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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작품은 한국문협 계간지 「한국문학인」2008년 여름호에 게재된 저의 단편입니다. 졸작입니다만, 시간 나시는대로 일독해 보시고 많은 지적과 의견 주시길 기대합니다. 김길수 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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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인연
김 길 수
H암(癌)전문병원 로비. 오전 이른 시각이었다. 그가 예약시간에 맞춰 검사실 앞 대기실 소파에서 호명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불과 4~5미터 앞 승강기 문이 열리며, 환자를 태운 휠체어가 보호자에 의해 밀려 나왔다. 환자는 검은색 털모자와 담요로 전신을 감싼 채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흔한 장면이라 무심코 바라보던 그가 움찔했다. 환자는 몹시 여위고 어두운 표정의 할머니였는데, 언뜻 데스마스크 같은 분위기를 느낀 탓이었다.
그가 놀란 시선을 채 거두기도 전에 환자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듯, 퀭한 눈을 흘긋하더니 이내 지친 듯 감았다. 순간, 그는 감전이라도 된 듯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였지?’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했다. 환자는 조금 전, 한 번의 눈 깜빡임 이후론 죽은 듯 휠체어에 파묻혀 있었고, 아들인 듯, 40대 중년사내가 휠체어를 밀며 접수창구 쪽으로 다가갔다.
‘틀림없이 아는 사람인데…?’
한창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의 대기번호와 이름이 호명됐다. 그는 검사실 출입구로 다가가면서도 다시 휠체어 쪽을 뒤돌아봤다.
“고객님,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검사실 안, 간호사가 옷을 건네며 탈의실을 가리켰다. 그는 탈의실로 향하면서도 머릿속은 방금 본 그 여자 생각으로 가득했다.
‘누구지?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익히 아는 사람인데…!’
생각할수록 더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기억회로에 막걸리 지게미라도 낀 듯, 텁텁하고 흐릿했다.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동작마저 자꾸 토막토막 끊겼다.
불과 일고여덟 발자국 앞에서 본 여자! 잠깐 동안의 일이었지만, 그는 그 여자의 정체를 기억해내고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아, 첨부터 직접 물어봤어야 했나? 아니 좀 더 자세히 볼 걸 그랬나?’
하기야 물어볼 계제도 아니었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가까이에서 빤히 쳐다보는 것만도 실례일 텐데…! 그보다는 그 자신이 먼저 알아봐야한다는 생각에서 주저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짧은 순간에도 평생 경찰관 생활에서 길들여진 자기 방어적 습관이 발동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볼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옷이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서는 옷을 팬티까지 홀라당 벗어야했다. 때문에 갈아입는 옷은 엉덩이가 동그랗게 뻥 뚫려 있었다. 물론 덮개야 달려있지만, 덮개가 달랑거리는 것도 민망했고, 엉덩이 쪽의 허전함에 실소를 머금곤 했었다.
윗도리까지 갈아입고는 옷장 열쇠를 손목에 거는 순간, 마치 부싯돌이 딱! 켜지듯,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 그래 맞아 강춘실? 고향마을의…. 그런데 걔가 여길 어떻게?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놀랍고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 풋풋했던 얼굴이? 마음이 급해졌다. 슬리퍼도 팽개치고 후다닥 출입구로 향했다. 간호사가 화들짝했다.
“아버님! 왜 이러세요?”
간호사가 물었으나, 그는 대답도 없이 급하게 출입문을 밀며 대기실로 나섰다. 하지만 없었다. 그녀도, 휠체어도…! 그새 자리를 옮긴듯했다.
“금방, 여기 휠체어 탔던 여자분, 어디로 갔어요?”
그는 급한 김에 누구에게랄 것 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모두들 그를 쳐다봤다. 검사실안 간호사가 무슨 일인가? 다가왔다.
“누구 말씀이세요? 왜 그러시는 데요?”
“아, 내가 좀 아는 분이라…?.”
“누굴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혹시 친지분이세요? 아니면 성함이라도?”
“…가족은 아닙니다만…!”
머쓱했다. 퍼뜩 자세히 이름을 밝힐 일도 아니다 싶어 얼버무렸다.
“그러시면 찾을 수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진료실이나 검사실도 여러 곳이고, 환자분들이 이렇게 많잖아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이윽고 간호사가 빙긋했다.
“아버님, 옷도 그러신데, 어서 검사실 안으로 들어가세요. 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복장이 생각났다. 이미 대장내시경 준비로 엉덩이가 뻥 뚫린 환자복 차림이 아닌가! 그는 금방 상황을 깨달았다.
“거, 왜? 조금 전, 휠체어타고, 털모자 썼던 분인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일으킨 소동에 대한 변명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며 춘실이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싶었다.
‘이름을 댔더라면 금방 찾을 수야 있었을까? 하지만, 그 여자가 정말 춘실이라면 …? 그래서는 안 되지.“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면상태에서의 내시경 검사는 금세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의식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침상에 누워있으라는 간호사의 주의가 꿈속처럼 들려왔다.
그는 마치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듯 했다. 안온함까지 느껴졌다. 오래지않아, 안개가 걷히듯 정신이 맑아져 옴을 느꼈다.
‘정말 제대로 본 것일까? 그리고 진짜 춘실이가 맞긴 맞는 걸까?’
백퍼센트 믿을 근거야 물론 없다. 그렇다고 아니란 근거도 없잖은가! 일순간 반짝했던 눈빛으로 수십 년 전의 춘실이를 떠올리다니? 도대체 이게 뭐지?
그럼에도 억지 같고,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모습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직감(直感)에서 오는 느낌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정말 춘실이라면? 춘실이도 혹시 암으로? 하긴, 그 외에는 달리 댈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래 전부터, 춘실인 인근의 M시에 산다고 했다. 결혼한 이후 줄곧. 스무 살 남짓에 헤어진 이후, 반세기가 가깝도록 직접 대면한 적이야 물론 없다.
언제였던가? 그때가 한 이십년 가까이 됐나? 부산에서 친척집 아이 결혼식 때, 손님들 틈새에서 설핏 지나치며 겉도는 안부만 물었던 기억이야 있지만.
그때, 솔직히 손이라도 맞잡고 여러 근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둑놈 제 발 저리듯, 데면데면 지나치고 말았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물어보나마나 춘실이도 암환자구만! 아까 모습은 완전 중환자였으니까!’
그러자 마음이 급해졌다. 월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 보다, 무조건 춘실이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탈의실로 다가갔다. 일주일 후에 결과확인 차 들르라는 간호사의 안내를 귓등으로 들으며 얼른 병원 현관로비로 나갔다.
서둘러 널따란 현관로비로 나와서야, 그는 우두망찰했다. 서두르긴 했지만, 뭘 어떻게 만나고, 만나면 또 뭘 어떡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로비는 아까보다 많이 조용해져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오는 시간이라 그런 것 같았다. 오후 손님들이 몰려오기 전의 한산함이 아닐까? 싶었다.
입구에서 잠시 머뭇대는 순간,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통과하게 돼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아직 병원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마치 옛날 잠복근무하듯, 구석자리에 앉았다. 이곳저곳을 주시했다.
‘혹시 진료마치고 가버렸거나, 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말짱 헛일이 아닌가? 입구에서 지키는 게 무슨 소용이랴? 그렇다고 병실마다 다니면서 입원환자 이름을 확인해 볼 수도 없지 않은가! 꼭 필요하다면 모르지만, 수십 개의 입원실에 병상수도 기백 개나 된다는 데…!
물론 이름을 대고 찾자면 그야 금방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름을 대가며 의도적으로 만나긴 면목 없는 일이다 싶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민망한 일이고, 무엇보다 춘실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때문에 미리 알고 찾아나서는 것보다 전혀 뜻밖의 우연한 만남이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해, 그 만남이 인연의 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만남일지라도, 당장의 만나는 방식은 극히 우연하게 만나는 것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병세에는 집중하지도 않고, 이 무슨? 엉뚱한 데다 신경을 곤두세우냐? 하는 자책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개의치 않기로 했다.
대신에 워낙 젊은 시절, 바람처럼 지나간 첫 사랑이었던지라, 혹시 뜻하지 않은 생채기라도 날까? 오랜 세월 의식의 밑바닥에 단단히 가라앉혀 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을 깨워보고 싶었다.
그 기억의 파편들은 발길에 걷어차이는 작은 돌멩이 같은 존재라도 좋겠다 싶었다. 하찮은 돌멩이 속에도 평생 잊지 못한 추억들이 뒤섞여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새 그런 추억들은 지난 시절의 아픔과 민망함을 동시에 되새김질 시키며 아득한 옛날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한 여름 밤이었다. 그날 밤의 그 일은 소나기가 직접원인이었다. 엉뚱한 변명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날 일만 따져보면 정말 그랬다.
물론 그가 그 일이 있은 후에야 명확히 깨달은 것이지만, 춘실이를 좋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벌인 돌출행동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그날 이전에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잘 몰랐고, 뒤늦게 깨달았으니까.
그날, 면소재지 초등학교 운동장 가설극장에서는 영화상영이 있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해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이동영화사 사장의 말마따나 시골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의향연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사에서는 며칠 전부터 자전거에 커다란 앰프를 싣고, 면내에 산재한 자연부락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영화선전과 함께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틀어대며 시끌벅적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 날은 온 면민이 축제분위기에 들썩거렸고, 특히 처녀총각들이 가장 신이 났음이야 물론이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부터 마파람이 건들건들했다. 시원함을 더해주는 반가운 존재였지만, 미구에 몰려 올 소나기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랬던 것이 영화가 막 끝나가자, 으스스 추위를 느낄 만치 바람결이 제법 세졌다. 그와 춘실이는 귀가하기 위해 교문 앞에서 만났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춘실은 또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의 친구 두 명, 춘실이 친구 한 명, 모두 다섯 명이었다. 다 같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널따란 지방도를 따라 귀가를 서둘렀다.
1km쯤에 있는 중리마을을 지나자 갈림길이었다. 관평리와 택정리로 각각 나뉘는 곳. 거기서부터는 차도가 끝나고 농로를 따라 각각의 동네로 향했다. 택정리길에는 그와 춘실이 뿐이었다. 여남은 걸음 뒤처져 따라오던 춘실이도 친구와 헤어지고는 그를 바짝 따라붙었다.
둘은 택정마을 앞을 거쳐 내려오는 큰 내(川) 둑길을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때문에 처음 손전등을 켰으나 이내 꺼버렸다. 평소 아는 길인데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둑길의 높낮이며 비탈짐의 분간이 가능했었기에.
두 살 아래인 춘실이는 어릴 때부터 동네 소꿉친구이자, 친누이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중학을 마칠 때까지 줄곧 학교도 같이 붙어 다녔다. 워낙 작은 동네라 비슷한 학년은 둘뿐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어엿한 열아홉 처녀로 농사일을 도맡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다.
실질적인 가장이란 말은,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일엔 아예 반거충인 탓이다. 옛 자유당시절 몇 년간 면 직원(직위나 계급 따윈 모른다)을 지낸 외엔, 말로만 농사꾼이지, 일하고는 담 쌓은, 쉬운 말로 백수이자 한량(閑良)인 탓이었다.
온 면내에서 알아주는 인사이기도 했다. 원래 호방한 성격에다 대농가의 장남으로 자란 탓에 씀씀이도 컸다. 많았던 토지도 평생 일꾼들 손에 의지해 지어온 데다, 이것저것 벌인 크고 작은 사업 실패로 해마다 줄어들었다.
그나마 옛 자산을 회복하기 위한 안간힘도, 춘실이 생모가 불의의 사고사를 당한 후엔,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놀기 좋아하는 습관대로 고스톱이며 장기, 바둑 등 잡기에 능한 나머지, 유독 내기를 좋아했다. 젊은 시절엔 곧잘 도박판에 끼어들기도 했고. 내기의 성적이야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항상 큰소리지만, 끝나고 나면 항상 밑지는 장사였다. 덕분에 지금은 빈농으로 몰락한 셈이다. 새 엄마도 어지간히 타이르기도, 애원하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도 춘실이 아버지는 마을의 지도자이자, 어른이었다. 학력이나 경력 면에서도 그랬고, 리더십에 있어서도 마을을 대표할 만했다. 지금도 마을 이장(里長)직을 고수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문제는 마을 이장 직을 마을일을 위한 목적에 못지않게, 면소재지 동네나 삼십리 밖 읍내로 놀러 다닐 핑계거리로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겨우 스물두가구의 이장이랍시고 날만 새면 면소재지나 삼십리 떨어진 군청읍내로 나돌았다. 하기야 그곳에라도 가야 장기나 고스톱, 아니 술추렴이라도 함께 할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이에 비해 밤낮 일에만 파묻혀 사는 그의 아버지와는 소위 류(類)가 달랐다. 그의 아버지와 춘실이 아버지는 평생 동네친구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맞는 구석은 거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백안시하는 경우조차 있었으니까.
이유야 간단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춘실이 아버지는 늘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별 볼일 없는 자기네 소작농이었음을 기억했다. 대신 대신 그의 아버지는 춘실이 아버지를 중년이후의 현재만 보려고 했다. 스스로가 노력하여 마을에서 춘실이네를 훨씬 능가하는 부농으로 성장했으니까.
“오빠, 오늘 영화가 들어왔다는 데. 구경 안 갈래? 친구도 만나보고 싶고 해서 가보고 싶은데 올 때가 무서워서…!”
“영화 제목은? 알고 있어?”
“그래.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 라고 했어”
춘실이가 그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그 역시나 갑갑하던 차라, 얼씨구나! 싶었다. 두 번이나 소위 명문대학이란 델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하는 수 없이 후기대학에 합격한 후 한 학기를 마치고 휴학 중이었다. 가을에 군 입대도 해야 한다는 게 핑계였다. 그 역시 거기 가면 친구라도 만날 거니까.
깜깜한 들판 길을 둘만이 걷다보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맹맹한 분위기다 싶어, 그가 올 가을 입대 할 이야길 꺼냈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인데, 3년 동안 오빠 얼굴도 못 보고 어떡하지?”
춘실이 깔깔거렸다.
“3년이라. 3년 후엔 춘실인 이미 시집을 갔겠는데…!”
“아이, 오빤 무슨 소릴? 시집이라니?”
둘은 웃었다. 빗방울이 하나씩 듣는 것 같아 더욱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춘실이 새 엄마가 동생들도 셋이나 되니, 입 하나라도 줄이자고, 얼른 시집보내려 한다는, 동네에서 떠도는 맹랑한 소문을 꺼내려다 참았다.
빗방울이 조금 세지는 것 같았다.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지만, 이대로 가면 비를 피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허허벌판 벼논들만 질펀한 벌판이었으니까.
급하게 걷다보니 목과 어깨에는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마파람이 쉬익 한바탕 불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소나기였다. 둘은 달리기 시작했다. 별 효과는 없을 줄 알면서도 경험상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사이에 벌써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달리던 속도를 줄이며 걷기 시작했다. 이왕 젖어버려 서둘 필요가 없어진 데다 춘실이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자칫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뎌 제법 깊숙한 도랑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까.
중간쯤에 우뚝해 있던 새 못(池)둑 위에 다다르자, 드디어 택정마을회관 불빛이 가깝게 보였다. 불빛을 보자 춘실이 예상치 못했던 걱정을 털어놨다.
“아이 오빠, 어떡하지? 회관이 아직 환하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려고 플래시를 켰다. 그러자 춘실이 기겁을 했다.
“아이 불 꺼. 그걸 비추면 어떡해?”
그는 황급히 플래시를 껐다. 춘실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춘실의 옷도 이미 자신처럼 몸체에 착 달라붙어 벌거벗은 나신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아직 열 시도 안 됐는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빠, 이제 거의 다 왔잖아? 그러니 오빠가 먼저 들어가. 나는 저기 동철이네 농막에서 좀 기다렸다가 갈 테니까.”
“어, 그래. 알았어. 그럼 네가 먼저 가. 내가 기다렸다 갈 테니까”
“아이, 오빠도. 난 이래갖고 못 들어가. 지금쯤 틀림없이 아빠가 회관에 계실거야. 젖은 걸 조금 짜 입기라도 해야지…!”
하긴 춘실이 아버지는 틀림없이 회관에 계실 것이다. 저녁마다 회관대청마루에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괄괄한 시국담(時局談)을 펼치는 게 특기시니까.
그새 농막에 거의 다다랐다. 농기구와 자재들, 그리고 짚가리와 사료가마니 들을 넣어두는 농사자재창고였다. 문이야 있었지만 닫으나 마나한 상태였다.
그는 망설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춘실이를 혼자 두고 먼저 가려해도 체면이 안서는 짓 이었고, 먼저 보내자니 춘실이 또 난감해했다. 그새 빗줄기는 그새 많이 가늘어졌다. 둘은 엉거주춤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름 냄새 같은 게 났지만, 참을 만했다. 잠시 쉬자 싶어 짚가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춘실이도 잔뜩 웅크린 기색으로 곁에 앉았다.
그가 축축해진 윗옷이라도 빗물을 짜 입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의도치 않게 그의 손등이 춘실의 앞가슴 부분을 스치고 말았다. 춘실이 화들짝 했다.
그런데, 춘실의 화들짝이 그의 본능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소나기를 맞을 때부터 농축돼 온, 상상과 관념속의 욕망이 현실 속으로 표출돼버린 셈이었다.
그가 와락 춘실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그의 도발에 춘실은 본능적으로 뻗댔지만, 이미 불덩어리로 변한 그의 완력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대신 너무 기가 찬 탓이었을까? 아님 소나기를 맞아 추운 탓인지? 그도 아니면 그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춘실은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춘실의 귓불을 지나 입술을 덮쳤다. 땀 냄새가 스쳤다. 빗물과 땀이 뒤범벅으로 엉켰다. 서툰 동작과 씨근대는 숨소리에 주변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소나기가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폭풍의 시간이 지나자 어색한 정적이 스멀스멀 찾아들었다. 바깥 소나기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둘은 말이 없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 싶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겨우 그가 내뱉었다.
“미안해. 하지만 진작부터 말은 못했지만…! 그래, 말은 못했지만…!”
그가 더듬거렸다. 대신 춘실은 미동도 않은 채, 숨결을 고르기에 바쁜 것 같았다. 한참만에야 머쓱해 있는 그에게 엉뚱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오빠. 이래갖고…! 집엘 어떻게 들어가지?”
“…!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지. 벌판에서 비를 맞았다고, 솔직히 얘기해”
“알았어. 내가 먼저 들어갈 게.”
이상한 일이었다. 춘실은 갑자기 용기백배한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아무 말도 없이 창고를 잽싸게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끈질기게 그 여자 아니, 춘실을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몇 시간째 기다려보았지만 나타나질 않았다. 혹시 잘못보거나 허상을 본 건 아니었을까?
‘도대체 만나서는 뭘, 어쩌겠다는 건데? 부질없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저 근황을 묻고, 어떻게 살아 왔느냐? 를 물어보겠다고. 그게 무슨 소용?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유치한 감정의 유희(遊戲)에서 헤어나라고!‘
자조(自嘲)섞인 웃음이 입가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내면의 또 다른 생각도 지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야. 꼭 만나봐야 해. 젊은 날의 소중한 기억들도 되살려보고…, 또 혹시라도 오해가 있다면 풀도록 해야지.“
그랬다. 세상 뭇사람들이 뻔뻔하다며 손가락질 하더라도 만나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만날 걸 전제하자,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용암이 분출하듯, 계속 줄줄이 깨어났다. 못다 한 이야기들이 엄청 많은 것 같았다. 옛날 함께 보고 느꼈던 사소한 기억들마저 모두 순정어린 스토리로 연결되며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고 신기했다. 평상시 화석 속에 박혀버린 이야기로 치부하고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었는데·!갑자기 봇물처럼 쏟아지다니?
그러자 끝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 같았다. 결과야 어찌되던…! 하루나 이틀, 아니, 사흘이나 열흘이라도…!
그는 창밖 로터리의 자동차 물결에 시선을 준 채, 상상의 나래를 폈다. 어떻게 우연한 만남처럼 가장할 수 있을까? 또 옛날의 춘실이를 어떻게 단박에 알아봤다고 설명할 것 인가?를, 궁리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아전인수 격이지만, 특별한 텔레파시라도 통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인 눈빛 하나를 믿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특별한 교감이 없고서야 가능할까 싶었다.
아무리 가깝고 친했던 사람도 수십 년 만에 만난다면, 얼른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그럼에도 단박에 알아봤다면? 그건, 마치, 의식의 맨 아래층에 가라앉아 도저히 되살아날 것 같지 않던 춘실이에 대한 기억상자가, 단 한 번의 눈빛에 깨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춘실의 정보는 쉼 없이 그의 기억창고에 저장돼왔구나 싶었다. 비록 눈에서 멀어졌고, 생각의 범주에서도 멀찍이 벗어난 상태였지만. 중단없이 업데이트 돼 온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그 일이 있은 이후,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그는 거의 매일 춘실일 만났음이야 물론이다. 아침저녁, 이웃으로 만나고, 친구로서도 만났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둘의 관계를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칫 처녀 신세를 망친다는 게 당시의 세태였으니까.
가을이 지나고, 그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후에야 춘실이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하나 둘 구체적으로 생각나기 시작했다.. 장래의 희망이라든가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등. 뭐 한 가지 약속한 것도 없었다. 손가락 걸고 맹세한 거야 더더구나 없었다. 순진하게도 그저 이심전심으로 통한 걸로 믿었으니까.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 몇 달 후, 월남전에 참전했다. 종전이 다가오던 70년대 초반이었다. 전장에서도 용케 건강하게 돌아왔고 제대를 했다.
그러나 춘실이는 없었다. 춘실은 이미 남의 아내가 된 뒤였다. 그것도 더욱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먼 촌수의 집안 형님의 아내, 그러니까 그에겐 형수뻘이 되어있었으니까. 기막힌 현실 앞에 오열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 두 살 위인 그 형님은 M시에서 H합섬이라는 회사에 다닌다는 이야길 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거의 왕래조차 없었다. 촌수도 멀었고, 사는 곳도 같은 군내 이웃면이긴 해도, 학교나 생활권이 각각 달랐으니까.
처음엔 배신감에 춘실을 원망하기도 했다. 어떻게 일언반구도 없이?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고향 친구에게 넌지시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야, 임마. 넌 정말 의리도 없고.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며?”
친구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 친구의 동생 영순이가 춘실이와는 학교 동기이자, 단짝이라 했다. 춘실이가 시집가기 전 영순이께 전해준 이야기였다면서.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춘실이가? 싶기도 했었다.
‘인정머리가 없다고? 그 많은 편지는 다 어떡하고?’
월남의 정글 속에서도 틈만 나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는 그 형님과의 중매결혼이 직장도 괜찮고, 또 집안도 그런대로 괜찮은, 모든 점이 고려된 걸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신의 의리 없고 인정머리 없음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니?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화증으로 속만 끓일 수밖에.
청맹과니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우유부단했던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탈출구는 하루빨리 고향에서, 고향의 그림자도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누구나 도시로 공장으로 치달을 때였으니까.
이튿날에도 다시 병원에 나갔다. 통원치료를 받으러 매일 오는 환자처럼, 또는 병 문안객처럼 가장한 채. 현관로비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멀거니 창밖으로 자동차 행렬을 바라보거나 오가는 행인들을 지켜보는 것도 별로 심심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눈은 출입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사람. 병색이 완연하여 저승꽃이 훤하게 피었다 싶은 사람.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들어서는 사람. 응급차에 실려 코와 입에 호스를 끼운 채 들것에 실려 오는 사람에다, 때로는 젊디젊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오전 내내 춘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금 병실 어딘가에 입원해 있는 게 틀림없겠구나! 추측이 들기도 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은 검진결과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병원에 일이 있다 싶으니 병원 출입문 들어서기가 한결 당당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나빠진 건 없습니다. 계속 약을 복용하시고, 식사 조심 하십시오”
대장암에 대한 예후설명이었다. 수술 받은 지 2년째다. 5년을 넘겨야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의사가 했었다. 평범한 소시민이 퇴직을 하고, 나이들어 상처(喪妻)까지 했지만, 이때가지 그런대로 건강유지 잘 해왔다고 의사는 부추겼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느긋해지지가 않았다. 춘실이는? 어떤 상황일까?
병원에서 처음 춘실이를 본 이후, 여드레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마치 출근하듯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아! 그런데…! 병원 앞에 주차한 자동차에서 춘실이가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에 옮겨 타고 있었다. 원 이렇게 일찍?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른 시각이었다.
지난번과 같이 40대의 남자가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는 실례가 아닐까 싶을 만치 휠체어에 앉은 여인을 정면으로 세심하게 바라봤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털모자를 쓰고는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쭈뼛거리며 휠체어 앞으로 다가가 40대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환자분 어릴 때 고향이 H군이 아닌가요?”
“맞긴 한데…? 영감님은 누구신데요?”
40대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춘실이 가느다랗게 눈을 뜨는가 싶었다.
“아! 이런 우연한 만남이? 혹시, 모친 성함이 강춘실씨가 아닌가 해서요?”
그는 서둘러 우연하게 알아본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 순간 떴는지, 감았는지 흐릿하던 춘실의 눈빛이 반짝했다. 초점을 그의 얼굴에 맞추는 듯, 동공이 잠시 움직이는 듯 했다.
“영진이 오빠?”
춘실이가 탄성처럼 터뜨린 말은 짧지만 또렷했다.
“춘실이가 맞았네.. 난 긴가민가해 쉽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는데…”
그가 비로소 안심한 듯 털어놓았다. 40대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방금 벌어진 이 돌발적 상황이 아들에게도 쉽게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춘실은 힘이 부치는 듯 눈을 감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폈다. 아들이 어떻게 아느냐? 눈짓으로 물었다.
“어릴 때 고향마을에서 함께 자란 사람이지. 그런데 모친은?”
아들은 그제야 이해가 되는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대장암 말기랍니다. 장기간 입원해 계셨는데, 지금은 병실사정으로 일주에 한 번씩 통원치료를 받으러 옵니다.”
아들이 서둘러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뭐? 대장암? 이 무슨…?”
순간, 그는 턱없이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같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서 만나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인연의 덫에라도 갇혀버린 걸까!
“그럼, 아버님은?”
“아버님은 돌아가신지 십년도 지났어요. 아버님도 잘 아세요?”
“그럼, 집안 형님뻘이니까. 아주 촌수야 멀지만”
“그럼 아저씨뻘이네요. 못 알아봐 죄송합니다.:
아들은 싹싹하게 말했다. 내친 김에 다음 말이 쉽게 나왔다.
“그래요. 그런데 내 잠깐 모친한테 뭘 물어보면 될까?. 어릴 때 추억담이야”
“어머니가 기력이 약하셔서…, 잠시 얘기 해보세요. 꼭 그러시다면…?”
아들은 접수창구로 향하고, 그는 허리를 굽혀 눈 높이를 맞추며 춘실의 손을 잡았다. 춘실이 눈을 떴다. 그가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춘실이 힘들지. 아들한테 이야기 잘 들었네. 사실은 나도 이 병원에서 대장암 수술까지 받았거든.”
춘실의 눈이 다시 떠졌다. 놀람이 역력했다. 그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노파심에서 무리한 줄 알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꺼냈다.
“그리고 힘들겠지만, 내 한 가지 물어보자. 내가 옛날 월남 갔을 때, 의리 없고 인정머리 없다고 했다면서…”
일언반구 소식도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는 물음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춘실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가 한 번 더 물어 보려 했을 때, 춘실이 다시 반짝 눈을 떴다.
“처음에 그랬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편지를 숨겼던 걸요.”
“뭐? 아버지께서?”
그가 멍해졌다. 춘실이 아버지의 우락부락하고 괄괄하던 인상도 생각났다.
“쥐방울만한 놈들이…? 싹수가 노랗구만..”
중학시절. 그가 옆 동네친구들과 닭서리를 하다 들켜 지서까지 불려간 일이 있었다. 그때, 춘실이 아버지가 온 동네사람들께 비아냥대던 말이었다. 그가 두 번 연속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소문보다 엄청 맹한 놈이라며 그의 아버지에게까지 싸잡아 놀렸던 기억도 새롭게 났다.
“그랬어? 내가 이름을 다르게 써서 보냈는데도?‘
“오빠, 그게 더 잘못 됐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편지를 보내오니까, 나 몰래 뜯어봤겠죠? 그래서 저의 결혼도 더 서둘렀고요.”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도 아니고? 가슴이 뻥 뚫리기보다 오히려 먹먹해왔다..
“그래서…! 그래서 답장 한 장 없었구나.. 날 많이 원망 했겠네…?”
“주소를…, 오빠네 집에 묻기도 그랬고…, 아버지가 워낙 무섭기도 했고. 원망은 무슨? 다 운명이고 팔자였어요. 이렇게 죽을 때가 다 돼서야…, 참!”
춘실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 같았다. 그도 울컥하는 기분이라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문득‘빗나간 인연’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접수를 마친 아들이 휠체어로 돌아오며 말했다.
“어머니, 이제 진료실로 들어갑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