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민간산악구조대인 서울산악조난구조대 창설의 배경이 된 산악사고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1968년 설악산 십이선녀탕 조난사고,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사고, 1971년 북한산 인수봉 하강사고 모두를 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8년과 71년 사건만 배경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사고사례는 많이 소개될수록 좋다는 판단하에 시간순으로 모두 소개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아래 사고는 매우 유명하여 약간의 검색만으로도 동일한 글을 많이 볼 수 있는 관계로, 원작자를 알기 어려워 별도의 출처는 밝히지 않습니다.
가을도 무르익어 푸른 하늘이 아득하던 1968년 10월 22일 오후...
가톨릭의대 산악부원인 김형옥, 김신철, 김한종, 민병주, 강형태, 박승호 등 남학생 6명과 홍정숙, 한명숙, 조나령 등 여학생 3명은 산악회 제3회 추계 설악산 등반을 위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다.
춘천에서 일박한 뒤 10월 23일
4시 30분
기상해 5시 20분 발 남교리행 버스를 탄다.
9시 20분
남교리에 도착, 빵과 사과로 아침을 대신하고 12선녀탕 계곡으로 출발했다.
키슬링, 군용 휘발유 버너, 털스웨터, 망원경, 무전기 등 당시로선 갖출만한 건 다 갖춘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된 등반이었다.
오전 11시
제1탕에서 점심을 지어먹고, 복숭아탕을 지나 막탕에 도착해 계획대로 야영에 들어갔다.
10월 24일
아침 7시
기상해 보니 밤새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서울대 의대생 5명이 그들을 지나 상류로 올라갔다. 9시가 조금 지나 이들도 짐을 챙겨 산행에 들어갔다.
얼마쯤 오르자 빗방울이 후드득 나뭇잎을 때린다.
지나가는 소나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판초를 꺼내 입고 산행을 계속한다.
대승령과 안산으로 빠지는 길목 초입에서 큰 바위 아래 얕은 동굴을 발견하고 비를 피해 가기로 한다.
빗방울이 거세지자 민병주가 정찰을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 젖은 옷을 말린다.
그러는 새 동굴 안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찰 나갔던 민병주가 돌아와 짙은 안개로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길도 물에 잠겼으니 밥부터 해 먹자고 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동굴 안이 흠뻑 젖어 불을 피우기가 어려워 모두 점심과 저녁을 굶은 상태에서 밤을 맞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온이 떨어지면서 비가 싸락눈으로 바뀌었다.
밤이 깊어지며 강풍이 불자 단풍 지던 가을산이 삽시간에 겨울산으로 돌변했다.
기온이 대략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자 버너 두 대를 피웠지만 추위를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운명의 10월 25일
여명 무렵인 새벽 6시
설악산 12선녀탕계곡 막탕에서도 1킬로미터 정도 위 커다란 바위 아래의 틈에서 가톨릭의대 산악부원 9명은 점점 심해지는 비바람에 얼어붙은 몸으로 초조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24일 오전부터 폭우로 계곡길이 잠겨 하산길이 막혔고, 간밤에 진눈깨비에 기온 급강하하자 몸이 얼어 버너에 기름도 못 넣을 정도로 다들 몸이 굳은 상태였다.
동굴 안에도 물이 질척할 정도로 고이자 리더 김신철이 12선녀탕계곡 입구인 남교리로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짐은 두고 자일, 판초 등만 챙겨 하산을 시도한다.
부리더인 김한종이 자일을 묶고 급류 속으로 들어갔다가 건너지 못하고 후퇴,
김신철이 시도했지만 급류에 쓸리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오전 8시
천둥 번개에 폭우가 계속된다.
리더인 김신철이 다시 하산을 결정한다.
계곡길을 건너는 건 포기하고 산기슭을 따라 길을 뚫으며 하산한다.
빗물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비가 쏟아졌고 길 내기도 어려워 암벽을 횡단해 가며 탈출로를 찾았다.
오전 11시
1킬로미터 정도를 3시간 걸려 복숭아탕(제8탕)에 도착한다.
낙오자 방지를 위해 일렬로 내려갔다.
비상식으로 빵을 나눠먹는데 김한종은 이미 탈진해 빵을 씹지 못할 정도였다.
리더인 김신철도 의식이 흐려져 김형옥이 자일을 매고 조나령이 김한종의 배낭을 메었다.
김형옥, 홍정순 등이 교대로 김신철, 김한종을 부축했다.
두 사람은 리더, 부리더로 책임감으로 앞장서 하산길을 찾다 체력이 먼저 다한 걸로 보인다.
얼마 뒤 김신철, 김한종이 졸린다며 쓰러져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뺨을 때려도 안 깨어나 모두 일단 정지했다
오전 11시 30분
불을 피우려고 했지만 버너가 작동 안돼 실패했다.
실신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마땅한 피신처도 없어 그들은 대열을 나누기로 한다.
김형옥, 민병주가 계속 하산해 구조요청을 하고 나머지는 쓰러진 두 사람을 지키기로 한다.
김형옥, 민병주는 필사의 노력으로 하산을 하던 와중에 서로 헤어지고 만다.
그러다 김형옥도 탈진해 판초를 뒤집어쓴 채 의식을 잃었다.
이때 나머지 사람들은 쓰러진 두 사람을 데리고 느린 걸음으로 하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지친 사람들이 탈진해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해 내려가는 길, 파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명숙이 먼저 탈진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모두 판단력을 상실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김신철, 김한종을 한명숙이 데리고 있기로 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구조대를 부르러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함께 붙어 체온을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세 팀으로 분산됐으니 점점 상황은 암울해져 갔다.
홍정순, 조나령, 강형태, 박승호 이 네 사람도 내려가는 중에 지쳐 떨어지기 시작한다.
먼저 강형태, 박승호가 고꾸라졌다.
홍정순, 조나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더 내려가서야 두 사람이 없는 걸 안다.
둘은 마음이 조급해져 산줄기를 버리고 물길 옆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한참을 가다 커다란 바위가 나오자 홍정순이 먼저 지나고 뒤이어 조나령이 지나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급류 속으로 사라진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홍정순은 산줄기로 올라붙어 길을 재촉한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자 홍정순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덮고 잠에 빠져든다.
당시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 [ 1968년 10월 28일자 경향일보]
10월 26일
사흘 만에 날이 갰다.
햇살이 비치고 계곡물도 반이나 줄어 있었다.
눈을 뜬 홍정순은 간신히 일어나 하산을 계속했다.
도중에 판초를 뒤집어쓴 채 자고 있는 김형옥을 발견하지만 그 자리에 두고 계속 하산한다.
얼마를 더 걷자 쓰러져 있는 민병주가 눈에 들어왔다.
홍정순은 맥을 짚어봤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민병주의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그곳에서 산기슭을 돌아 마을 쪽으로 내려가다가 3시 30분께 남교리 주민을 발견하고 구조요청을 한다.
마을 주민이 끓여준 미음을 먹고 홍정순은 횃불을 켜든 구조대 4명과 함께 악몽과도 같았던 계곡길을 다시 오른다.
오후 7시
의식을 회복해 있던 김형옥을 발견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기온이 내려가자 구조를 포기하고 하산한다.
당시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 [1968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10월 27일
남교리에 도착해 있던 동국대 산악부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수색에 들어갔다.
오전 11시 30분
제1선녀탕 밑에서 급류에 휘말려 사라졌던 조나령의 시신을 발견했다.
오후 3시경
제1선녀탕 밑 함지박골 부근에서 김형태, 박승호도 죽은 채 발견됐다.
둘 다 물에 떠내려 온 듯 보였다.
오후 4시경
소나무에 기댄 채 숨져있는 한명숙을 발견했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듯했다.
가장 먼저 낙오했던 김신철, 김한종, 민병주는 28일에 시신이 수습되었다.
기습적인 가을 폭우에 꽃 같은 젊음이 7명이나 스러져 간 것이다.
십이선녀탕계곡에 세워진 위령비
아래는 중앙119구조대 재난사례 발간집의 내용을 약간 편집하였습니다.
1. 사건 발생개요
가. 일시 : 1968. 10. 26
나. 장소 : 강원도 설악산 12선녀탕
다. 원인 : 하산길에 폭설과 폭풍우로 인해 산속에 고립된 상태에서 사망, 실종, 부상당한 사고임.
2. 피해사항
인명피해 : 9명(사망 4, 실종 3, 부상 2)
3. 경과 및 조치내용
가. 경과과정
이들 카톨릭의대 산악회원들은 카톨릭의대 산악회 제3회 추계 설악산 등반을 위한 제1진으로 ‘68. 10. 22일 밤 7시경 서울 성동역에서 기차로 출발
23일 오전 10시경 남교리에 도착 12시경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5Km 떨어진 내설악의 12선녀탕 길을 오르기 시작
이날 밤 8탕까지 올라갔다가 24일 아침 심한 비와 진눈깨비가 내리치고 짙은 안개까지 겹치자 등반을 단념하고 하산하는 도중 절벽에서 등반대원 1명이 실족 추락
그를 구조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하산하다 또 1명이 급류에 휩쓸림
이어 조난자 중 홍○○양과 김○○군은 나머지 대원 5명을 중간에서 대피시키고 계속 하산하다 김 군이 1탕 부근에서 쓰러짐
홍양 혼자서 아래 부락까지 내려와 마침 70여 m의 개울을 건너기 위해 정찰을 나왔던 동국대 산악대원과 만나 조난 소식을 알림
동국대 산악대원이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상황이 알려짐
나. 조치내용
급보를 접한 현지 경찰과 의용 소방대원 부락민 등 100여 명과 치안국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 현지로 출발하는 한편 비보를 접한 카톨릭 의과대학 측에서도 현지로 출발 구조작업에 동참
다. 인명구조활동
(1) 경찰, 의용소방대, 부락민 : 사체 4구 인양
(2) 부락민, 동국대 등반대원 : 부상자 2명 구조 인근 군부대 병원으로 이송 입원조치
4. 문제점 및 대책
가. 문제점
1) 등산 경험 부족
산악반이지만 대부분 등산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2) 등산장비 부족
조○○양, 박○○군의 가족들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출발 시 쌀 석 되와 몇 가지 반찬 등을 갖고 점퍼 차림으로 등산장비를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다는 점
3) 팀 리더의 위기 대처능력 부족
위기상황 속에서 팀을 해체하여 개별 탈출을 시도하게 하여 사망 및 실종의 원인이 됨
나. 대 책
1) 산이 저기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어느 등산가의 말이 생각난다.
등산은 워킹이 아니며 산책 또한 더욱더 아니다. 그러므로 단계별 전문교육훈련 과정을 이수하여 난이도별 등산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2) 이 사고는 동사가 겨울산에서만 발생한다는 일반의 통념을 바꾸어 놓은 가을장마가 빚어낸 사고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전기, 막영 장비, 외투, 여유분의 식량 등 필요한 장비를 챙기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3) 조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2명의 선발대원을 하산시켰으면 잔여 대원들은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여 구조대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며 대원들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하여 진정시키는 안정을 취해야 하며 개별 하산은 금해야 한다.
5. 장마철 등산 시 유의사항
국내 조난사고의 발생 통계를 보면 연중 46%가 여름 산에 집중되어 있다.
이중 호우와 급류에 의한 익사사고가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산악기상은 매우 가변적이며 국지적인 현상이 잦다.
대부분 7월까지 이어지는 장마철과 태풍이 몰려오는 8월에 특히 국지적인 호우현상이 많다.
앞 사고와 같이 가을철 폭우가 조난을 유발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집중 호우란 짧은 시간에 많은 비가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것을 말하며 장마철과 장마의 끝 무렵이나 초가을 또는 태풍시에 흔히 볼 수 있으며 큰 수해를 일으키는 일이 있다.
습한 기단의 침입이나 전선 활동 태풍의 영향 등에 의하여 시간당 강수량이 수십mm에 이르는 강한 비가 비교적 좁은 지역에 지속적으로 쏟아지며 뇌우를 수반하는 수가 있다.
이는 한정된 좁은 지역에 내리므로 기상대와 측후소에서 충분히 관측하기 어렵고 정확한 예보를 하기도 곤란하다.
이런 집중호우가 계류의 범람, 등반자의 체온저하, 산사태 등을 유발하는 여름철 산악사고 주범이 되고 있다.
이런 때 계곡에서의 막영은 피해야 하며, 등산로도 계곡의 등산로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계곡에서 막영을 하게 되었다면 비가 내리면 한밤중일 지라도 지체없이 막영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