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향 · 2
박 민 순
나는 향수병(鄕愁病)이란 지병을 가지고 살고 있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내 마음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향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속절없이 세월 따라 청춘만 간다더니 고향 떠난 세월이 35년이나 되었다.
타향살이 홍진의 때를 벗어버리고 고향산천에 피어나는 꽃과 향기를 호흡하면서 메마른 마음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삶의 활력을 재충전하며 사는 노력이 내겐 언제나 필요하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과 더 나은 생활을 위해, 국토개발이란 이름아래 신도시 건설 · 댐건설 등으로 인해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기쁨 반 슬픔 반으로 고향을 떠나왔다.
우리는 어깨를 맞대고 살던 정든 친척과 이웃사촌, 만고풍상을 같이 겪어온 정겨운 산천초목, 그리고 객지로 떠나올 때 넉넉한 마음을 가진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오라고 손을 흔들던 동구 밖의 그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못 잊어 고향을 찾아가며 살고 있다.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꽃내음 속에서 버들피리 꺾어 불고, 여름이면 숨 막히던 더위에 참외 수박이 익고, 가을엔 타는 노을 속에 돌담 위로 피어오르던 저녁연기로, 겨울엔 문풍지를 파고드는 시린 바람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왔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님이 짓고 홍난파님이 곡을 붙인 ‘고향의 봄’ 노랫말처럼 나의 고향도 야생화에서부터 과실수에 이르기까지 꽃의 축제가 펼쳐지는 산골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그 고향이 시골이냐 도시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시골을 고향으로 가진 사람보다는 도시를 고향으로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오산시는 중소도시이다.
이곳은 나무숲보다는 콘크리트숲이 많고 길마다 아스팔트로 뒤덮여 흙을 밟으려면 근교의 야산이나 시골길을 걸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신토불이 내 고향.
가난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가득했고 협동심 강했던 곳.
그러나 고향도 세월 따라 바뀌어가고 있다.
집집마다 잎담배를 경작했었는데 20년 전부터 서양 참외인 멜론 생산지로 바뀌었다.
내가 태어나 열두 살까지 살던 충남 천원군(현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한신 마을.
집 앞에는 야트막한 안산이, 집 뒤로는 조금 높은 뒷동산이 있고 새벽이면 뻐꾸기와 까치가 노래하고 밤이면 소쩍새와 부엉이가 찾아와 놀던 곳.
앞마당 헛간엔 싸리 빗자루, 멍석, 가마니, 거적, 지게, 농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외양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유의 쇠죽을 맛있게도 먹던 벽창우(고집 세고 힘 좋은 소)가 자기 성질을 못 참고 *뜸베질을 할 때도 있었다.
뒤뜰에는 펌프우물과 내 키보다 훨씬 큰 고욤나무, 감나무가 철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따 먹는 즐거움을 선사하던 곳.
뒤뜰 화단엔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백일홍, 백합, 나팔꽃이 앞 다투어 피어나고 사철나무는 소나무처럼 사시사철 무성하여 꽃냄새, 나무냄새 가득하던 곳.
장독대엔 엄마의 손맛이 담긴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이 담긴 장독들이 키 재기하듯 나란히, 그 옆엔 터주가리(일반적으로 서너 되들이의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원추형 모양의 짚을 틀어 엮어 씌운 형태)가 서있었다.
바깥마당 긴 빨랫줄에 외로이 걸쳐 있는 높다란 바지랑대 끝에는 잠자리가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다 가고….
뒤덮은 호박덩굴 속에서 꿀을 따던 호박벌을 검정고무신에 넣고 빙빙 돌리다가 땅바닥에 내려쳐 잡고, 담을 타고 지나가던 능구렁이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일 등, 집안 구석구석 나의 손때가 묻고 추억으로 가득한 나의 고향집.
여름밤이면 반딧불을 움켜쥐고 멍석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고, 겨울이면 화롯가에서 밤과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듣던 아름답던 그 시절을 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방구, 찜뽕, 가이샹, 땅뺏기, 굴렁쇠 굴리기, 다마(구슬)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고무줄놀이(여자), 그림딱지 따먹기, 깡통 차기, 연 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제기차기, 딱지치기,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하던 친구들도 전국 방방곡곡의 어디메쯤에 살면서 나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있겠지.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설레임을 주었던 소녀들은 시집가서 펑퍼짐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되어 가정을 꾸렸을 테고, 친구들은 사회 요소요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각기 다른 직업을 갖고 살고 있겠지.
몇 년 뒤면 지천명(50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까.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단어들은 왜 이리도 많은가.
인두, 대청마루, 사랑방, 골방, 사금파리, 책보, 모시적삼, 다듬이, 맷돌, 옥양목치마, 청솔가지, 뜰팡, 질경이, 망초대, 쇠똥때, 부지깽이, 아이스깨끼, 또랑….
바쁜 일상에서 생활에 지치고 삶이 당신을 속일 때, 한 번 쯤 모든 것을 접어두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일일 듯싶다.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향은 을씨년스럽지만,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시던 부모님은 이미 저세상에 가셨지만, 고향은 엄마의 젖무덤 같이, 치마폭 같이 포근한 곳이기에.
<2002, 오산문인협회 ‘오산문학’ 제13집>
* 뜸베질 : 소가 뿔로 이것저것(물건)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는 짓.
<글을 읽고서>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마음으로 받아 감사히 머물러봅니다. 허천(시인 주 응 규)
고향은 영원한 그리움입니다. 나뭇꾼(시인 한 석 산)
고향도 오래되면 마음의 고향으로 있을 뿐 찾아가면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고 쓸쓸하게 돌아와야만 하는 게 고향입니다.
다는 그렇지 않겠지만 저는 고향 떠난 지가 오십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사촌이 있다하나 이제 연세가 들어 밥 한 끼 얻어먹는 것도 마음이 아프답니다.
간신히 두 부부만 해 먹는 밥, 사촌도 손님이라 대하기가 자기 식구만 하겠습니까?
들어가지 않자니 남의 이목이 무섭고, 들어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사람이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답니다. 청천(시인 장 희 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향수병이겠죠. 담쟁이나무(시인 이 영 순)
내가 유일무이하게 끝끝내 다 부르지 못하는 노래(동요 포함)가 있는데 그것이 ‘고향의 봄’입니다.
거의 마지막 소절로 가면 목이 메어 오기에….
‘뜸베질’이라는 말 배워 갑니다. (재미교포 가 람)
풀벌레소리가 먼저 떠오르는 고향산천, 생각만으로도 그립습니다. 우목(허 권 립)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단어들이 참 많군요. (파스텔)
시골의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계절마다 고향의 풍경은 선하지요.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맨발로 바람을 가르며 고향땅을 달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여울목)
천안하면 삼거리밖에 모르고, 지나는 가봤어도 목표로 해서 들러보지 못했지만
박 선생님의 고향 마을은 풍요했을 걸로 생각됩니다.
시인 · 수필가로서의 타고난 관찰력과 이해력은 타고나셨을 수도 있겠지만,
따뜻한 눈길은 고향의 자연과 사람들과의 생활 속에서 자라났을 거라 감히 추측해 봅니다. (로제타)
역시 동향이라 그런지 그 그리운 모습이 여전 내 고향인 듯합니다.
자나 깨나 그리운 고향노래에 적극 공감합니다.
한편 우리의 고향은 언제라도 가 볼 수 있는 지척에 있으니 천만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평생 고향을 그리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실향민들께 송구하기도 합니다.
정암(수필가 유 제 범)
샘물, 동구 밖, 뜸베질, 뜰팡, 바지랑대, 구유 등 사라져가는 옛말을 저도 주욱 옮겨서 적었습니다.
충남 천원군(현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한신 마을이 고향이군요.
열두 살까지 살았던 고향인데도 옛말을 많이도 기억하고 있군요.
저는 서해안지방.
마을이 농공단지, 고속도로, 일반산업단지로 박살이 났지만 그래도 북편 산자락은 남아서 고향은 그런대로 흔적이 있지요.
저는 퇴직한 뒤 고향에 주소지를 옮겨서 혼자만….
빈 집이 되어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지요. (수필가 최 윤 환)
고향은 언제 찾아도 정겨움이 있지요. 이헌(시인 조 미 경)
아름드리 느티나무 간간히 그립겠군요. (시인 남궁 연 옥)
자꾸만 잊혀가는 우리의 정다운 지명.
언젠가는 가만히 지명을 떠올려 보았는데 삼분의 일도 생각이 나지 않아 서글펐던 적이 있었다.
올(2018) 4월에는 초막골샘이 있던 자리부터 더듬어 내려와
그 아래 근수엄니가 쓰던 돌샘(내가 6학년 때인가? 맑은 물에 빨래를 하겠다고 상류로 올라가다보니
아랫마을에 살던 내 눈에 아주 좋은 빨래터를 발견하고는 신나게 빨래하다
근수엄니에게 호되게 야단맞은 샘은, 또랑하고 붙어있었고,
더구나 신을 모시는 근수엄니의 정화수를 뜨는 샘이었으니…)을 찾았으나 초막골샘도, 돌샘도 추억의 샘물일 뿐이었다.
지금도 꿈에서 가끔 걷는 빨래하러 가는 길.
연구네 집 앞을 지나 작은 폭포 같은 언덕길을 올라 물을 건너 올라가던 길도 없어져
아예 어디쯤일지 가늠도 어려워졌다.
수해 때문인지 아주 엄청 변했다는….
흔적도 없다는 게 서럽더라.
그 길에서의 추억은 없는데 무심했던 그 길이 왜 꿈에 나타나는지….
그리고 내가 살던 옛집이 가끔 생각이 나서 가볼라치면
언제나 대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 날은 대문이 빼꼼….
아무도 없어 살짝 안마당을 들어가 보니 내가 밤새 책을 읽던 사랑방의 문은 문살만 앙상하고,
외양간도 없어지고 그래도 누군가 수리해 살고 있는 집은 반갑고 고마웠다.
또랑을 건너고 인자가 살던 곳을 지나 승찬네 집도 겉에서 보고
희순네가 살던 집터를 지나 이학수 선생님의 집을 보고….
그렇게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는데 기억 속의 내 유년의 모습처럼 정겨웠던 마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허전한 맘을 안고 내려온 숲거리.
에어컨을 켠 듯 시원했던 이름도 이쁜 숲거리.
지금은 플라타너스나무들을 베어 이름에서만 따라다니는 산들바람뿐이지만
정말 우리 어릴 때는 수신면에서 젤 시원한 곳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말씀하시곤 하셨다.
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줄지어 늘어선 동구의 큰길은 정말 멋있고 정겨운 곳이었지.
그 숲거리에 우리 친정 부모님은 집을 지었고 나는 가끔씩 달
그늘에서 그리운 이를 바양하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해.
그 땐 수줍음이 많아 옆에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다섯 발짝은 떨어진 곳에서 인사를 하였다니까.
지금 난 매우 바쁜데도 친구의 글에 손 잡혀 고향을 산책하고 있음에….
친구 덕분에 잊혀질 수밖에 없는 멋진 지명들이 지면에 영원히 살아남아
나와 함께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초등학교 동기동창 여일향(강 민 주)
|
첫댓글 시골의 정서와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단어들이 많아 더욱 더 고향 생각을 하게 되네요 ㅡㅡ
( 글도 잘 쓰셨지만 기억력도 참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고향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소싯적부터 자란 요람이기에
더욱 그리운 것이겠지요.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단어들도 이제는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긴 글 읽고 댓글 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