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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Harrer (1912-2006))
하인리히 하러는 오스트리아의 등산가, 스포츠맨, 지리학자, 슈츠스태펠의 오베르샤르푸러(나치당 준군사적 계급, 일반적으로 SS로 약칭)이자 작가이다. 그는 알프스의 "마지막 문제"인 아이거 북벽의 첫 번째 등반을 만든 네 명의 등반 팀의 일원이었다. 그는 <티벳에서 7년>(1952)과 <화이트 스파이더> (1959)라는 책을 썼다.
초기 생애
하러는 191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헝텐베르크에서 카린티아 주의 장크트 베이트 안 데어 글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제프 하러는 우편 노동자였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하러는 그라츠의 칼 프란젠스(Karl-Franzens) 대학에서 지리학과 스포츠를 공부했다. 그는 전통적인 학생 법인 ATV Graz의 회원이되었다.
1935년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열린 1936년 동계 올림픽에서 알파인 스키 대회에 참가 예정이었으나 오스트리아 알파인 스키팀은 스키 강사의 전문가로서의 지위에 관한 갈등으로 인해 행사를 보이콧했다. 그 결과, 하러는 참여하지 않았다. 1937년 젤암제(Zell am See)에서 열린 세계 학생선수권 대회 활강 부분에서 우승했다.
아이거 북벽
등산은 하러의 진정한 열정이었다. 등반의 특별한 위업을 통하여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러와 친구 인 프리츠 카스파렉은 스위스에서 아이거(3,967m) 북벽을 처음으로 등반하기로 결심했다. 하얀 거미로 알려진 얼음장이 있는 수직 벽은 여러 생명을 앗아갔기 때문에 베른 당국은 등반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1938년 7월 대학 시험을 치른 후, 해러와 카스파렉은 아이거 기슭에 있는 클라인 셰이데그로 가서 등반에 나섰다. 산의 중간쯤에서 두 사람은 독일에서 온 루트비히 뵈르그와 안데를 헤크마이어라는 다른 팀을 만났습니다. 네 사람은 나머지 등반을 단일 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경험 많은 헤크마이어가 선두를 맡았다.
등반하는 동안 네 사람은 눈사태와 바위 폭포로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그들은 윗면의 화이트 스파이더를 올라갈 때 눈사태에 휩싸였지만 모두 얼굴에서 휩쓸려 나가는 것에 저항 할 수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1938년 7월 24일 오후 4시에 정상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
아이거 북벽의 이 첫 등반은 전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으며, 1959년에 출판된 하러의 책 <화이트 스파이더>에 언급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등산 역사의 영광스러운 순간이자 큰 센세이션"이라고 말했다.
나치 참여
1996년 ORF 편집자이자 영화 제작자인 제랄드 레너(Gerald Lehner)는 1933년 10월 슈투르마브테이룽( Sturmabteilung, SA)에 합류한 하러의 회원 카드를 미국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했다. 1938년 3월 앙슐루스 이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그는 4월 1일 슈츠스태펠(SS)에 합류했다. 그는 Oberscharführer(상사)의 계급을 맡았고, 5월 1일에 나치당의 일원이되었다.
아이거 북벽에 오른 후 네 명의 등반가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에게 받아 들여지고 사진을 찍었다. 하러r는 나중에 저명한 탐험가이자 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의 딸 샬롯 베게너와 결혼 한 날에 SS 유니폼을 한 번만 입었다고 말했다.
1952년에 유럽으로 돌아온 후 하러는 전쟁 전 범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나중에 사이먼 비젠탈이 이를 지지했다. 회고록 <Beyond Seven Years in Tibet>에서 하러는 나치당에 연루된 것이 아직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때 저지른 실수라고 말했다.
인도에서의 인턴
1939년, 해러는 피터 아우프슈나이터가 이끄는 4명의 원정대에 합류하여 낭가 파르밧의 디아미르 벽으로 향했다. 벽 등반이 실행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그들은 8월 말에 인도 카라치에 있었고, 화물선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 가기를 기다렸다. 배는 오래 지연되자, 하러, 루드비히, 한스 로벤호퍼는 페르시아(이란)에 가려고 했지만, 카라치 북서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에 의해 적과 연루된 사람으로 체포되어 아우프슈나이터가 머물고 있는 카라치로 호송되었다.
이틀 후, 전쟁이 선포되었고, 1939년 9월 3일 모든 사람들이 봄베이 근처의 아흐메드나가르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자치령인 고아(Goa)로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1,000 명의 다른 수용인들과 함께 데라둔으로 옮겨 졌을 때, 그들은 티베트가 더 유망하다는 것을 알았고, 최종 목표는 버마나 중국의 일본 전선이었다.
아우프슈나이터와 하러는 탈출하여 마침내 성공하기 전에 여러 번 다시 체포되었다. 1944년 4월 29일, 해러와 롤프 마게너와 하인스 폰 하브(영국 장교로 위장), 아우프슈나이터, 잘츠버거 브루노 트레이펠(일명 트레이플), 베를린 출신의 한스 콥과 새틀러(인도 원주민 노동자로 위장)를 포함한 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이 캠프를 탈출했다. 마그너와 폰 하브는 기차를 타고 캘커타로 갔고 거기에서 버마의 일본군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은 란도우(Landour)를 통해 가장 가까운 국경으로 향했다. 새틀러가 5월 10일에 포기 한 후, 나머지 4명은 1944년 5월 17일 티벳에 들어가서 창촉라(5,896 m)를 넘어 하러와 콥, 아우프슈나이터 및 트레킹펠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6월 17일, 트레이펠은 지쳐서 말을 사서 저지대로 돌아갔다. 몇 달 후, 나머지 세 명이 여전히 티베트에 대한 비자가 없었을 때, 콥 또한 포기하고 네팔로 떠났습니다 (며칠 안에 영국 당국에 넘겨졌다).
티벳에서 7년
아우프슈나이터와 하러는 티베트 언어에 대한 이전의 지식에 도움을 받아 티베트의 수도 라사로 진행하여 1946년 1월 15일(나치 독일이 항복한지 6개월 후) 서부 티베트, 남서부 자이롱 카운티 및 북부 창탕을 횡단했다.
1948년 하러는 티베트 정부의 급여 공무원이 되어 외국 뉴스를 번역하고 법원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하러는 포탈라 궁전에 소환되었을 때 달라이 라마 14세를 처음 만났고 달라이 라마는 하러가 티베트에 소개한 아이스 스케이팅에 관한 영화를 만들도록 요청했다.
하러는 지프 엔진에서 프로젝터를 쏘아 그를 위해 영화관을 만들었고 곧 영어, 지리학 및 일부 과학 분야의 달라이 라마의 교사가되었다. 하러는 그의 학생이 서구 세계의 지식을 얼마나 빨리 흡수했는지에 놀랐다. 그들은 같은 생일을 보냈고 하러의 남은 생애를 지속시킬 두 사람 사이에 강한 우정이 생겼다.
1952년, 하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티벳에서의 7년(1952년)>과 <로스트 라사(Lost Lhasa, 1953)>라는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했다. <티벳에서의 7년>은 53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1954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300만 부를 팔았다. 이 책은 같은 제목의 두 편의 영화의 기초가되었으며, 1956년에 첫 번째와 1997년에 두 번째로 브래드 피트가 하러의 역할로 출연했다.
<티베트에서 7년>에서 하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어디에서 살든 나는 티벳이 그리울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마다 티벳이 그리울 것입니다. 맑고 차가운 달빛 아래 라싸 상공을 날아가는 기러기와 학의 울음소리와 날개짓하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아요. 내 진심 어린 소망은 내 이야기가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살고자 하나 의지가 무관심한 세상으로부터 거의 동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이해를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후기 모험
티베트에서 돌아온 후 하러는 오스트리아 키츠뷔헬에 정착했고, 나중에는 리히텐슈타인에 정착했다. 그는 중앙 아프리카의 알래스카, 안데스 산맥 및 달의 산에 대한 등산 탐험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 지학에 참여했다. 1953 년 그는 아마존 강의 근원을 탐험하고 오산게이트(Ausangate, 6384m)을 초등 했다. 1954년, 독일계 미국인 프레드 베키와 함께 해러는 알래스카에서 데보라 산(3,761 m, 12,339 ft), 헌터 산(4,442 m, 14,573 ft), 드럼 산(3661 m)을 초등 했다. 1957년, 그는 벨기에의 전 왕 레오폴드 3세와 함께 콩고 강을 탐험했다.
1962년 2월, 그는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일곱 최고봉 하나 인도네시아 파푸아의 카르스텐츠 피라미드(Carstensz Pyramid, 4,884m, 나중에 Puncak Jaya)의 첫 등반을 한 네 명의 등반가 팀의 리더였다. Ya-Li-Me에서 신석기 시대의 석조 도끼 채석장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선구적인 탐험과 그의 선구적인 탐험은 석기 시대에서 온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1966년, 그는 브라질의 마토 그로소(Mato Grosso)의 신구 인디언들을 만났다. 1972년, 하러는 보르네오 섬을 건넜다. 그는 또한 네팔, 프랑스령 기아나, 그린란드, 수단, 인도, 라다크, 안다만 제도, 우간다, 케냐, 부탄으로 원정을 떠났다.
하러는 그의 모험에 관한 2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일부는 티베트 전통 문화의 최고의 기록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진을 포함한다. 또한 1958년과 1970년에 오스트리아 국가 챔피언십에서 우승 한 훌륭한 골퍼였다.
개인생활
1938년 12월, 해러는 독일의 극지 연구자이자 대륙 표류 이론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베게너의 딸인 롯데 베게너(1920~1989)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10살 때 그린란드 원정대에서 사망했다. 그들의 아들 피터 하러는 하러가 인도에서 영국군에 의해 수감된 지 석 달 후인 1939년 12월에 태어났다. 그들의 결혼은 그가 인도에 있는 동안인 1943년에 끝났다. 1953년 그는 마가레타 트룩사(1958년 이혼)와 결혼했고, 1962년에는 카타리나(카리나) 하르하우스(1922~2014)와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아내로 남았다.
마지막 해
1980년대 초 그는 티벳을 다시 방문했고, 티벳에서 칠년 후속작을 썼는데, 제목은 <티벳으로 돌아가기: 중국 점령 후 티벳(Return to Tibet: Tibet After the Chinese Occupation.)>이었다. 그의 속편에 대한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미국의 책 평론잡지)는 말했다.
"1982년 그는 '중국 무대의 해동' 기간 동안 티벳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고, 그는 침략자들에 의해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강제 수용소, 강제 노동, 정치적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나라의 종교는 여전히 강했고, 중국에 대한 무력 저항과 무너질 수 없는 민족적 의지가 계속되었다."
그는 2007년 <티벳에서 7년을 넘어( Beyond Seven Years in Tibet)>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영어로 출판 했다. 그는 약 40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으며 오스트리아 후텐베르크에 하인리히 해레르 박물관(Heinrich Harrer Museum)을 설립하여 티베트에 헌정했다. 2002년 10월, 달라이 라마는 티벳의 상황을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 위한 노력으로 하러에게 티베트의 진리의 빛 상을 수여했다. 하러는 2006년 1월 7일 오스트리아 프리삭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명예와 상
1978: 비엔나시 금메달 명예 훈장
1980: 그라츠시 금메달
1982: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명예의 십자가, 1등석[15]
1982: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훈장의 그랜드 메리트 크로스
1985: 골든 훔볼트 메달 (독일)[16]
2002: Light of Truth Award (티벳을 위한 국제 캠페인)
출판물
티벳에서의 7년 (1952)
로스트 라사 (1953)
《화이트 스파이더》 아이거 등정에 대한 고전적 이야기 (1959)
티벳은 나의 나라입니다. (1961) - 달라이 라마의 형인 투텐 지그메 노부의 자서전 - 하러에게 말한 대로
나는 석기 시대에서 온다 (1965)
라다크: 히말라야 뒤에 있는 신들과 필사자들. 1980년 (1980년 )
티벳으로 돌아가기 (1985)
티벳으로 돌아가기: 중국 점령 후 티벳 (1998)
부탄이 생각난다 (2005)
티벳에서의 7년을 너머 : 내 인생 전, 도중, 그리고 이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