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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송학동 성당
 
 
 
카페 게시글
오늘의강론 스크랩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미카엘라 추천 0 조회 19 15.10.13 10: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중 제28주간 화요일>(2015. 10. 13. 화)(루카 11,37-41)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이 말씀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겉만 깨끗하게 해서 하느님께 겉모습만 보여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 6,4), 즉 '속'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 보여드리는 것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고,
그래서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은 잔과 접시에 들어 있는 음식을 가리키고,
이것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뜻하는데,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고 하셨으니,
그 재산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산입니다.
즉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 죄가 되는 재산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깨끗해지기를 바란다면 그런 재산은 버려야 합니다.

 

속에 쓰레기를 담아 둔 채로 깨끗해질 수는 없습니다.
'겉'은 깨끗하게 닦을 수 있겠지만 '속'은 닦지 못합니다.
우선 먼저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겉과 속을 모두 깨끗하게 닦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그냥 버리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 재산으로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경우에 '자선'은 탐욕과 사악에 대한 '보속'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과 속을 모두' 깨끗하게 닦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속'이 깨끗하다면 '겉'은 깨끗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깨끗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화장과 성형수술 등으로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영혼과 마음이 아름다워야 진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아름답고 예뻐도,
속에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그것은 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무엇을 보여드려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행동과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하는 행동이 같은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착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거룩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는데,
아무도 안 볼 때에는 정반대 모습으로 바뀐다면?
보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말이 마치 훔쳐보신다는 말처럼 생각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양심'은 하느님 현존의 표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나뭇잎으로 알몸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죄가 없을 때에는 부끄러움을 몰랐던 사람들이었는데,
죄를 짓고 나서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양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느낀 부끄러움은 양심의 가책이고, 죄책감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양심은 선악과를 따 먹기 전부터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었고,
선악과를 따 먹자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바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사람들의 '잠들어 있는 양심'을 깨우는 '경고'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됩니다.
만일에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리사이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양심이 잠들어 있는 것이고, 그것도 위선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자기는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하다고 큰소리칠 수 있을까?

 

그런데 죄를 자꾸 짓다 보면 양심이 흐려지다가 결국에는 마비됩니다.
양심이 없는 것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쪽에서 하느님을 떠나는 것이고, 하느님을 피해서 숨는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고,
그래서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되고,
누가 꾸짖고 비판하면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냅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바로 그런 단계까지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자,
그들은 반성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1,54).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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