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 시 위로/백운복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시를 주제로 썼지만 시 대신에
수필이란 말을 넣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의사수필가라면 문학과 치유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쓴다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원본은 다소 산문으로서 어법에 틀린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훌륭하였기에 제 나름대로 많이 수정하여 올립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와 꼬리글을 바랍니다.
시 위로/백운복
<서정이라는 무한한 자유>
1.문학은 감동으로 말한다.
1)경이로움의 경험이다.
낯선 경험, 새로운 경험, 낯설게 하기,
동일한 대상이나 세계에 대하여 ‘아! 이럴 수가?’에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로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 낯설음의 경험이고 새로운 감동이다. 의미의 확대이기도 한다.
독자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이로움과 만나는 경우 감동은 오기 마련이다.
황당무계하거나 결코 있을 수 없는 당혹스러움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면, 생소함으로 인한 충격만 있을 뿐 결코 감동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결국 새롭고 낯섦 속에 웅크리고 있는 주제의식, 그것이 실체이다. 곧 감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해 냈느냐가 문제다.
2)감동의 실체는 재인식의 경험이다.
문학에서 언어 형상화란 한 막연한 과정에서 명료한 상태로 옮아가는 과정이다. 형체가 없는 것에서 형체가 있도록 하는 과정이요, 혼돈에서 질서로 정돈되는 과정이다. 독자가 현실이라고 하는 막연하고 잡다한 혼돈 속에서 그저 어슴푸레하고 지나쳐가는 어떤 것들을 작품으로 구체화시켜,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문학은 인생에 대한 막연한 생각,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막연한 인식들, 정치 사회 문제나 인식들, 여성 문제 등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실감으로 감동을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막연히 스쳐 지나치거나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인생과 사회의 많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재인식시켜 ‘아,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문학은 결코 관념적으로 설명하거나 직접 가르쳐서는 안 된다. 단지 어떤 정서나 장면을 제시해 보여줄 뿐이다. 문학이 독자에게 교육기능이 있다하여 철학, 과학 등의 학문에서처럼 관념적인 지식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문학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감동을 주는 가운데 간접적으로 인생의 진리를 가르친다.
지식은 축적되지만 감동은 항상 새로운 흥분과 생동력으로 우리를 일깨우며, 공감의 체험을 통해 삶을 새롭게 느끼도록 해준다. 문학은 7평 아파트의 불편함이나 70평 아파트의 편리함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나 행복과 진실의 무게와 가치를 읽어내려고 한다.
바늘구멍으로 우주를 보아내고 앙상한 가을 잎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발견하며, 아가의 숨소리에서 신의 소리와 인간 원형의 음악을 감지해 내는 그 위대한 보아내기와 새로운 이름짓기-작가들은 이 일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기에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문학의 제재가 된다. 문학의 세계는 무엇을 그렸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떠한 인식과 세계관으로 보았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과 대상이 되는 세계 사이에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이름 없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미 있어온 현실이나 대상에 낯설고 의미심장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곧 문학의 세계를 형상하는 일이다. 작가는 이 개성적 매듭짓기를 위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성실성으로 일상에 치밀하게 몰입하고 새롭게 보아내기에 혼신을 다해야 한다.
우주의 모든 대상과 현실은 항상 무한한 형태로 열려 있으며, 작가에 의해 새롭게 매듭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학의 세계는 새로운 매듭짓기와 그것의 구체화이며, 독자는 그 매듭을 풀면서 경이로운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진정한 문학이란 인간이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심오한 사상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 해답은 영원히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 질문하기와 해답 찾기를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에 문학의 참된 가치가 있다.
2. 시는 서정문학이다.
시는 抒情, 즉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그려내는 문학이다. 문학작품은 만드는 게 아니고 창작하는 것이다. 예술은 창작하는 것이지 만든 것이 아니다. 만드는 것은 정해진 틀에 맞추어 생산하는 것이라면, 창작이란 이 세상에 하나 뿐인 것을 창출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품은 창조자의 정신이 생명력을 지니고 영원히 살아 움틀 거린다.
시는 모든 문학 중에서도 가장 私的이고 개인적인 양식이다. 서정이란 말 그대로 시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그리는 1인칭 문학이다. 그린다는 것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이나 정서를,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 육화시켜 보여주는 시의 가장 근본적인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肉化란 대상을 내 감정과 정서로 그려내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롭고 독창적인 이미지 조형은 시에서 그만큼 중요한 항목이다. 한 개인의 주관적인 정서가 한 편의 시작품 속에 이미지를 통해 응축되어 있을 때, 독자는 신비스러운 교감을 통해 이른바 공감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사적인 개인감정이 난해하고 애매모호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라는 양식을 통해 질서화 되어야만 인정될 수 있는 개성이다. 이러한 시의 양식적 특성을 빌미로 근자에는 해체시라든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미명 아래 난해성의 극단과 作爲的인 언어놀이를 마치 새로운 경향의 전위적 기법인 듯이 독자를 오도하는 시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현실을 바라다보고 인식하는 관점은 실로 다양하다. ‘나무 위에 앉은 두 마리 새’라는 대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실로 다양할 수 있다. ‘나무 위의 새가 사랑하고 있다.’고 할 때, 이는 화자의 주관적 표현이고, 나아가 그 대상은 화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즉 객관적상관물에 불과하다. 사랑한다고 했다거나, 슬피 운다고 했다면 화자 자신의 정서를 드러낸 표현들이다. 그 대상은 화자가 자기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 話者, 즉 시인의 개인적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이다. 시인이 선택하는 언어기호나 제재, 운율이나 이미지 등 시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결국 그 대상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나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주제를 담는 가장 적절한 그릇으로 선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누가 시를 쓰고 읽는가?
숨죽여 살금살금/ 나무에 다가가서// 한 손을 쭈욱 뻗어/잽싸게 덮쳤는데//
손 안에 남는 건/매암매암 울음뿐
웃으며 수줍게 그냥 하는 말//바다에 나가면 친정어머니 같이 항상 주시잖아요//
찰진 파문을 일으키는 구릿빛 민낯//바다가 그녀의 말 따라 그냥 쉽게 웃는다.
우주의 모든 대상과 현실은 항상 무한한 형태로 열려 있으며, 작가에 의해 새롭게 매듭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학의 세계는 곧 이 새로운 매듭짓기와 그것의 구체화(형상화)이고, 독자는 그 매듭을 나름대로 풀어가면서 경이로운 감동을 체험한다.
감정과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어떤 대상과 현실에서 서정과 감동의 움직임을 체험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를 쓰고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 된다. 시에게 봉사하기 위해 시를 써야 한다. 시 독자들도 시에 대한 식견이나 독서량을 자랑하기보다는 순수하고 적극적인 독서를 통해 감동에 젖어드는 참된 독자여야 한다.
진정한 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굴해내는 심오한 사상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 해답을 영원히 찾지 못할지라도 그 질문하기와 해답 찾기를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에 문학의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장 진지하고 성실하게 되묻는 질문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