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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 - 탁실라
Islamabad (507) - Taxila (549m)
BC 6세기 베다 시대의 인도 16대국. 간다라도 그 중 하나였으며 당시 붓다는 코살라와 말라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간다라 유적은 북쪽 스와트와 서쪽 페샤와르, 동쪽 탁실라를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 내에 집중되어 있다.
7. 31 (토)
간다라 (Gandhara)
간다라는 현재의 북서 파키스탄과 남동 아프가니스탄 일부 지역에 위치한 고대 지역으로, 북서 인도 지방의 외곽에 위치한다. '간다라'는 '향기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페샤와르 계곡과 스와트 계곡을 중심으로 포토하르 고원과 카불 강 유역에 위치했다. 그 주요 도시로는 '인간의 도시'란 뜻의 푸르샤푸라(페샤와르)와 탁샤실라(탁실라)다.
간다라는 리그베다(BC 1500년 - BC 1200년 경) 및 조로아스터교 아베스타에서 바에케라타(Vaēkərəta)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한 지구상에서 여섯 번째로 아름다운 장소다.
간다라는 베다 시대의 16대국 중 하나로 베다교와 후기 힌두교의 중심지였다. 간다라는 리그베다, 라마야나, 마하바라타를 비롯한 베다 서사시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또한 베다 시대 때 새로운 종교인 불교와 자이나교가 탄생했다.
간다라 왕국은 BC 6세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에 정복당하였고, BC 326년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후 인도-그리스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마우리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인도 그리스 및 이후의 인도 스키테스, 인도 파르티아, 쿠샨 왕조에서 그리스-불교와 간다라-불교의 중심지였고 중앙 아시아 및 동아시아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중심 지역이었다.
독특한 간다라 예술 양식으로 유명한 간다라는 고대 그리스 양식과 북방 여러 민족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페샤와르에 수도를 둔 쿠샨 제국 시기인 서기 1세기에서 5세기에 전성기를 이뤘다.
간다라는 인도, 중앙아시아 및 중동의 교차로에서 번성하여, 다양한 문명에서 문화적 영향을 받으며 무역로를 연결하였으며, 불교는 8~9세기에 이슬람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까지 번창했다가 6세기 백훈족(white Hunds)의 침공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간다라의 이름은 1001년의 마흐무드 가즈나비의 정복 이후 사라졌다.
쿠샨 제국 - 불상의 시작과 대승불교의 탄생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간다라 지방에 들어 온 BC 326년부터 이 지역은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 이 간다라에서 불상이 최초로 만들어지고(최근 이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대승불교가 흥기하게 된다.
알렉산더가 물러간 후에는 그리스계 민족이 아닌 인도계의 마우리아 왕조(BC 321-297)가 간다라를 지배한다. 마우리아 왕조는 고대 인도의 최초 통일국가를 건설한 왕조이다. 이 왕조의 제3대 왕이 유명한 아쇼카(Ashoka) 왕이다. 아소카 시대를 맞아 불교는 이때까지의 군소 종교의 틀을 벗고 비로소 활기차게 세계종교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간다라에 불교가 심어진 때도 아쇼카 왕 때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후 BC 2세기에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셀레쿠스가 세운 그리스계 민족 박트리아(Bactria) 왕조가 간다라 지방을 다스린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그리스인 왕 메난도로스(재위 BC155-130)다.
메난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사갈라(현 시알코트)에 수도를 정하여 펀잡 지방까지 다스렸다. 메난드로스는 불교로 신앙을 개종하고 불교를 적극 권장하였다. 『밀란다왕문경』은 메난도르스가 불교 승려인 나가세나 존자와 주고 받은 대화록이다.
메난드로스의 박트리아 이후 간다라는 인도-파르티아인이 지배하는데 이는 사카(Sakas)족으로서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다. 파르티아를 뒤이어 등장하는 것은 쿠샨(Kushan) 왕조다. 이 민족은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며 중국에서는 월씨족이라 불렀다.
카니시카 1세(127-150) 때의 쿠샨 제국의 영토와 중요한 국제 무역로. 간다라 지역의 탁실라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했다. 노란 선 안은 BC 6세기 부처님 제세 당시 주요 활동 지역.
쿠샨 왕조의 최 전성기는 제3대 카니슈카(재위 AD128-151) 왕 때이다. 카니슈카 왕은 간다라 지방을 본거지로 중앙아시아에서 중부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불교를 경시하다가 나중에 열정적인 신자가 되어 수도 프르샤풀라(현 페샤와르)에 대탑을 세우며 많은 불사를 하고 대승 불교를 일으켰다. 또한 카시미르에서의 제4 불전결집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제2의 아쇼카란 별명을 얻었다.
쿠샨왕조는 서기 1세기 중엽부터 3세기 중엽까지 건재 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간다라 불교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카니슈카 왕때에 더욱 놀라운 도약이 있었다. 이 시대 처음으로 첫째 불상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했다. 부처님이 인간의 모습,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고 감각적이며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모습으로 출현한 것은 카니슈카 왕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전까지 부처는 오직 보리수, 스투파, 법륜, 족적, 보좌 등 상징적으로만 표현 되었을 뿐이다.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것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 되었다.
대승불교의 출현도 이때 나타났다. 카니슈카 왕 때에 아슈바고사(마명), 파르시바(협존자)와 같은 대승불학의 대논사들이 있었고, 그 후에는 페샤와르 출신으로 아상가(무착, AD310-390년), 바수반두(세친), 붓드심파(사자각), 여의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면서 대승불교를 일으켰고 아비달마 유식학이 시작된 곳이다.
우리나라 백제 불교는 침류왕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東晋)에서 백제로 들어옴으로써 최초로 전래되었는데 이 마라난타가 바로 간다라 출신이었다.
탁실라(Taxila)
탁실라는 BC 5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페르시아, 그리스, 중앙아시아 문화를 접한 인더스 강을 따라 발전한 도시다. 아케메네스의 탁실라 지배는 BC 6세기부터 알렉산더 왕이 이 지역을 침략한 BC 326년까지 지속되었다. 알렉산더 이후 탁실라는 BC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야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마우리야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었던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쇼카(Ashoka, BC 268~232)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 주변 국을 모두 접수하여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왕이었다. 아쇼카는 칼링가 전쟁 이후에 무력을 포기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이후 그는 평화와 자비의 정신을 추구하며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쇼카는 불교의 전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그의 적극적인 불교 전파와 평화 정책은 인도뿐만 아니라 인접한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쇼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부터 탁실라는 위대한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아쇼카 왕에 의해 수 많은 승원과 탑이 조상되었고 유명한 아쇼카 석주(pillars of Ashoka)를 세웠다.
아소카 석주는 아소카 왕의 치세 기간 동안에 아쇼카의 칙령
이 새겨진 돌기둥으로 인도 대륙 전역, 아쇼카 자신의 순례 장소 등 많은 중요 유적지에 세워졌다. 석주 가운데 그의 칙령을 기록한 것까지 포함하여 20주 가량의 기둥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꼭대기의 동물 문양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 7주 남아 있다.
석주의 평균 높이는 12~15m이고 무게는 각각 최소 50톤에서 60톤까지 나가며, 때때로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운반되어 세워지기도 했다. 아쇼카 석주는 인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석조 조각 유물 중 하나로써 인도 역사의 중요한 건축물이자, 마우리야 양식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탁실라는 1~5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불교 기념물들이 탁실라 계곡 전체에 건립되어, 이 계곡 지역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같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을 위한 종교 중심지이자 목적지로 변모하였다.
이 당시 탁실라는 여러 언어로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무척 유명하였다. 탁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는 '탁샤실라'(뱀족의 왕자)로 불렸고, 팔리어(Pâli)로는 '타카실라'로 알려졌으며, 그리스어로는 'Taxila', 로마어로는 'Taxilla'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추차실로(Chu-ch’a-shi-lo)'라 불렸다.
마우리야 왕조는 아쇼카 사후 쇠퇴하고 이후 400년 동안 이 도시는 각각 박트리아 그리스인, 사카인, 파르티아인, 쿠샨인의 지배를 받았다. 5세기 초, 탁실라는 백훈족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타고 파괴되어 대부분의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활동이 중단되었다.
오늘 우리가 방문하는 탁실라는 고대 인도의 번성한 도시이자 대간다라 지역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탁실라는 세 개의 역사적인 무역로가 만나는 중요한 만남의 장소라는 이점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당시 탁실라는 불교의 중심지이자 배움의 중심지이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대도시였다.
탁실라는 아주 휘귀하고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이다. 2021년 현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유산 1211곳 중 선사시대나 기원전 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유적과 그 문명을 토대로 발전한 문명인 그리스, 이탈리아, 간다라 등 아주 적은 장소에서만 기원전 유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간다라는 동서 문화의 교차점이자,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했던 격전장이었다. 간다라 유적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이 바로 탁실라 지역이다. 산스크리트 탁샤실라의 ‘탁샤’는 ‘자르다’이고 ‘실라’는 ‘머리’, 즉 ‘머리를 자른 곳’이란 의미다.
4세기 후반 탁실라를 방문했던 동진의 법현 스님(337~422)은 그의 저서 〈불국기〉에서 “추차실로란 중국어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보살로 계실 때 여기서 머리를 남에게 베푸셨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7세기 초 탁실라를 방문했던 당나라 현장 스님(602~664)은 〈대당서역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탁샤실라국은 주위가 2천 여리이며 나라의 대도성은 주위 10여 리이다. 호족들이 겨루고 있고, 왕족은 후사가 끊겼다. 전에는 카피시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카 시미르국에 예속되어 있다. 땅이 기름져서 농업을 많이 한다. 용천과 강이 많고, 꽃과 과일이 풍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사람들은 몸이 날렵하고 용감하며 삼보를 마음으로 존경한다. 가람은 많으나 이미 황폐해져 승도는 적고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권덕주 옮김, 우리출판사)
신라의 혜초 스님(704~780)은 723년부터 727년까지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보통 중동으로 분류되는 페르시아(이란)까지 여행하였는데 해로로 시작하여 육로로 돌아오면서 탁실라를 경유했다.
1913년부터 10년 가까이 조사된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인도고고학의 모든 유적들은 이 세 스님들의 여행기에 근거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드러났다.
BC 4세기 알렉산더 침입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탁실라 도시 유적은 비르마운드와 시르캅, 그리고 시르수크다. 비르 마운드 유적은 알렉산더 침입 때부터 박트리아 말기까지의 도시 유적이고, 시르캅은 사카족과 파르티아가 세운 도성 유적이며 시르수크는 쿠샨왕조 당시의 도시 유적이다. 불교 유적으로는 쿠나라 대탑, 모라 모라두 승원, 자울리안 승원, 다르마라지카 대탑, 카라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탁실라를 향하여
아침 먹고 5명의 멤버가 택시 두 대를 빌려 탁실라 방문에 나섰다. 탁실라는 고대 간다라 지방의 중심지로 오래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어제 보았던 유튜브 화면을 캡쳐해 식당가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세 보여주고 가격을 흥정했다. 며칠 전 길동님이 다녀왔을 때와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영어를 잘 몰라 의사소통도 잘 안된다.
이리저리 찾는 중 마침 영어를 잘 하는 한 기사를 만났다. 그를 통해 다른 택시 하나를 더 불러 한 대당 6천 루피를 주기로 하고 출발. 우리 돈 36,000원으로 하루 종일 대절하니 괜찮은 가격이다. 이번 탁실라 방문은 내가 주선하여 모집한 터라 한 대값은 내가 내고 다른 한 대 렌트비는 네 분이 나누어 냈다. 추가로 입장료와 점심, 음료수 비용으로 1인당 3,000 루삐씩 공동경비로 냈다. 써니님이 총무로 수고해 주셨다.
이슬라마바드에서 탁실라 박물관까지는 35km이지만 현지 교통 사정으로 1시간 이상 걸린다. 우리는 늦게 출발하기도 했고 차량 수배로 시간을 지체하여 탁실라 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이미 12시 30분이 되었다. 일단 시작은 박물관부터다. 소박한 규모의 전시실이지만 탁실라 유적에서 출토된 귀중한 불상과 탑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불교학자들이나 문화재 관련 전문가들도 이곳 간다라 불상을 직접 보기 쉽지 않다. 학회가 아니면 일부러 오기엔 입출국이 까다롭고 테러의 위험도 항상 유의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원정대든 트레킹팀이든 이슬라마바드에 왔을 때는 절호의 찬스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전의 유적지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성주괴공, 생로병사의 존재와 시공에 대한 어떤 깊은 울림이 있다.
탁실라 박물관에서 중고등학교 학교 때 배웠던 간다라 불상을 직접 참배하니 특히 불제자로서 감개가 무량하다. 비록 5세기 초 북쪽에서 침략한 백훈족(White Hunds)에 의해 파괴되어 온전한 원형은 아니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1800여년 전 이 불상을 조성했던 신심있는 장인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식민지 통치 시대 때 알렉산더 커닝햄(1814~1893)이 중국 순례승들의 고대 순례길을 따라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1000년 이상 잊혀져 있던 불교유적이 재발견되었다. 20세기 초(1913~1934) 탁실라는 영국의 고고학자 존 마샬(1876-1958)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사되고 발굴되었다.
탁실라의 현대 고고학 지역은 전체가 1980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포함된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18개의 유적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지에는 3개의 주요 마을과 도시 주변 약 10km 반경에 흩어져 있는 많은 작은 유적이 포함된다. 간다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주로 불교 유물) 현재 라호르, 페샤와르 그리고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라호르 박물관이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간다라 불상 걸작품은 쿠샨 왕조(30년~375년) 시대 때 조성된 석가모니 고행상으로 현재 라호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그리스-불교 예술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불상 중 하나다.
이 불상은 굶주린 모습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하는 싯다르타를 표현한 것으로 세상의 쾌락을 포기한 후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모습이다. 몸통을 통과하는 정맥의 세부 사항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수척한 얼굴과 목의 실루엣은 최대한 정밀하게 깎았다. 이 고행상은 1894년 페샤와르의 해롤드 아서 딘 대령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상의 보존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2014년에 이 논란은 이 불상에 손상된 손가락이 등장하면서 다시 제기되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불상이 얼마 전 청소 중에 손상되었고 박물관 보존실 직원이 과학적 보존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일반 물건으로 수리했다고 했다.
라호르: 라호르 박물관의 보석인 '고행하는 부처' 조각상에는 청소 중 사고가 난 후 아마추어가 팔 중 하나를 '수리'하려는 시도의 결과인 새로운 흉터가 있다. 수요일에 한 예술 애호가이자 보존가가 본 지(DAWN)에 알려왔다.
불상은 오래전부터 오른손에 두 손가락이 없었고 왼팔에 금이 갔다. 몇 년 전 직원이 청소하는 도중 금이 벌어졌다. 나중 조사에서 박물관 연구소 직원들의 부주의한 수리 작업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가 확인되었다. 그들의 복원 노력은 손상을 더 일으키는 흔한 접착제를 사용함으로 실패했다. 박물관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 사건은 2012년 4월 4일 간다라 갤러리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이 조각상이 과학적 보존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물체와 같은 방식으로 박물관 연구소 직원들에 의해 '수리'되었다고 말한다. 간다라 갤러리 책임자인 무함마드 무지브는 수요일 본 지에 "보존 연구소 직원들이 간단한 에폭시로 균열을 채웠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수요일에 '고행하는 부처'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손상된 팔 부위를 수리하기 위해 바른 윤기나는 에폭시가 분명히 보였다. 무지브는 "나는 이 일에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작업은 연구소 직원들이 수행했습니다."고 말했다. 현재 라호르 박물관 관장인 수메라 사마드는 2012년 11월에 취임했으며,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다고 부인한다. "나는 (나의 임기 동안) 그 예술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박물관 전문가는 이 소중한 예술품에 가해진 피해에 충격을 받았다. "과학적으로 처리되어야 했습니다. 자격있는 보존학자를 통해 적절한 화학 물질을 사용해 복원해야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박물관에는 보존 실험실이 있지만 자격을 갖춘 화학자는 없다. 실험실은 보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직원이 운영하고 있다. 실험실은 고고학 석사 학위를 가진 연구원이 이끌고 있지만 그는 화학 보존처리자 자격이 없다. 현재 실험실 담당자는 이전에 갤러리 직원 및 당시 박물관 관장의 운전사로 일했다. 이전의 일꾼이 이제 실험실 보존처리자로 일한다.
박물관에는 2009년까지 자격을 갖춘 화학자 와삼 아메드가 있었다. 그는 2007년 정규직에서 은퇴했지만 다시 고용되었다. 2009년에 박물관에 합류한 또 다른 보존자인 하피즈 압둘 아짐은 3개월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박사 학위를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다.
고행하는 붓다상은 H.A. 딘 대령에 의해 시크리(페샤와르)에서 발굴되어 1894년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간다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DAWN 2014년 6월 26일
탁실라 박물관
“탁실라 박물관은 간다라 불교 미술에서 나온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석조 및 치장 벽토 조각 유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중요 유물은 비르 마운드, 시르캅 및 스르수크의 정착지와 같은 탁실라 밸리의 고고학 유적지와, 다르마라지카, 모라 모라두, 자울리안, 칼라완, 바말라, 토프키안, 바즈란의 불교 사리탑 및 승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박물관은 이러한 수많은 유적지 한가운데에 지었으며 간다라 문명의 풍부한 유물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탁실라 박물관에는 약 70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약 30,000점은 예비 컬렉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컬렉션에는 석재 및 치장 벽토 조각, 봉헌물, 스투파, 유물 상자, 비문, 구슬, 보석, 동전, 도구, 도구 및 기타 수많은 종교, 건축 및 가정 용품이 포함됩니다.
탁실라 박물관의 기원은 영국 왕실 아래 설립된 인도 고고학조사(ASI)의 고고학 및 역사적 탐구에 있습니다. 인도고고학조사는 인도 아대륙의 유산을 고고학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한 최초의 조직이었습니다. 이 조직 하에서 탁실라는 1913년부터 1934년까지 인도고고학 조사국장인 존 마샬 경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사되고 발굴되었습니다.
1918년 첼름스퍼드 총독의 지휘 하에 존 마셜 경은 이 귀중한 발견물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탁실라 박물관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박물관 건설은 존 마샬 경이 인도고고학조사에서 은퇴한 해인 192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탁실라 박물관 입구 안내문)
박물관 직원 아저씨의 안내도 받고 현지 관광객들과 사진도 찍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전시실은 단층으로 아주 소박하여 둘러보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훼손된 불상이나 부처님의 머리가 전시된 모습은 안타깝지만 모든 것은 유구한 역사의 산물이다. 이미 1500년 전 백훈족에 의해 시작되었고 근래에는 바미얀의 석불을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한 탈레반의 소행처럼 극우 무슬림들의 소행이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친절하고 호의적인데 극단적인 사람들이 문제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안내해준 박물관 직원들에게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팁을 주고 함께 박물관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물관 건물 주변은 아주 넓고 나무가 많이 있는 한가한 공원 분위기다. 먼지 많고 복잡한 바깥 길거리의 풍경과는 천지차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기사님의 안내로 근처 현지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유적지로 향했다.
탁실라 방문은 갑자기 결정한 일이라 준비가 많이 허술했다. 어떤 유적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탁실라가 가깝고 그곳 유적 중 해질녁 시르캅의 고요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말씀에 부랴부랴 찾아온 터다. 박물관은 문제가 없지만 유적이 어떤 의미를 지닌 유적이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전혀 모르고 그저 어제 인터넷에서 얻은 가벼운 정보만 가지고 왔다.
우리가 묵은 엔보이 호텔에서 탁실라 박물관까지 35km. 택시로 1시간 걸렸다.
호텔 근처 식당 상가 앞 풍경
택시 수배 중. 왼편 기사들과는 가격 협상 실패
황토색 옷을 입은 기사가 하늘색 옷을 입은 기사를 불렀다. 써니님이 협상 중. 나중에 노란색 택시 기사인 하늘색 옷을 입은 사나이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가장 중요한 유적인 다르마라지카 대탑을 방문하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은 한 발 물러서 결과를 기다리고.
협상이 잘 되어 출발. 너무 여유를 부렸더니 시간은 10시 가까이 되었다.
중간에 기름을 보충하고.
톨게이트 지나
탁실라 박물관 도착. 길 건너편에 박물관이 있다.
입장권을 사고(200루피). 이미 11시가 되었다.
한가한 공원 분위기의 박물관 주변
넓은 박물관 주위를 도는 관람차
탁실라 박물관
탁실라 박물관에 2022년 3월 태국 정부의 후원으로 특별 전시관이 만들어져 다르마라지카 대탑에서 발견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 했다.
"탁실라 박물관 당국은 목요일 특별 갤러리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전시했다. 갤러리에는 방탄 유리를 사용 완벽한 보안 시스템이다. 여러 보안 및 안전 기능을 갖춘 특별 갤러리는 태국 정부가 양국 간의 10년 된 문화 및 양자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로 선물했다.
고고학 및 박물관 부국장 무함마드 이크발 만즈는 목요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28년 탁실라 박물관 개관 이후 처음으로 신성한 유물이 1미터 길이의 특수 유리에 별도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태국 대사, 태국 남아시아, 중동 및 아프리카 국장, 카라치 주
재 태국 총영사, 일등 서기관이 탁실라 박물관에서 유리 갤러리를 개관했으며 최첨단 보안 기능으로 성물 도난 위협이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처님의 성물이 비문이 새겨진 은상자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비문은 한때 간다라 전역에서 흔했던 고대 카로슈티 문자로 작성되었는데 비문에는 노아차 우르사카가 다르마라지
카의 법당에 부처님의 뼈 유물을 모셨다고 명시되어 있다. 발굴은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에서 1912-16년에 수행된 발굴 중에 당시 인도 고고학국 존 마샬 경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는 이 사리탑이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야 황제 아쇼카에 의해 세워진 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8대 불교 사리탑 중 하나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이 사리탑은 부처님의 작은 뼈조각을 안치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나중에 그 주위로 발전한 대규모 수도원 단지와 함께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탁실라 유적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2022년 3월 25일 The Express Tribune)
2019년 11월 파키스탄 정부의 국빈 초청을 받은 조계종 참배단이 파키스탄을 방문, 이슬람 대표와 종교간 대화를 나누고 간다라 문명의 유적을 참배했는데 당시 탁실라 박물관에서 부처님 치사리를 참배했다. 예전에는 일반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봉안되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간다라 불상(2~3세기). 옷이 고대 로마의 전통의상인 토가(Toga) 스타일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염이나 얼굴은 북방계 민족의 얼굴이다.
이전에는 간다라 미술은 전적으로 그리스 헬레니즘 영향을 받았다는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학자들이 주장했다. 이른바 식민사관인 '오리엔탈리즘'이다. 1889년 아일랜드 출신의 인도 학자이자 역사가, 인도 식민지 공무원 및 큐레이터였던 빈센트 아서 스미스 (Vincent Arthur Smith, 1843~1920)는 간다라 불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간다란 조각상들은 3세기와 4세기의 2류 로마 예술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간다란 예술은 분명히 그리스 예술의 전통, 즉 서구의 일부의 확장이었고, 동시에 고전 서구의 업적과 일치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알프레드 푸셰 (Alfred Charles Auguste Foucher, 1865-1952)는 프랑스 고고학자로 불상의 이미지가 그리스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간다라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인도 북서부 아대륙과 힌두쿠시 지역의 고대 불교에 대해 많이 인용되는 학자다. 그는 범 헬레니즘 이전의 불교 예술이 주로 애니코닉(aniconic-상징)이었고 불상 대신 부처님의 삶의 요소(보리수, 법륜, 발자국 등)로 묘사함으로써 부처님를 대표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푸셰는 간다라 불상의 이미지가 그리스 예술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고 "그레코-불교 예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다음은 푸셰가 1900년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간다라 불상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한가할 때 보세요. 의심할 여지 없이 당신은 몽환적이고 심지어 다소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당신은 그 아름다움의 그리스적 특성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유럽인의 눈은 후광, 머릿결, 곧은 옆모습, 고전적인 눈 모양, 구불구불한 활 모양의 입가, 유연하고 움푹 패인 옷 주름을 봅니다. 이 모든 기술적인 세부 사항들, 그리고 아마도 전체의 조화는 어느 그리스 공방에서 온 예술가의 손길을 물질적이고 만져볼 수 있는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불교(Greco-Buddhist)"
알프레드 푸셰, 존 마샬, J. 보겔, W. 탄(Tarn) 등 서구의 고고학자들은 1913년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원래 붓다의 신상을 표현하지 못했던 인도인들이 그리스인들의 뛰어난 올림푸스 신상들에 감화를 받아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의 아폴로나 디오니시우스의 특징을 연상시키는 얼굴에 주름진 옷과 머리를 둘러싼 두광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남아시아 예술 전문가인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명예 교수인 수잔 헌팅턴(Susan L. Huntington) 박사는 의견을 달리 한다. 최근 인도의 초기 불교 예술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여러 기사와 곧 나올 책으로 출판되어 학계 내에서 상당한 논쟁과 토론을 자극하며 간다라 미술에 대한 초기 연구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잘못 해석 되었다. 예를 들어, 이 지역의 미술을 연구한 최초의 유럽 조사자들은 서양 전통에 편향되어 있었고, 미술 형식의 헬레니스틱 유산에 대한 빚을 지나치게 할당했다. 초기 조사자들이 직접적인 그리스나 로마의 영향으로 보았던 것들은 사실상 BC 1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 서아시아의 일반적인 헬레니즘 분위기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아시아 헬레니즘"은 그리스와 로마 유산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것이 주요한 영향이었을 뿐 아니라, 이란, 스카이드, 기타 전통에도 빚이 있었다. 당시 인도 세계에서 널리 퍼져있는 형식과 개념과 결합되어, 결과적으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스타일적 혁신을 바탕으로 진정한 국제적인 종합체가 되었다."
불상의 간다라 기원설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 당시 쿠샨 왕조 때 당시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던 남쪽 마투라(Mathura)에서도 불상이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위 사진). 현재 간다라 불상 기원설은 간다라 마투라 동시발생설이 힘을 얻고 있다. (불상의 탄생, 쿠샨의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불상이 생겨나는 과정...-동국대 황순일 교수)
탁실라 박물관을 대표하는 4m 높이의 모라 모라두(Mohra Moradu) 승원(2-5세기)에 있는 봉헌 사리탑의 복제탑. 7겹의 일산 덮개가 있는 작은 탑이며, 실제 유물은 현지에 있다. 당시 승원의 스승을 추모하여 조성했다.
시르캅에서 발굴된 불탑 상단부 일산 부분 (BC 2세기~AD 1세기)
명상 중인 불상. 옷과 머리카락이 그리스 로마풍이다.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수인(手印)으로서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을 맺고 있다.
자울리안에서 발굴된 명상에 잠긴 부처님(4세기). 누군가 손을 보수한 모양인데 안 하느니만 못하다.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상. 수염과 장식이 북방계 민족의 모습이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한 미륵보살상. 시무외인은 모든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두려움에서 떠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없애 주는 수인이다.
명상에 잠긴 불상. 얼굴과 머리 모습은 그리스풍을 벗어나 있다.
청동불상
간다라의 미소
누군지 모르지만 이 얼굴의 전체 모습이 궁금하다.
6세기 침입한 백훈(White Hunds)족에 의해 수 많은 불교 유적과 불상이 파괴되었다.
불탑의 좌대에 조각된 그리스 신 아틀라스
부처님 열반상(위)과 싯달타 태자의 궁중생활상(아래)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는 초전법륜상
다르마라지카에서 나온 1세기에 조성된 그리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상. 아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BC 130~AD 100). 다리 모양이 같음을 알 수 있다.
토기
청동기
알렉산드 이후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BC 3세기~BC 2세기) 시대에 주조된 동전
태양을 상징하는 만자 조각품. 인도불교 고유한 상징이 아니고, 인도 고대신화 속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 비쉬누(Vishnu)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 표지는 유럽·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에서 그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쇠 자물쇠(BC 2세기~AD 2세기)
철제, 청동 종
상아 조각품
토우
간다라 지역 시대별 벽 모양 변천
관람중인 현지인들
곡식을 담는 항아리
4남매 기념사진
탁실라 박물관의 소박한 내부
영국의 식민지 인도 시절인 1913년부터 1934년까지 탁실라를 발굴한 영국인 인도고고학 국장 존 마샬 경(1876-1958). 1928년에 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초상화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