주 좋은 항생제입니다. 이것을 드시면 몸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 양반은 그것을 받아들고 약값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선교할 목적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공짜입니다. 그냥 드릴 테니까 집에 가셔서 드시면 됩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쥐고 나오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인가보다." 그러면서 그는 그 귀한 약을 모두 길거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쓸데없는 의심으로 그 약을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때 -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성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에서 12명을 뽑아 40일간 보냅니다. 그들은 땅을 정탐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 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땅이니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십시다. 이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정탐꾼은 불신앙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악평합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 때문에 축복의 땅을 밟지를 못했습니다. 자기들만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만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벨과, 에녹과, 노아의 믿음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 15, 6의 말씀--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믿음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사용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아벨과, 에녹과, 노아에 대해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의 삶을 믿음의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사촌간이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근친의 결혼을 거의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의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셔서 그렇게 원하는 자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열리게 되어지고,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자가 없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끝내 태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사라의 나이 65세 때, 갈대아 우르라는 좋은 지역에서 굉장한 부를 누리며 터전을 마련해서 잘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지금 일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지금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너무나 편안하게, 너무나 부하게 살고 있는데 갑자기 이 귀한 기업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막연한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 하지 않고 “예, 주의 말씀이오니 내가 떠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 사랑의 약속
2차 세계대전 중에 어떤 젊은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펜팔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주는 허무함,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긴장 가운데서도 조종사는 그 여자가 보내는 편지에서 위로를 받고 삶의 용기를 가지곤 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약속한 역에서 내렸다. 그녀는 꽃 한 송이를 들고 있기로 하였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꽃을 들고 서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줌마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조종사는 크게 실망이 되어 모르는 체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되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 웬 멋쟁이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주면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사랑의 약속이라는 단편 소설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얼마나 약속에 신실한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부부가 살아가면서 그런 중요한 삶의 기반을 버리고 떠날 때 누구와 의논을 하겠습니까? 아내와 의논해야겠지요.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의논을 했을 겁니다. 사래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마 사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주의 뜻이면 떠나야지요.” 여러분도 가정에서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뜻이면 떠나야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순종해야지요.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 정리해서 그 좋은 기름진 땅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그네 생활을 계속 합니다.
그런데 10년을 기다려도, 떠나기 전에 네게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십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믿음도 흔들리고, 사래의 믿음도 흔들려버렸습니다. 이 때가 위험합니다. 그래서 시험이 왔습니다. 사래가 생각한게 뭐냐 하면 아마도 내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서 거기에서 후손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 아브라함에게 “여보, 내 여종 하갈을 당신에게 주겠으니 그 하갈과 동침해서 후손을 낳도록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따라합시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요? 더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더 기다립시다. 꼭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내 여종 하갈을 받으시오”라고 하니까 헤 해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누구 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우리 믿음이 떨어지면 사람은 인간의 방법을 가지고 자기 삶을 경영하려고 합니다. 이게 가장 위험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떨어지면 이스마엘을 낳는 겁니다. 기다리지 않습니다. 따라합시다. “기다리면 이삭이요, 기다리지 못하면 이스마엘입니다.” 그 이스마엘 때문에 아브라함 집안에 큰 시련을 겪게 되고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살아가면서 항상 서로에게 믿음을 올려주는 부부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 만나니까 아내가 좋은 남편의 믿음을 끌어내립니다.
저의 선배 중에 해군 중령출신으로 당뇨로 인해 세상을 오래전에 떠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대학 다닐 때 저 서울에서 주일학교 선생님하면서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적으로 삽니다. 부인은 애기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기는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혼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앙 생활을 계속적으로 잘 해나간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련과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험을 떨어뜨리는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아내의 믿음이 떨어지면 남편이 세워져야 합니다. 남편의 믿음이 떨어지면 아내가 굳게 받쳐줘야 합니다. 서로서로가 끌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 끌어내린다면 그 가정은 잘 못된 겁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너의 부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믿음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들을 때 피식 웃었습니다. 이게 무슨 웃음입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라가 지금 구십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이 정도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못받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떠했길래 이렇게 우리에게 인상 깊게 있습니까? 오늘은 이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세 12, 1-4)
1.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에 그는 순종함을 보였습니다.
(1)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정든 고향, 부모님이 계신 고향, 이웃과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을 한번 떠난다 함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계획도 없이, 준비도 없이 정처 없이 떠난다 함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곧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이 우상으로 가득 찬 불의의 땅이었던 까닭에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처럼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이해타산을 먼저 합니다. 가정사정이니, 자녀 형편이니 하여 이리 재고 저리 재고하다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신자, 교역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즉시 응답했던 것입니다.
(2)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데려온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평생의 소원인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인간의 정욕과 욕심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약속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 후에 사라 본처를 통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와 분쟁이 생기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평화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좇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세 21, 14).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새벽 미명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냉정하게 내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정욕과 욕심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은 없습니까? 냉정하게 내쫓아 버리고 용감하게 끊어버리는 것이 참 평안과 행복과 축복의 길입니다.
(3) 이삭을 바치라.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음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세에 귀하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보다 나은 어떤 귀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금보다 은보다 보석보다도 천하보다도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한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에게는 청천 하늘에 벼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라와 상의도 하지 않고 아무말없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인정을 극복하고 불평 없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2. 미래를 향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나이 75세에 떠났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정하고, 평온하고, 향락할 수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우르는 세상에서는 가장 훌륭한 나라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상당한 기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안일과 향락의 도시를 떠났습니다. 개척하여야 할 삶의 전반 지대를 향하여 그는 나아간 것입니다. 성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차 분깃으로 받을 장소로 향해 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떠났다." 번화한 도시의 퇴폐적인 문화를 등지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여 떠나는 아브라함과 그 추종자들…… 사막과 벌판을 지나 망망한 하늘 저 편 끝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한 연약한 무리……그들에게서 과연 우리는 내일을 믿는 위대한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빛나는 성공이 하루아침에 다 차려놓은 잔치상처럼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수한 시련과 고난이 그를 따랐습니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따르는 자들의 불평도 대단하였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쉽사리 적응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미래에의 희망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을 설계하고 추종자들을 달래어 결속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위대한 행진을 계속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높은 목적이 있었고, 견인불발의 인내와 끈기가 있었으며 생에 대한 적극적인 용기와 열정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안전무결의 인격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결점과 흠이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하나의 유용한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용감히 부르심에 응한 믿음이었습니다.
3.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삶은 결국 영원한 신의 세계를 사모하는 모습에서 승화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자기가 갈대아 우르나 하란에 남겨두고 온 번영과 안전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세월이 끝날 때까지 장막에 우거하는 집 없는 신세를 지냈고, 그가 죽었을 때에 묻힐 막벨라 동굴밖에 재산을 갖지 못했으니 고향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로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신의 도성,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의 도성은 현상유지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성을 향해 나가는 신앙이 있었기에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앞을 향해 믿음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천성은 계시록 21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소망인 하늘나라입니다. 4복음서 중에 "하나님의 나라"란 말이 100번 이상 나오고 예수님의 지상 최초의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 1, 15)였으며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설교도 나라 일을 말씀하시는 것(사도 1, 17)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에 있어서 핵심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천국에 자신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에게 95개항의 항의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도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귀한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빛나고 행복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천국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남인지, 북인지 그 방향은 모르나 하나님만 따라가면 천국의 소재를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천국을 별개의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 22장에서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면서 주님이 계신 곳이 곧 천국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신부는 신랑과 별리한 새 가정을 생각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그는 신랑을 사랑함으로 새 가정이 행복한 것인 줄 압니다. 태양빛이 있으되 십오야 만월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이 있어야 신부가 더 곱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중심한 천국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천국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갔으며,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중심한 천국을 바라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지금은 믿음으로 얻은 천국에서 평안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 3, 14) 성경에는 3만 2천 5백 가지의 약속이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약속은 3만 번이다. 주님 처음 오신 성탄과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변함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