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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9. 쿠타 갈리 - 디아미르 베이스캠프 / 7.5km
Kuta Gali (3865m) - Diamir Base Camp (4224m)
7. 26. (화)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를 향하여
오늘은 여유가 있는 일정이라 아침을 8시에 먹었다. 목적지 디아미르 베이스캠프까지 350m 정도만 올리면 된다. 길도 좋아 2~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안심이다. 어제 코스는 정말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구름이 조금 있지만 날씨는 화창하다. 아침 일찍부터 동네 꼬마들이 와 있다.
아침 식사 후 주방장 유수프가 왼손 검지를 칼에 배었다고 해서 서란님이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 막 출발 하기 전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약을 구하러 왔다. 에싼의 통역에 의하면 항상 어지럽다고 한다. 들은 풍월로 귓속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이석증이 아닐까 짐작을 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영역이라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원정대라면 주치의가 따라 오는 경우가 있으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 할아버지에게 혹시 플라시보 효과로 증상이 완화되기를 바라며 써니님이 가지고 온 비타민 C 며칠 분을 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이런 첩첩산골에서 병이 나면 문제가 커진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려면 2일이 걸린다. 환자일 경우는 아예 계산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찻길이 있는 힐랄라 다리(우리의 트레킹이 끝나는 곳)의 고도가 1570m다. 이곳이 3865m니 무려 2300m를 낮추어야 하는데 그곳까지 내려가는 길 또한 대부분 험한 절벽길이다. 몸이 불편한 환자가 걸을 수도 당나귀를 타고 갈 수도 없다.
파키스탄은 히말라야 등반사고 시 군대가 산악구조를 맡고 있다. 또 군대에서 수익사업으로 발토르 빙하, 콩코르디아, K2 베이스캠프를 다녀오는 헬리콥터 에어사파리를 운용중인데 3인 1시간 이용료가 4000달러라고 하니 이곳은 그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산골 주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시 40분 출발. 길이 넓어 좋다. 바로 앞으로 웅장한 낭가 파르밧 디아르벽이 다가온다. 전에 에싼은 낭가 파르밧 최고의 전망은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라고 했다. 루팔 벽과 페어리 메도우에서 본 낭가 파르밧 모습이 본 후 과연 이보다 더 멋진 풍광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여기와서 보니 과연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천천히 올라 두 시간 만인 10시 45분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길이 좋으니 포터들과 당나귀들이 지고 온 짐도 다 도착해 있다.
베이스캠프에 주로 원정대들이 이용하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는 돔형 프레임에 외장막이 덮혀 식당이 되었다. 차 한잔 마시고 모두 부지런히 빨래를 한다. 이번 트레킹에서 하는 마지막 빨래다. 갑자기 텐트촌이 빨래촌으로 바뀌었다. 날이 따뜻해 잘 마르고 있다. 내 뽀글이 자켓도 거의 다 말라간다.
오랜만에 주먹밥이 아닌 주방에서 만든 점심을 먹으니 즐겁다. 그동안 마셨던, 대표님이 가져온 원두 가루커피가 떨어져 이제부터는 내가 가지고 온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다. 바리스타는 여전히 대표님.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점심 때부터 몇몇 분들이 힘들어 한다. 알고 보니 나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작가님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텐트로 들어갔다. 써니님은 지금까지 50년 이상 살면서 복용했던 타이레놀보다 이번 트레킹에서 복용한 타이레놀이 더 많다고 한다. 그동안 말을 안했을 뿐 모두들 이런저런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점심 먹고 잠시 텐트로 들어가 쉬었다. 텐트 안이 따끈따끈하다. 뒷창을 열고 시원한 바람과 낭가 파르밧의 넓은 장벽을 맞이한다. 모처럼 음악을 들으며 설산을 즐겼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가 커피 한 잔 뽑아 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겼다. 바위님과 대표님은 이미 나와 있다. 다른 분들은 텐트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정말 이런 풍광이 없다. 네팔 히말라야에서 원정대 베이스캠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광이다. 네팔에서는 베이스캠프를 잠깐 방문할 수는 있으나 캠프를 설치할 일은 없다. 파키스탄은 원정대나 트레킹팀이나 같은 베이스캠프에서 캠핑을 하니 이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파키스탄 트레킹의 장점이자 특색이며, 그만큼 분투도 요구한다.
스태프들에게 선물을
스태프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트레킹을 할 때면 항상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주로 양말이지만 여분의 등산 옷 중 몇 개 가져와 가이드와 포터들에게 준다. 2010년 안나푸르나 북면 트레킹 때는 동참한 보살님들이 어린이 양말, 스카프, 샘플화장품을 가져와 포터들에게 나누어 주니 모처럼 아이들과 아내에게 생색을 낼 선물이 생긴 포터들이 아주 좋아했다.
에싼에게는 낭창낭창한 여름 트레이닝 긴바지를 주었다. 몇 년 전 산 것으로 내게 커서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에싼의 키가 크니 잘 맞을 것같다. 주방장 유수프를 불러 다친 손가락에 새로 후시딘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나중에 저녁식사 준비할 때 손가락을 보호하라고 고무장갑을 주었다). 그리고 어제 미끄러지는 나를 잘 잡아준 공로에 대한 답례 겸 팁으로 50유로를 주었다.
보조가이드 아쉬라프에게는 오전에 같이 올라올 때 여분의 레이밴 선글라스를 주었다. 트레킹 때마다 가지고 다닌지 오래 되었지만 안경착용자인 나는 줄곳 클립형 선글라스를 안경에 부착하여 쓰기 때문에 그저 여분의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보다 더 자주 히말라야를 다니는 친구가 더 필요하다. 나에게는 클립형 선글라스가 여분으로 필요하다.
마제노 패스를 넘기 위해 구입한 짚신형 아이젠은 포터대장 수쿠르에게 주었다. 다음 트레킹은 적어도 1년 후일 것이 또 그 코스에 반드시 아이젠이 필요하다는 법도 없다. 괜히 무겁게 가지고 돌아갈 이유가 없다. 부주방장 만주르에게는 가벼운 방수바지와 캡모자를 주었다. 그 방수바지는 비 오는 날 논에 물길 터기 위해 갈 때 잠시 입기는 좋다. 그러나 히말라야 트레킹 때는 몸에서 발생하는 습기로 인해 생기는 결로 때문에 운행 중에 불쾌감이 들어 오래 입을 수가 없다.
가장 좋은 장비는 고어텍스 오버트라우저다. 보통 상의는 고어자켓을 다 가지고 있지만 바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꼭 히말라야가 아니더라도 국내 산행에서도 필요한 비상용 장비다. 다음 트레킹 때는 나도 하나 장만해 가지고 갈 생각. 키친보이 자히드에게는 샤오미 보조배터리(1만mAh)를 주었다. 이번에 두 개 구입해 가져온 것 중 하나다. 이 역시 무게를 줄이려는 뜻이 다분했다.
산악인의 애환이 서린 디아미르 베이스캠프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는 산악인들의 슬픔과 환희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1953년 오스트리아의 등반가 헤르반 불이 페어리 메도우에서 보이는 라키오트벽을 통해 낭가 파르밧을 초등했다. 두 번째 등정은 1962년 독일인 킨쇼퍼가 이곳 디아미르벽을 통해 정상에 올랐다. 그 후 킨쇼퍼 루트는 낭가 파르밧 등정의 표준루트가 되었다.
다른 8천미터 급 산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등반가들이 낭가 파르밧 등정에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다.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는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 루팔벽을 통해 정상에 올랐다가 동생은 하산 중 사망하고 메스너 혼자 이곳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2005년 우리나라의 김창호 이현조 두 산악인은 메스너 이후 35년 만에 두 번째로 루팔벽을 통해 등정에 성공하고 그들 역시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사면 저쪽 편에 불빛이 보인다. 텐트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2시간을 갔는데 텐트는 다가서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이는 것일까. 그 불빛은 텐트가 아니라 정상으로 가는 등반가들의 랜턴 불빛이었다는 것을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우리도 환각에 시달렸다.
운행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현조는 앉아 다리를 떨며 졸고 나는 서서 1시간을 졸았다. 너무나 춥다. 드디어 날이 밝아온다. 현조는 이날 오후 4시에 7개팀에 머물고 있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떨어지면서 어깨를 다친 나는 C2에 하루를 머무르고, 16일 오전 10시40분에 도착한다. 다음날 산을 돌아온 대장님과 형근이와 재회했다.
그곳 베이스캠프에서 우리를 미친 놈들(crazy climbers), 또는 제2의 메스너라고 불렀고, 귀빈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디아미르측에서 오른 팀이 우리가 정상에 두고 온 로프를 확인해 주었다. 가지고 온 알루미늄 막대는 78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디아미르벽을 신루트로 오르고 정상에 두고 온 캡슐로 확인됐다." (월간산 [기획특집] 2005 낭가파르밧 루팔벽)
1989년 전주대산악부의 김광호 대원, 1990년 광주팀의 정성백 대원이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 1992년 경남 합동대의 박희택·송재득 대원이 디아미르벽 루트를 통해 올랐다. 그후 엄홍길을 비롯한 많은 한국 산악인이 이 봉을 올랐다.
2009년 7월 여성 산악인 고미영은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서 시작하여 정상에 오른 후 하산 중 실종하여 사망했다. 히말라야 14좌 중 12번 째 등정이었다. 당시 원정대를 이끌었던 김재수 대장은 그 상황에 대하여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7월10일 오후 7시11분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습니다. 강한 바람 때문에 하산이 늦어졌고 정상과 캠프4 사이에서 고소 포터가 심한 고소증으로 전혀 거동을 할 수 없어서 전 대원이 합심해 고소 포터를 캠프4까지 데려다주느라 하산이 더 늦어졌습니다.
캠프3에서 캠프2까지는 전 루트가 로프로 연결돼 있는데 캠프2의 30m 위쪽 완경사 지점에 로프가 묻혀 있었습니다. 먼저 내려오면서 그 로프를 드러내려고 했지만 3m만 드러났고 나머지 10m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로프 없이도 내려왔기 때문에 저는 먼저 내려와 뒷사람을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미영씨가 그 지점을 지나다 신발 밑의 아이젠 부분이 옷이나 다른 쪽 신발의 아이젠 끝에 걸려서 추락한 것 같습니다.” (신동아 2009년 9월 11일)
2013년 6월 22일 밤 이곳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16명의 무장 세력이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를 습격하여 10명의 외국인 등반가와 1명의 현지 관광 가이드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등반가들은 우크라이나, 중국,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네팔 등 다양한 국가에서 왔다. 유영국님 팀은 이런 상황에서도 K2 발토르 트레킹을 결행했으니 보통 강심장을 가진 분들이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지
따뜻한 바람이 불어 반팔에 7부 바지를 입고 낭가 파르밧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얼마만에 즐기는 망중한인가! 그러나 설산의 멋진 풍광을 즐기면서도 이 산을 오르기 위해 수많은 산악인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누가 그들을 이곳으로 불렀을까? 당연히 히말라야다. 히말라야는 그런 마성이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이 고생인줄 뻔히 알지만 틈만나면 다음 코스를 찾아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까지 야크존에 올린(그리고 올라 온) 많은 트레킹 후기 중 내게 가장 인상깊은 후기는 2007년 마나슬루 트레킹을 같이 했던 혜명화님의 후기다. 나는 주로 후행자를 위한 정보 제공을 위해 참고자료를 많이 첨부하다 보니 문장이 무미건조한 경향이 있다. 혜명화님은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답게 글이 조근조근 깊은 사색에 잠긴 내용으로 울림이 있다. 트레킹 경험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장점이다.
그 후기에 나오는 내용 중 "트레킹을 하는 동안엔 무슨 생각을 하셔요?" 라는 질문에 "아무 생각이 없지."라고 한 무진행 보살님의 말씀은 그만큼 지난 트레킹이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무진행 보살님은 64세로 나와 함께 한 세 번째 트레킹이었고 3년 후 2010년 67세의 나이로 안나푸르나 북면 트레킹도 함께 했다(그럴진대 나는 많이 반성해야 한다).
‘아무 생각이 없지' 라는 말. 이번 트레킹에서 내가 그랬다. 험한 고개를 넘을 때, 그리고 가파른 급경사를 내려올 때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념무상. 과거도 미래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에만 온 신경이 쓰였다. 빨리 오늘의 이 힘든 운행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이제 어려었던 여정이 끝나고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히말라야가 눈에 들어온다. 몸과 마음은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아프면 트레킹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려면 출발 전 부지런히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는 말은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아침 식사 전 차 한 잔. 무타트 패스 넘은 후부터 사용하고 있는 핫포트. 원래는 양치용 물을 담아두는 용도다.
아침 식사 후 출발 준비 중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머리가 어지럽다고 치료약을 좀 달라고 한다.
약도 없지만 의사가 아니니 약을 줄 수는 없다. 그저 비타민 C를 드시고 낫기를 바랄뿐이다.
8시 40분 출발. 오늘은 여유 있는 일정이다. (클릭-큰사진)
웅장한 디아미르 대장벽이 다가왔다. (클릭-큰사진)
설산을 바라보며 넓은 개활지를 걸으니 천하가 태평하다. (클릭-큰사진)
9시 45분 휴식.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한가로운 소풍길
10시 10분 언덕을 돌아가는 약간 어려운 구간
언덕을 돌자 거대한 낭가 파르밧 디아미르 빙하가 나타났다. (클릭-큰사진)
디아미르 베이스캠프가 보인다.
10시 45분 베이스캠프 도착. 텐트 설치 중
처음으로 낭가 파르밧 주봉을 보았다. 정상(8125m)은 오른편이다.
각자 텐트에 짐을 넣고
위쪽에 베이스캠프 관리소가 있다.
주방텐트 설치 완료. 원정대용 원형돔 프레임이 고정 설치되어 있다.
프레임에 외장막을 쳐 식당텐트로 사용한다.
차 한 잔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관리소에 있는 포트를 빌렸다.
내가 가지고온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다.
날이 좋아 젖은 옷가지를 널고
빨래를 했다. 페어리 메도우 이후 5일 만이다.
텐트촌이 빨래촌이 되었다. 두 대의 태양광 보조배터리(바위님과 작가님 것)도 펼쳤다.
텐트 안에서 느긋하게 쉬는 중. 간이 태양광 보조배터리를 텐트 지퍼에 걸었다. 용량이 적지만 휴대성이 좋아 그런대로 쓸만하다.
낭가 파르밧 서편 최고봉 마제노 피크(7120m)가 있는 마제노벽
파노라마 (클릭-큰사진)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
아래로 흐르는 거대한 디아미르 빙하
위쪽에 추모탑이 있다.
추모패. 위 두 사람은 2017년 이곳에서 눈사태로 숨진 제라인(스페인)과 갈반(아르헨티나), 세 번 째 사람은 2018년 숨진 토마스 메키에비츠(폴란드), 네 번째 사람은 2019년 슴진 바라드와 나르디(이탈리아), 그리고 제일 아래는 파키스탄의 산악 영웅 알리 사드파라. 사드파라는 히말라야 8천 미터 8좌 등정에 성공했으나 2021년 K2 등정 중 숨졌다. 사드파라는 낭가 파르밧을 동계 등반을 포함해 모든 계절에 걸쳐 4번 등정한 전설적인 파키스탄 등반가다.
2007년 7월 고미영 대장의 추락사 후 이곳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대원들이 추모탑을 쌓고 추모를 하고 있는 사진인데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다. 현재 베이스캠프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월간 산 사진)
추모탑에서 내려다 본 베이스캠프
망중한 1 (by 바위님)
망중한 2
망중한 3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의 오후 (by 바위님)
디아미르벽의 일몰
마제노릿지 방향
디아미르 베이스캠프 도착 기념으로 만주르가 만들어 온 푸딩. 케이크가 좋은데 내 취향이 아니어서 맛만 조금 보았다.
현 위치 (4224m )
day 1.아는 고통은 견딜만 하다
버스에는 세르파인 밍마 세르파(40세)와 주방장 노르지 세르파(25), 주방요원 3명, 포터 14명이 타 고 있다. 가이드 타시 파상 구릉(40)까지 스태프들이 20명이고 우리팀 6명을 합치면 26명의 대부대다. 앞으로 18일 동안 우리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마나슬루를 한 바퀴 도는 트레킹을 할 것이다.(야크존. 2007 마나슬루 서키트 트레킹 Trek 1 中)
"트레킹을 하는 동안엔 무슨 생각을 하셔요?"
"아무 생각이 없지."
"정말이요?"
"그럴리가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 딸은 편한 여행을 하라고 성화야. 지금도 많이 걱정하겠지. 그래서 내가 말했어.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보다 힘든거 어딨겠니?"
트레킹이 시작되는 첫 아침,
침대위에 앉아서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보는 무진행 보살님의 뒷모습을 보고서 문득,
호퍼! 하고 떠올렸습니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라는 미국 화가가 떠오른 건, 지난 여름 그의 그림을 인터넷이나 책으로 이곳저곳에서 찾아보았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퍼 그림의 중심주제는 '외로움'이라고요. 그 아침, 아무도 외로워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떠나기 전에야 모두 어땠는지는 묻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무진행 보살님의 뒷모습에서 호퍼를 떠올린 건, 그냥 그의 그림 속에 호텔이 많이 등장하고, 제가 여름 내내 자주 그의 그림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지요.
연젠가 통증에 관한 다큐를 보다가, 통증으로 너무 힘든 사람에게 고추에서 추출한 매운 성분을 약품으로 만들어투여하는 처방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너무 지독하서 본래 갖고 있던 통증을 잊게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통증을 잊으려고 강한 통증을 주사한다는 것인데, 이 주사를 한 번 맞은 사람은 다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그 주사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픈 건데, 아무리 세게 아파도 잠시 잠깐의 통증인 줄을 알면 훨씬 견딜만한 것이 될까요? 그것이 약이라고 생각하면 견딜만 할까요? 가끔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트레킹이라는 말,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사전에서 찿아보았습니다. 영영사전에서 찿으니 '어딘가로 트레킹을 간다고 하는 것, 트레킹을 한다는 것은 힘든 땅을 거치서 긴 여행을 하는 것이다. 보통은 걸어서 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문으로는 '정글을 통과하는 트레킹'.
정글은 아니지만 그날 아침 우리는 힘든 땅을 거치고, 걸어야만 하는. 긴 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트레킹을 하는 트레커들은 '여행'이라는 말에 약간 고개를 흔듭니다.
좀더 '힘들고', 더 많이 '걷고' 아마 이런 수식어가 붙어야 트레커들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입니다.
트레킹 : 여행보다 강도가 쎈 일정으로 아주 잠깐 '아는 괴로움'을 즐기는 것,
그것을 무사히 통과한 힘으로,
길고 시시한 통증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거의 머리가 돌 지경인
인생의 자질구레한 고통을 견디게 됨.
트레킹의 목적을 이렇게 정리해본다면, 익숙한 트레커들은 고개를 흔들까요? 아우튼, 짐들을 다 챙기고 호텔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제서야 진지하게도 저는 트레킹이 무언지 진짜 궁금해졌습니다.
호텔로 삼툭라마가 와 주었고, 봉고차를 타고 우리는 장거리 버스 터미널에 가서 로컬버스로 갈아 탔습니다. 삼록라마는 우리에게 함께 트레킹에 참여할 스태프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키친팀, 텐트팀, 포터들. 일단은 웃으며 악수를 하고 로컬버스에 모두 탑승하였습니다.
첫댓글 디아미르 베이스 캠프에서의 망중한 풍경 사진은 잊을수 없는 인생샷!! 지기님께서 담아 주셨지요 감사합니다.
지금도 그때 낭가파르밧 오후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바위님이 찍어 주신 제 사진이 더 멋있습니다. 인생사진입니다.
이런 황홀한경치가 힘든 트레킹을 보상해주는거 같습니다 저는 캠프지에서시간이많이남아 갈수잇는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았습니다 거기도 거친빙하얼음과 안쪽산경치들이 너무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팀 중 낭가파르밧 정상에 제일 가까이 가신 분이군요. ^^
폰이 저장용량이작아 더 들어간 안쪽에서 동영상찍어도 저장이안되어서 안쪽 경치를 못보여드린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