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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4: 마르톨리 - 부르푸 - 마파 - 강하르
Martoli (3375) - burfu (3250m) - Mapa (3335m) - Ganghar (3412m)
난다데비 사원 방문
마르톨리의 아침이 밝았다. 청명한 날이다. 3000m 이상의 고도라 공기가 차다. 서리가 맺힌 텐트에 햇빛이 비치자 녹기 시작한다. 멀리 북쪽 밀람 방향으로 트리술리 봉이 선명하다.
아침에는 보통 삶은 계란(또는 오믈렛), 콘프레이크, 짜파티, 뽀리지 등이 나온다. 입맛이 없다해도 운행에 에너지가 필요하니 의무적으로 열심히 비축한다. 식사 후에는 가져간 드립 커피를 마신다.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향이 좋다.
텐트는 건조가 필요해 그대로 두고(스태프들이 나중에 철수할 예정) 마을 위 언덕에 있는 난다데비 사원을 방문했다. 난다데비가 여신의 이름이니 이곳 우타르칸드 곳곳에 난다데비 사원이 있다. 문시야리에도 판차출리의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에 난다데비 사원이 있다. 그리고 구글어스를 통해 조하르 계곡을 내려다 보니 마을마다 난다데비 사원이 있다.
문시야리는 슬쩍 볼 때는 그저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와 밀람 빙하 트레킹 출발점인 언덕 마을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티베트와의 고대 소금 경로의 마을이다. 그리고 카트고담에서 문시야리까지 굴곡이 심하기로 유명한 산길에도 불구하고 내국인들이 많이 찿아오는 유명 관광지다.
문시야리는 고도(2200m)가 높아 더운 인도의 여름 피서지로도 제격이다. 전망 좋은 난다데비 사원과 주변에 짧은 트레킹 코스, 야외 온천과 큰 폭포 등이 있어 인기가 많다.
한국 출발 전 난다데비 트레킹 관련 영상을 유튜브에서 찿아 보았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와 다시 찿아보니 많은 트레킹 영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인도 사람들은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가 보다는 대부분 밀람 빙하를 목적지로 하고 있어 'Nanda Devi' 검색어에 잘 노출되지 않았다.
갠지스(Ganga) 강은 힌두인에게 성스러운 강이며 갠지스 강의 발원지인 강고토리 빙하가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하는 고묵(Gomuck)은 성지 중의 성지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강고트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난다데비 산군에서 발원한 밀람 빙하도 갠지스 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성스럽게 여겨 밀람 빙하로 순례(yatra)를 오는 사람들이 많다.
마르톨리 언덕에 있는 난다데비 사원은 몇 년에 걸쳐 재건축했고 최근 주 사당을 색칠했다. 주변은 아직 어수선하다. 사원 경내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힌두 사원의 철칙이다. 나렌드라가 이곳을 안내한 이유는 난다데비를 보여줌과 동시에 힌두교도로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개인적 기원도 있을 것이지만 이번 팀의 트레킹이 잘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을 것이다. 다른 분들은 신발을 벗는 것이 번거롭고 작은 힌두사원 대한 흥미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어떠한 종교의 에배당이든 들어가 경의를 표한다. 예전 남인도 아루나찰라에 있는 스리라마나 마하르시 아쉬람에서 2주 머물면서 여러 큰 사원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낯설지 않다.
사원 주 사당은 문이 잠겨 있다. 창문으로 슬쩍 보니 내부도 조금 어수선하다. 외부 색칠은 마쳤지만 내부는 아직 완공이 덜 된 것 같다. 그 옆에 작은 사당에서 나렌드라가 기도를 드린다. 나도 난다데비 여신에게 남은 일정을 잘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난다데비 사원에 오르니 멀리 난다데비 봉우리가 보인다. 나는 크게 보이는 봉우리가 주봉으로 알고 있는데 나렌드라가 그것은 동봉이고 오른쪽 작게 보이는 봉우리가 주봉이라고 한다. 유투브에서 본 영상에서 잘못 설명한 것을 모르고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 그 왼편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이 있다. 틸만팀이 내려온 롱스타프 콜(Longstaff's Col)이다.
틸만의 하산 루트
1936년 8월 29일 영-미 난다데비 원정대 틸만과 오델은 난다데비 초등에 성공한다. 그날 정상 아래 텐트로 내려와 잠을 잔 후 분지에 설치 된 임시 캠프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원/포터들과 합류한 후 9월 1일 하루 쉬고 9월 2일 여러 팀으로 나누어 하산 한다.
그들은 원래 트래일 패스(Traill's Pass)를 통해 핀다리(Pindari) 빙하를 지나 처음 출발했던 라니케트로 가고자 했다(위 지도에서 녹색선). 그 패스는 라니케트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날씨 등 현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롱스타프 콜을 통해 마르톨리로 내려오게 된다. 틸만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새 고개(A New Pass)
휴스턴은 거의 회복되었고, 다 남걀은 여전히 기침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오델의 잠옷을 펼치려는 듯했다. 남걀은 여섯 명의 사람, 우편, 그리고 브리지 캠프에서 버려진 몇 가지 사치품을 가져왔다.
그 중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나이 많은 마나(Mana) 사람 한 명이 함께 와서 바드리나트의 라왈(Rawal)로부터의 인사와 선물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 선물은 엄청난 양의 사과, 견과류, 감자 및 기타 채소로 이루어진 바구니였는데, 차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환영받았다.
우리가 지내온 바 신선한 음식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치 중 하나였다. 우리는 각자가 가장 갈망하는 식사를 위해 고립된 상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모든 가상의 메뉴에서 과일이 큰 역할을 했다.
우리를 이미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도왔던 이의 친절하고 생각 깊은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다행히 일부 인원은 돌아가는 길에 바드리나트를 방문하여 우리의 은인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우리의 기쁨 중 하나는 임시 캠프인 이 분지에 초록빛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풀이 자랄 수 있을 것 같은 흙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풀이 자랄 수도 있고 실제로는 약간의 이끼와 부족한 풀을 지탱할 수 있었다. 굶주린 우리의 감각에 그것은 오아시스처럼 보였고 신성한 냄새가 났다.
무한한 기쁨을 주는 것은 마시는 물의 신선함, 목탄 불의 따스함, 따뜻한 흙 위의 맨발, 마모트의 울음 소리 등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고 맛이 난다고 주장했으며, 산에서는 캠프 3에서 캠프 2로 내려갈 때 이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물론 가만히 앉아 있다면,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가 3천미터인지 6천미터인지 구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산에 있을 때 에몬스는 남동 빙하와 그 지류들의 평면도 측량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9월 1일은 휴식을 취하고 하산 계획을 확정짓는 데 전념한 소중한 날이었다. 나는 '롱스타프 콜'을 통해 새로운 길로 나가보려고 했고, 휴스턴도 따라오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13일까지 라니케트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 오기를 희망했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모두 그렇게 많이 들어온 바드리나트 마을을 보고 싶어했고, 에몬스는 그의 측량을 완료하기 위해 분지에서 하루 또는 이틀이 더 필요했다.
2일에 여러 팀이 출발했다. 먼저 떠났던 것은 누리인데, 그는 몸이 허약한 상태였으므로 짐 없이 먼저 출발하기를 원했다. 그 뒤를 이어 그레이엄 브라운, 로이드, 오델이 이중 행진(double march)이라는 가장 야심찬 계획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그들을 '급행'이라고 불렀다.
그런 다음 루미스와 카터는 남은 장비를 운반하는 대부분의 포터들과 함께 출발했다. 그들은 '느린 화물'이었다. 에몬스와 칼루는 칼루가 가슴을 치는 모습을 보여준 후 빙하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의 짐은 놀랄 만한 규모여서 그가 빙하를 안전하게 건너면 자랑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휴스턴, 파상, 그리고 나는 정오쯤 가능하면 짐을 가볍게 하고 눈보라 속에서 패스 아래 눈 경사면에 있는 비박할 곳을 향해 떠났다. '급행'팀과 '느린 화물'팀은 출발한 지 얼마 후에 역할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급행'팀은 발목 문제로 고생했다. 라니케트는 분지를 떠난 순서와는 반대로 도착되었으며, 예상 일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우리 세 명은 빙하의 바로 오른쪽 언덕을 따라 올라갔고, 콕스콤(Coxcomb) 능선 아래 커브가 시작되는 곳에서 빙하를 건넜다. 우리는 에몬스가 야영지를 표시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진행 속도가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느릴 것으로 가정하는 바람에 찾지 못하고 눈 위에 캠프를 차리고 모두 한 텐트에 들어갔다.
고도는 약 5334미터이고 고개는 5852미터이므로 우리는 아주 일찍 출발 준비를 했다. 그 날과 밤에 계속 내린 눈 때문에 넘어갈 기회에 대해 우리는 우울한 예상을 했다. 우리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맑은 아침 5시에 떠나 바위 벽 아래를 기어갔다.
눈은 부드러워서 우리를 경각심과 낙담으로 가득 채웠지만, 일단 바위에서 벗어나자 눈은 단단해졌고 곧 우리는 얼음도끼로 발 아래를 긁어내야 했다. 경사가 급격히 가파르게 변했고, 오른쪽에 있는 돌출된 바위가 쉬울 것 같아 그쪽으로 향했다. 일단 오르면 약간 완만한 눈 능선(snow rib)의 아래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리는 이 능선으로의 접근을 산 캠프에서 빛과 그림자의 모든 조건을 두고 오랜 시간동안 열심히 연구했으며, 항상 그것이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덜 가파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약간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어젯밤에 올라오면서 우리는 눈과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에서 그것을 왜곡된 모습으로 잠시 보았을 때 터무니없이 쉬워 보였다. 이제 우리가 그 아래로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우리의 첫인상은 확고해질 뿐만 아니라 더 깊어졌다.
암벽의 두 군데에서 조금 시도해 보았지만, 암벽에 너무 많은 얼음이 붙어 있어, 우리는 안전을 위해 조용히 눈으로 후퇴했다. 우리는 암벽 정상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그런 다음 눈 능선으로 가기 위해 윗부분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횡단 구간의 눈은 굉장히 깊고 느슨했으며, 아래에 지지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바위여서 눈사태의 조건이 되었다. 우리는 상당한 불안감을 가지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눈 능선은 유혹적으로 가까웠고, 왼쪽에 있는 눈을 향해 직진하는 경로는 경사바 급해 위험해 보였다.
햇빛은 이제 우리 위에 있는 벽을 넘어서 잘 들어와 우리의 불안을 더 키웠다. 눈은 굳어 있다. 일단 능선에 정확히 양다리로 올라서자 우리는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처음 몇 미터 동안 눈은 사실 난다데비 꼭대기 근처에서 경험한 것보다 나빴고, 한 발 올라가면 두 발이 빠지게 되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우리는 몇 미터 올라가면서 견고한 바닥을 찾기 시작했다. 오랜시간 동안 땅을 찿아 발을 찬 끝에 우리는 11시에 고개 정상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오르는 동안 날씨는 맑았고, 능선에서 본 난다데비는 장엄했다. 나는 이 소중한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내 배낭의 맨 아래에 있다. 즉 포장되고 고정된 적재물이 되어 내 배낭 안에 있다.
우리가 등반의 어려운 부분에 열심히 집중하다보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의향이나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미약한 변명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 순간을 미루기만 했다.
물론 지금 우리가 고개 정상에서 지쳐 앉아 있을 때 전체 산은 안개 속에 사라져 버렸다. 더 높았다면 이를 고산 정신상태의 좋은 예로 들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단지 5700미터에 불과하니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것이 가르쳐주는 적어도 하나의 교훈은, 카메라를 배낭에 넣지 말아야 하고, 그 카메라는 작고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우리가 앉아 있는 곳에서 90여 미터 이내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고개와 그 주변을 오래 그리고 자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지형을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분지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며, 동쪽 난다데비로 이어지는 긴 어깨의 기슭에 있었다. 남쪽 림(rim)은 남동 빙하의 주 빙하 위로 솟아 있는 플루트 얼음 벽으로부터 300미터 솟아 있다. 이 얼음 벽의 어딘가에 분지 바깥으로 난다코트(Nanda Kot)와 난다데비 그룹을 연결하는 언덕이 동쪽으로 뻗어 있다.
성역 벽과 난다코트 사이의 이 능선에는 1815년부터 1835년까지 쿠마온(Kumaon)을 통치한 초대 행정장관의 이름을 딴 트래일 패스(Traill's Pass)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다. 그는 또한 1830년에 이 고개를 처음으로 넘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목적은 산악 탐험이 아니라 핀다리 계곡과 밀람 사이의 상업적 목적에 유용한 지름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 고개의 높이는 5395미터이며, 그의 목표가 무엇이든 그는 등산가가 아니었고 등산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놀라운 위업이었다.
그 이후로 1장에서 설명한 대로 1855년 아돌프 샬라긴트바이트가 이 지역을 통과했고, 1861년 에드먼드 스미스 대령이 통과했으며, 1926년에는 휴 러틀리지가 포함된 일행이 다시 이 지역을 통과했다. 패스는 핀다리 빙하로 이어지며 그곳에서 라니케트(Ranikhet)까지 가는 길은 짧고 쉬우므로 패스를 건너는 몇 시간 동안뿐 아니라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매력적이다.
고개의 동쪽 산등성, 현재로서 확실히 패스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바위와 눈의 경사가 분지 쪽보다는 분명히 가파르지 않은 경사가 밀람 계곡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알려진 적합한 경로였지만, 트레일 패스를 찾아 건너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짙은 안개는 큰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난다데비의 높은 곳에서 했던 매우 먼 거리에서의 조사 결과로 볼 때, 패스가 있는 산등성이가 우리가 현재 앉아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높이를 많이 잃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패스 근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마음과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이러한 고려가 최우선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패스와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한 시간 동안 앉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날씨가 나빠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파르고 부드럽고 상당히 위험한 눈 위를 두 시간 동안 가도록 안개는 여전히 짙었고 우리는 아무데도 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트레버스를 포기하고 텐트를 칠 장소를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더 낮은 곳으로 밀려내려갔다. 적절한 야영 장소가 없고 시간이 늦어지자, 우리는 직접 빙하로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아마도 트래일 패스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매우 피곤했다. 하강을 잘못하여 긴 얼음 도랑에서 곤경에 빠졌다. 그 얼음 도랑은 얼음으로 가득 찬 물줄기였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고, 몇 번의 미끄러짐 후에는 얼음 도랑 안에서의 견고하지만 위험한 이동을 버리고 위쪽 눈밭에서 안전하게 걷기로 마음먹었다.
바위 하나가 굴러와 부딪치기 전 가까스로 피했을 때 내 마음은 결정되었다. 품위를 버리고 허급지급 나는 기울어진 눈밭을 올라가려고 애썼다. 우리는 마침내 오후 5시 반쯤 르완 빙하 몇 백 미터 위, 거의 초원인 곳에 캠프를 차렸다.
파상도 고생을 충분히 한 것 같았다. 그날 밤 상황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아쉽게도 패스 시도를 포기하고 밀람 계곡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높이를 잃어버려 다시 오르는 것에 적당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더 길 수 있는 경로지만 현재의 날씨와 눈 조건에서는 둘러가는 것이 최단의 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무게를 줄이기 위해 프리머스 스토브와 일부 파라핀을 버리고 빙하로 내려가 북쪽으로 건너 빙하를 따라 내려갔다. 빙하에서 나오는 평범한 개울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직 물길이 작아보였다. 그러나 이 개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라니케트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건넜다. 그러나 멀리서 고기 냄새를 맡고 호기심을 자극받은 파상은 북쪽 둑을 따라 아래로 빠져나갔고 휴스턴도 그를 따라갔다..... (틸만, 앞의 책, pp. 250-254)
이후 오후 3시 마르톨리에 도착하기까지 나머지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1936년 9월 초 전인미답의 고산 빙하지대에서 길을 만들어 내려와야 하니 그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으로부터 (2023년 10월 현재) 무려 87년 전의 일이다.
마르톨리에 내려 온 틸만은 이곳 조하르 계곡에 대한 문화, 인류학, 역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확실히 그는 등반가일 뿐만 아니라 탐험가이고 모험가이다. 그의 후기는 단순한 등반 보고서를 넘어서 인문학자의 글 같은 느낌을 준다. 마르톨리에서 그의 글은 계속된다.
마르톨리의 보티아족(The Bhotias of Martoli)
마르톨리는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주요 무역로 중 하나이며 인도 쪽 국경에 있는 마지막 밀람 다음 마을이다. 고리강과 르완강 사이의 합류점 고도 3300m에 달하는 이곳은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날카로운 바람이 휩쓸고 있는 황량한 곳이다.
이곳에는 약 200명의 보티아족이 점령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고 '점령(Occupied)'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초여름에만 양떼를 몰고 이곳에 올라왔다가 10월에 다시 고리 계곡 아래의 문시야리와 다른 마을로 내려와 겨울을 보내기 때문이다.
모든 식량은 가져와야 한다. 왜냐하면 약간의 겨자와 감자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초지는 훌륭하고 향나무와 랄리구라스 덤불이 연료를 공급한다. 집은 돌로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지붕은 두꺼운 슬레이트로 덮여 있고 일반적으로 깃발이 달린 안뜰을 둘러싼 텅빈 사각형 형태이다.
이 가장 흥미로운 민족인 보티아족과 티베트와의 무역에 대해 많은 글을 쓸 수 있지만 간략한 개요만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말했듯이, 보티아족은 몽골계 출신이며 티베트어와 유사한 방언을 사용한다. 보트(Bhot) 또는 보드(Bod)는 실제로 티베트와 동일한 단어이지만 가르왈 및 알모라 사람들은 북쪽 국가를 언급할 때 이러한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훈데스(Hundes)라고 부른다.
그들은 어느 정도 힌두교화되었으며 티베트의 신들뿐만 아니라 힌두교 신전의 신들도 숭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엄격한 힌두교도 아니며, 카스트 제도는 그들이 적절하게 해석한다. 음식 문제에서는 그들은 티베트인들과 함께 식사할 용의가 있다. 이는 엄격한 힌두교도에게는 부정적인 일이지만, 아마도 보티아인들에게는 거래 관계에서 이점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르왈 보티아인들은 우리 음식 중 어떤 것이든 먹는 데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들이 쾌활하며, 강인하며, 부지런하며(적어도 여성들은), 정직하며, 환대적이며, 자선적이며,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가끔 생각되는 것처럼 야만적이거나 미개하지 않다. 그들의 집은 잘 지어져 있고 어느 정도 건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영리한 상인들로, 교육을 받기를 원하며, 인도 측량의 유명한 판디트 'A.K.'로 알려진 라이 키센 싱 바하두르(Rai Kishen Singh Bahadur)와 같은 인물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티베트의 탐험과 지도 작업에서 자신의 명성을 얻은 몇 명의 다른 인물들이 있다.
보티아족은 티베트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데, 이는 티베트인들이 부과하는 많은 세금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밀람에서 티베트로 가는 길은 5100m~5400m 사이에 있는 3개의 고개가 있으며, 이 계곡에 거주하는 보티아인들이 사는 모르타레 갸네마와 가르톡 사이에 목초지가 없기 때문에 하루에 모두 건너야 한다. 가르톡은 양과 함께 여행할 때 5일에서 10일 정도의 여행이다.
해마다 봄이면 지역 티베트 관리는 밀람을 방문하여 먼저 마을에 전염병이 없음을 확인한 후 고개를 열기 전 일반 통행료를 부과한다. 추가 세금은 티베트에서 납부된다. 한때 인도 정부는 티베트인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티베트인들이 출입문을 닫으면서 응답하자 보티아족은 너무 큰 타격을 입어 그들의 요청에 따라 철회했다.
티베트는 곡물을 거의 생산하지 않으며 주로 인도에서 수입하는 밀, 보리, 쌀에 의존하므로 보티아족이 가져오는 주요 물품인 설탕, 담배, 황동, 구리, 철을 구입하고 그 대가로 그들은 티베트에서 양모, 소금, 붕사, 야크 꼬리, 조랑말을 가져온다. 이들 중에서 양모가 가장 중요하다.
1907년 양모 400톤이라는 수치는 경로와 운송 수단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수치다. 보티아 상인과 그 가족은 봄에 밀람과 마르톨리에 와서 그곳에 기지를 세우고, 여름에 티베트로 두세 차례 여행을 떠난다. 초가을에 그들은 양모, 소금, 붕사를 남부 계곡 중심부로 보내기 시작하고, 11월 초에 밀람과 마르톨리는 다시 한 번 버려진다.
염소와 양이 주요 운반 수단이지만 때때로 야크, 집부스(jibbus), 노새도 사용된다. 이를 위한 사료는 전혀 운반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방목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따라서 행군은 짧고 10~12km를 초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히말라야의 가혹한 협곡과 험난한 고개에서 수행되는 무역에는 낭만이 있다. (틸만, 앞의 책, pp. 256-257)
그러니까 마르톨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름철 가축이 방목지로 그리고 티베트와의 교역을 하는 마을로 사용될 뿐 주민들이 상주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역도 끊어지고 가축을 방목하는 주민도 줄어들어 200여 명이 거주했던 많은 집들이 허물어져 있다. 성주괴공, 흥망성쇠의 순환은 동서고금과 시공을 초월하는 불변의 진리임을 새삼 느낀다.
마르톨리에서 강하르 가는 길은 일단 165m를 수직으로 하강하여 찻길과 만난다. 롱스타프 콜에서 내려오는 계류가 고리 강가 강에 합수되기 바로 전 차가 다니는 철교가 놓여 있다. 이제부터는 넓고 한가한 찻길이다. 길은 부르푸 찻집을 지나서 갈라진다. 찻길은 강을 건넌 후 좌회전하여 북진, 밀람까지 간다. 우리는 계속 북진.
오전 10시 부르푸 찻집에서 잠시 쉬면서 차와 간식을 먹었다. 10대 소녀와 어머니가 운영하는 소박한 찻집이다. 이 거칠고 허허로운 광야에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찻집이 있다.
점심을 먹은 마파에는 오전 11시 15분 도착했다. 마을은 텅 비어 있다. 이 조하르 계곡에 마을이 15개 있다고 하는데 주민이 점점 줄어들어 마을마다 몇 집 살지 않는다. 그나마 겨울이 되기 전 문시야리로 내려간다. 이 지역은 곡식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고 한다. 채소는 자라지만 그것도 여름 한 철 뿐이다. 추운 겨울에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환상적인 쿠샤(Kusha) 초원길
부르푸 찻집에서 윗길로 갔다. 강바닥을 따라가는 아랫길도 있지만 전망이 좋지 않다. 윗길도 길이 좋아 말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파 지나 두 개의 깊은 계곡이 있어 말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계곡을 건너면 길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그리고 강하르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초원길이 나타났다. 히말라야는 역시 히말라야다. 히말라야는 고도에 관계없이 어느 곳이든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몇 번 히말라야를 방문했지만 한 곳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이곳 난다데비만 해도 3000m 넘는 고도에 이런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팔 히말라야라면 아직 큰 나무가 많이 있을 고도인데 여기는 3300m에서 수목한계선이 걸려 있는 듯 나무가 전혀 없어 전망이 일망무제로 시원하다.
이 멋진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 풀 이름은 쿠샤다. 이 식물은 오래 전부터 인도의 다양한 전통 속에서 종교적 의미를 포함해 매우 신성한 식물로 여겨지는 벼과 식물이다. 힌두교에서 의식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데 쿠샤 풀은 비슈누의 머리카락에서 태어났으며, 최고 신성의 세 신인 우주의 창조자 브라마, 보존자 비슈누, 파괴자 시바의 핵심을 수용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지막 정진을 할 때 근처에서 풀 베는 목동으로부터 공양받아 깔고 앉은 풀이고 마침내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풀로 길상초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시고 니련선하를 건너실 때 물가에서 길상(吉祥)이라는 이름의 목동이 풀을 베고 있다가 그 풀을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부처님께서 그 풀을 펴고 깔고 결가부좌하여 앉아 '여기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하시며 굳은 서원을 세우시고 정진하셨다. <출요경 방일품>
강하르 도착
고리 강가 주변으로 평탄한 초원을 걸으니 흥이 절로 난다. 모두들 신나서 기념사진 찍느라 발길을 멈춘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이미 마파에서 점심 먹을 때 윈드자켓을 겹쳐 입었다. 숫사자 갈기 같은 쿠샤 풀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크기도 커서 풀 안에 들어가면 온 몸이 파 묻힐 정도다.
길상초를 네팔 히말라야에서도 보기는 했지만 대부분 절벽 옆 산비탈 경사지에 있고 규모도 작다. 이렇게 넓은 광야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군락으로 있는 곳은 처음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히말라야 다른 어떤 곳도 여기와 같은 곳은 없을 것 같다.
오후 2시 강하르 도착. 오늘은 12km의 비교적 짧은 거리이고 작은 계곡 두 개를 빼면 그리 어렵지 않아 운행이 일찍 끝났다. 강하르도 마르톨리처럼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다. 난다데비 이스트에서 발원한 파추 빙하의 물이 파추계곡을 따라 내려와 이 지역이 주류인 조하르 계곡의 고라 강가 강으로 합수된다.
오후의 맹렬한 바람이 강 하류에서 불어온다. 바람은 해가 지고나면 잠잠해 진다. 그 사이 모두들 빨래줄을 치고 땀에 젖은 옷가지를 널고 있다. 나도 부진런히 돌담에 줄을 걸치고 옷가지를 널었다.
한가한 오후, 식당텐트에 준비된 차와 과자를 먹고 바람에 흔들리는 텐트로 돌아와 누워서 편하게 음악을 들었다. 내일이면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로 간다. 그곳 고도는 3900m. 여기서 고도를 500m 올려야 한다. 쉬운 운행은 아니겠지만 랑탕 빌리지에서 컁진곰빠 가는 여정과 비슷하리라 생각하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
마르톨리의 맑고 쌀쌀한 아침. 히말라야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아침 식사 후 드립커피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버려진 집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오늘 운행은 난다데비 사원(왼편 언덕 위) 방문부터 시작한다. 서리에 젖은 텐트는 말려야 하므로 스태프들에게 맡겼다.
오전 8시 난다데비 사원을 향해 출발
조금 오르다 돌아 본 마르톨리
거의 도착
사원 입구 (클로버님 사진). 출입시 종을 쳐 여신에게 방문을 알린다.
자료를 찿아 보니 이 사원은 이전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몇 년 전부터 재건축하기 시작하여 23년 여름 색칠 등 1차 작업이 완료되었다. 아직 미완이라 주변이 어수선하다. 일단 사원 영역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나렌드라와 나만 들어갔다. 작은 사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나온 나렌드라. 나도 난다데비 여신에게 무사 운행을 빌었다.
난다데비를 배경으로 선 나렌드라
여기에 사원을 건립한 이유가 있다. 난다데비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마르톨리 난다데비 사원(3440m)에서 롱스타프 콜 쪽 계곡으로 3km 정도 더 들어가면 작은 난나데비 사당이 또 있다(3610m, 아래 사진). 그 사당이 더 오래되었을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난다데비 이스트봉을 난다데비 주봉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다데비 사원 앞에서 나렌드라가 고쳐주었다. 틸만 팀은 난다데비 역사적인 초등에 성공하고 롱스타프 콜을 통해 이곳 마르톨리로 내려왔다.
난다데비 자료를 찿으면 이런 사진이 제일 많이 나온다. 그래서 왼편 이스트봉을 주봉으로 생각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유튜브 영상(위 캡쳐 사진)처럼 잘못된 정보를 무지성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자료에 의지하면 안돼고 여러 자료를 교차 검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삼 느꼈다.
위 지도에서 녹색 선은 틸만 팀이 계획했던 하산 루트. 이 트래일 패스를 넘어 핀다리 빙하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롱스타프 콜을 통해 마르톨리로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원래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4385m)는 롱스타프 콜 아래에 있다. 지금 모든 여행사에서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이라고 부르는 트레킹은 정확하게는 '난다데비 파추 빙하 트레킹'이 보다 정확한 말이다.
난다데비 이스트봉인 수난다데비(Sunanda Devi)는 폴란드 원정대가 1939년에 처음으로 올랐다. J.클라너, J.부자크, D.체링(셰르파) 세 사람은 지금도 이스트봉의 표준 등반 루트인 롱스타프 콜을 통해 남쪽 능선으로 올라 정상으로 갔다.
난다데비 이스트 베이스캠프는 마르톨리에서 거리가 30km가 넘는 길이다. 등정하는 팀도 거의 없어 아마 길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트레커들이 그곳을 갈 이유가 없고 갈 수도 없다. 그레서 대체지로 접근성이 좋고 난다데비 이스트봉을 잘 볼 수 있는 파추 빙하를 택하고 이름도 그렇게 붙인 것 같다.
기념사진
사원에서 내려다 본 마르톨리. 초지가 넓어 여름철 가축 방목지로 쓰이고 있다. 1936년 이곳을 방문한 틸만의 글을 보면 당시에도 마르톨리는 주민이 상주하지 않고 여름철 가축 방목을 위해 200여 명의 사람들이 임시로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마을 끝에서 내려 가는 길. 수직으로 떨어진다.
165m 하강하면 바로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찻길과 다시 합류.
다리 건너 휴식. 기온이 오르니 물 한잔 마시고 자켓을 벗었다.
마르톨리에서 내려 온 길.
상공에서 본 마르톨리에서 다리로 내려 오는 길 (구글어스)
처음으로 지나가는 도로 건설 작업 차량을 만났다.
부르푸에 근접했다. 멀리 오른쪽 언덕 위가 부르푸 마을. 일단 왼편 다바에서 휴식.
오전 10시 부르푸 다바 도착.
차와 간식을 먹으며 휴식
여기서 찻길을 버리고 마파를 향한 산길을 간다. 말들은 아래 뮬트랙(노새길)으로 가다가 계곡을 두 개 건넌 윗길과 만난다. 작은 계곡을 세 번 건너야 하는 윗길보다 강물을 따라가는 아래길이 편하지만 100여 미터 높은 윗길에서 보는 풍광은 압도적이다.
넓은 개활지를 걷다가
오래된 산길을 만난 후
작은 계곡을 건너 오전 11시 15분 텅 빈 마파 마을 도착.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이 지역 고도가 3300m 정도인데 큰 나무가 없고 낮은 향나무와 관목만 보인다. 네팔 히말라야에서 보통 수목한계선이 3800m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돌아와 지도를 보니 수긍이 된다. 네팔 히말라야보다 이곳 위도 가 훨씬 높아 날씨가 더 춥기 때문에 수목한계선이 낮은 것이다.
한가로운 넓은 산길
가끔 단체 셀카도 찍고
그리고 나타난 가파른 계곡.
경사도가 상당하다. 그래서 말은 이 길을 오지 못한다.
올라와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바로 다음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을 올라가는 일도 만만찮다.
계곡을 올라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니 말들이 계곡 아래 뮬트랙으로 해서 올라오고 있다. 윗길과 아랫길이 이곳에서 만난다. 우리도 돌아갈 때는 아랫길로 갔다.
곧 이어 후 펼쳐진 황금색 길상초 쿠샤 초원의 향연. 이번 트레킹의 백미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그야말로 즐겁고 한가한 소풍길
모두들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도 한 장
바람에 휘날리는 숫사자 갈기와 같은 쿠샤 풀 사이를 휘적휘적 여유롭게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 강하르 등장
이런 방갈로 형태의 막사는 공병대원들의 숙소다.
마을 입구를 지나
오후 2시, 마을 도착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주방과 식당 텐트를 치고 있다.
마당 끝 계곡 옆에 텐트를 치고 젖은 빨래를 널었다. 바람이 엄청 불었다.
다른 대원들도 이런 찬스를 놓칠리 없다.
언제나 즐거운 간식 시간
오후 4시, 한가한 캠프사이트 풍경. 산이 높아 일찍 해가 진다.
바로 옆 파추 계곡 건너에 파추 마을이 있고 저 멀리로 고리 강가 강이 흐르는 조하르 계곡의 마지막 국경 마을 밀람이 보인다.
구글어스에서 본 강하르와 파추 마을
지금까지 북진을 했고 내일부터는 난다데비 이스트를 향하여 파추계곡을 거슬러 서진한다.
▶인도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 문시야리 에이전시◀
India Nanda Devi East BC Trekking Munsiyari Agency
www.himalyantreks.com (CEO Narendra Kumar)
첫댓글 많은 자료를 찾고 책을 번역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덕분에 편하게 앉아서 좋은 정보를 얻고 귀한 지식을 얻어갑니다~^^ 사진에서는 난다데비가 난다데비 이스트보다 낮아 보이는데 위치 상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실제는 난다데비가 더 높은거죠? 등반에 문외한이라 기초적인 지식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