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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5. 셀렐레 - 미르긴라 - 체람
● 거리: 14.3km
● 시간: 7:40
● 최고: 4720m (시네랍차라)
● 최저: 3870m (체람)
손이 시려워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셀렐레(4290m)는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보다 160m나 높지만, 그곳보다는 덜 춥다. 주변이 바위산이라서 설산으로 둘러싸인 ABC보다 바람도 덜하고 체감온도도 조금 낫다. 그래도 동쪽에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해가 뜨기 전 아침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방 탁자 위 온도계를 보니 영하 2.3도.
오늘은 캉첸중가 트레킹에서 제일 힘든 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000m 중후반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하기에 서둘러 아침을 먹고 6시 40분 출발했다. 출발하여 동쪽 고개를 향해 오르는데, 영국팀은 벌써 멀찍이 앞서고 있다. 그런데 채 10분도 안 돼 문제가 생겼다. 손이 ‘겁나게’ 시려웠다.
방에에서 나올 때만 해도 별로 추운 줄 몰라서 그냥 폴라텍 장갑만 꼈는데, 찬 기운이 손끝을 파고들며 손가락이 곱아지기 시작했다. 오래 전 토롱라를 새벽에 넘을 때 그 고통이 되살아났다.
고소장갑도, 핫팩도 있었지만 모두 카고백에 넣어서 꺼낼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핫팩 하나만 열어서 자켓 주머니에 넣고 손을 번갈아 데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며 숨이 턱턱 막히는 고산길을 걸었다. 고산에서는 심장에서 가장 먼 손가락과 발가락부터 체온을 버린다. 그래서 동상도 거기서 가장 많이 걸린다.
1시간을 손을 비비면서 버텼다. 드디어 햇살이 산을 넘어 비치기 시작하니 비로소 살 것 같다. 많은 트레커들도 우리 뒤를 이어 올라오고 있다. 아래쪽 롯지에서 묵었던 이들이다. 햇볕이 드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북동쪽으로는 자누(7710m)의 설봉이 멋있게 우뚝 솟아 있다. 자누 베이스캠프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이다.
캉첸중가의 명물 '고양이 바위'
8시 35분, 출발한지 2시간 걸려 시니온라(4660m)에 올랐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녀노소 모든 트레커들이 만세를 부른다. 다음 고개는 미르긴라. 시니온라부터 미르긴라까지는 산비탈 너덜길이다. 가다보면 중간에 4620m 높이에 능선 박차(산 능선에서 옆으로 뻗어 나온 짧은 능선)가 나온다.
그 박차를 넘으면 북쪽 산 능선 봉우리 위에 명물인 '바위 기둥'이 보인다. 이 바위는 ‘사자 바위’ 또는 ‘고양이 바위’라고 불리는데, 내가 보기엔 ‘고양이 바위’ 쪽이 더 가까운 모습이다. 예전 여러 후기를 번역하면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놓쳤다.
위치를 정확히 몰랐던 것도 있지만, 전날 피곤에 지쳐 예습도 안 한 것이 결정타였다. 강첸중가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고양이 바위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져온 가이드북에도 쓰여 있고 다운받아 온 유튜브 영상에 나오는데 보지 못하고 잠들었던 것.
이 바위는 워낙 유명해서 이 길을 지나간 모든 탐험가들이 언급하고 있다. 케브의 캉첸중가 가이드북(p.122)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트레일은 기도 깃발로 장식된 시니온라(SINION LA) (4660m, 1시간 20분 소요)까지 비스듬히 올라가기 전에 두세 개의 가짜 콜(col, 안부)을 지난다. 그곳은 돌무덤으로 장식된 능선 돌출부이며, 실제 고개의 오른쪽 가장 높은 지점에서는 북서쪽으로 길게 늘어선 설산들, 즉 마칼루, 로체 샤르, 에베레스트, 촐라체 등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북동쪽으로는 자누의 마지막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고개를 떠나 트레일은 능선 아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간 내려가, 시니온 라에서 약 7분 거리에 있는 갈림길에 이른다. 왼쪽 길을 택하면 완만하게 하강하는 횡단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완만하게 매우 돌이 많은 길을 따라 올라가 결국 또 다른 능선 박차(1시간 50분 소요)에 도달한다. 이곳에서는 권곡의 머리 부분을 돌아 미르긴라를 볼 수 있다. 이 고개로 접근할 때, 당신 위로 솟아 있는 뚜렷한 스핑크스 같은 바위를 주목하라.
1848년과 1849년 두 차례에 걸쳐 캉첸중가 지역을 탐험한 최초의 서양인 중 한 명인 후커(Joseph Dalton Hooker)는 그것을 "기묘하게 고립된 기둥"으로, 1881년 찬드라 다스(Chandra Das)는 "그 바위는 캉-첸을 향해 바라보는 말 머리처럼 생겼다"라고 썼다. 그리고 1899년 이곳을 지났던 프레시필드(Douglas Freshfield)는 "이상한 오벨리스크"라고 했다.
나중에 체람에 도착해서 사진을 확인하다가 셀렐레라에서 찍은 사진에서 고양이 바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런 건 원래 가이드가 알려줘야 하는데, 파상도 그냥 나를 따라오느라 깜빡했는지 말이 없었다.
10시 10분, 미르긴라에 도착했다. 군사–체람 구간 다섯 개 고개 중 유일하게, 비록 손으로 썼지먼 고개 이름 팻말이 있는 곳이다. 천막 찻집이 있어 반가웠다. 햇볕 좋은 곳에 앉아 라라누들수프 한 그릇. 따끈한 국물이 몸을 녹여줬다. 날씨가 좋아 쿰부 히말과 마칼루가 또렷하게 보인다.
점심 먹고 잠깐의 휴식 뒤, 10시 54분에 미르긴라를 떠났다. 하지만 15분도 안 돼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너덜길을 힘겹게 건너며 마지막 고개를 향했다. 엄청나게 큰 바위 너덜 오르막이다. 포터들도 힘들어 자주 쉬는 구간이다.
11시 50분, 시네랍차라(4720m)에 도착.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캉첸중가는 보이지 않고, 카브루 연봉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5분 뒤 도착한 러시아팀은 구름 때문에 설산 구경도 못 했다. 한 여성 트레커가 내가 한국인이라 하자, BTS 팬이라며 “안녕하세요, 사랑해요”라고 수줍게 말한다. 한국말 실습 시간이다.
시네랍차라를 넘자마자 정신없는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구름에 덮여 위쪽 캉첸중가는 아예 안 보이고, 저 아래로 얄룽 빙하가 끝나고 심부와 콜라가 시작되는 계곡이 내려다보였다.
향기로운 나무
하산길에서 고산지대 특유의 향긋한 풀 냄새가 났다. 이 향을 이번 트레킹 내내 맡았다. 음식에도 묻어있어 향신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개를 내려오며 작은 관목 나뭇잎을 따서 코에 가져가니 바로 그 향기였다. 파상에게 물으니 차와 향으로 쓰고 히말라야 외부 반출이 금지된 식물이라고 한다.
2시간 가까이 정신없이 하산하여 오후 1시 40분 체람(3870m) 도착. 위쪽 롯지는 만원이라 신축 중인 아래 롯지로 갔다. 기둥이 부실해 보인다. 주방은 임시 비닐 천막이고 식당도 없어 발코니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다행히 방은 좋다.
오후 2시 50분, 방에서 쉬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복도로 나가 보니, 롯지 앞 넓은 공터에 소들이 짐을 풀고 있다. 셀렐레 아래 롯지 마당에 텐트를 쳤던 미국팀이다. 한참 뒤에 도착한 미국 할배들은 롯지로 올라와 맥주 한 잔씩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고생했을 텐데도 즐거운 표정들이다.
저녁에는 포터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담소를 나눈다. 산에서는 이런 소소한 온기가 좋다. 밤에는 방 입구 식탁이 있는 찬바람 부는 복도에서 포터들이 자리를 깔고 잠을 잔다. 갑자기 스태프들이 많아지니 포터들이 잘 방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밍마도 거기에 있어 핫팩 하나를 건네주었다.♣
[요약]
● 추운 아침, 손 시린 기억: 셀렐레에서 영하의 추위 속에 출발, 장갑이 얇아 손이 곱아졌고 예전 토롱라 고갯길의 고통이 떠올랐다.
● 햇살과 자누 봉우리: 1시간 만에 해가 뜨며 손이 녹았고, 북동쪽으로 웅장한 자누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놓친 고양이 바위: 시니온라를 지나며 ‘고양이 바위’를 봤지만 위치를 몰라 그냥 지나쳤고, 나중에 사진 속에서 발견.
● 변덕스러운 날씨: 미르긴라에서 라라누들로 점심을 먹었다.
● 마지막 고개인 시네랍차: 구름이 몰려와 마지막 고개인 시네랍차라에서는 설산을 잘 보지 못했다.
● 향기로운 풀 냄새: 내리막길에서 향긋한 풀 향의 정체를 발견, 네팔 향료용 식물이라 설명 들음.
● 체람 도착: 체람에 도착해 나중에 온 미국팀 할배들과 인사. 롯지에서 쉬면서 밤에 포터들이 모닥불 피워 나누는 온기를 느꼈다.
짐을 꾸려 출발 준비를 하는 영국팀 포터들
엄청 추운 아침, 동쪽을 향해 가는 중. 해 뜨기 전 손이 곱아 아플 정도였다. 저 먼 앞산을 넘어가야 한다.
앞에 가고 있는 영국팀. 대피소 앞에서 휴식 중.
멀리 안부를 향해 오르는 트레커들
출발 1시간 후 대피소를 지나니 비로소 해가 비쳤다. 우리 뒤에 오는 트레커들도 많다.
곧 자누가 보였다. 이곳에서 보는 자누도 아름답다.
조금 당겨보고
좀 더 당겨보았다. 당연하지만 자누 베이스캠프에서 보이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참고] 자누 베이스캠프에서 보이는 자누 북서벽
자누를 배경으로 가이드 포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화기애애한 영국팀. 오른쪽 세 번째 남자가 리더 아저씨.
나도 한 장
파상도 한 장
오늘 첫 번째 고개 시니온라가 보인다.
오전 8시 35분 시니온라(4660m) 도착. 셀렐레에서 두 시간 걸렸다.
시니온라는 북동쪽의 자누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트레커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시니온라를 넘어 조금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길은 낙석지대를 건너는 등 조금 험해진다. 길 끝 '능선 박차'를 넘으면 캉첸중가의 명물 바위기둥이 왼편으로 보인다.
2023 Eco Odysseyss (아래 참고영상)
2024 Nicholas Eager (아래 참고영상)
나중에 확인해 보니 셀렐레라에서 찍은 사진에서 '고양이 바위'를 발견했다.
10시 10분 미르긴라(4675m) 도착. 천막찻집이 반갑다.
군사에서 체람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다섯 개의 고개 중 유일하게 팻말이 있다.
그것도 손팻말이다.
미르긴라에서 멀리 쿰부 히말이 잘 보인다. 가운데 피라미드 모양의 설산은 마칼루
고개에 올라왔으니...
찻집 내부에 식탁이 없다. 나는 햇볕이 좋은 바깥에서 라라누들수프를 먹었다.
오후 일정 고도표. 시네랍차라를 넘으면 체람까지 급경사 하산길이다.
10시 54분, 미르긴라를 떠나며 돌아보았다. 이때는 날씨가 좋았다.
15분 후 힘들게 너덜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
엄청난 바위덩어리길이다. 포터들도 힘들어 자주 쉰다.
미르긴라에서 1시간 걸려 11시 50분 마지막 고개 시네랍차라(4720m) 도착.
고개에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쉬고 있다.
마지막 고개 도착. 캉첸중가는 왼편에 있으나 보이지 않고 보이는 설산은 카브루 연봉.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5분 후에 도착한 러시아팀은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한 여성 트레커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가 BTS팬이라고 하면서 한 마디 한다.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고개를 넘어 내려오다가 아쉬움에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정신없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구름 때문에 위쪽 캉첸중가 연봉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아래로 얄룽 빙하가 끝나고 심부와 콜라가 시작되는 계곡이 보인다. 그 아래 체람이 있다.
맑은 날에는 이렇게 왼편 캉첸중가와 카브루 연봉, 그리고 얄룽 빙하가 잘 보인다. ( 2023 Eco Odysseyss 참고영상 캡쳐)
하산 50분 경과. 저 멀리 아래로 체람의 롯지 지붕이 보인다.
이번 캉첸중가 트레킹에서 항상 향기를 맡았다. 심지어 음식 먹을 때도 향을 느껴 무슨 향신료를 넣었다고 생각했다. 시네랍차라를 내려오면서 향이 더욱 강하길래 관목 잎을 하나 따서 맡아보니 바로 그 향이다. 4000미터 고산에 지천으로 나 있다. 파상에게 물어보니 나무 잎은 향신료로 쓰이며 히말라야 밖으로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향긋한 그 향을 잊지 못해 돌아와 인공지능인 Perplexity에 사진을 주고 물어 보았다.
사진 속 식물은 로도덴드론 안토포곤(Rhododendron anthopogon)으로 보입니다. 한국어로는 ‘안토포곤 철쭉’이라 부르기도 하며, 히말라야 고산지대(주로 네팔, 부탄, 티벳, 인도 북부) 해발 3,000~5,000m 지역에 자생하는 철쭉속 식물입니다.
특징은 키가 작고, 관목 형태로 잎은 작은 타원형이며, 잎 뒷면은 갈색 털이 있습니다. 꽃은 대개 연한 노란색이나 분홍빛을 띠며, 사진에서는 꽃이 지고 씨방이 남은 시점으로 보입니다. 향이 좋아 고산 지역에서는 차(tea)로도 즐기며, 불교에서는 향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관목형 랄리구라스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 National Biodiversity Centre Bhutan 페이스북)
체람에 접근 중. 체람은 지금 신축 롯지 건설에 한창이다. 점점 이곳을 찿는 트레커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오후 1시 40, 체람 도착. 위쪽 롯지는 방이 없어 아직 완성이 덜 된 아래 롯지에 짐을 풀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 기둥이 불안해 보인다. 주방도 임시로 만들었고(오른쪽 비닐지붕) 식당도 없어 발코니 식탁에서 먹는다. 밤에 입구 방 앞 복도(하얀 원)에 포터 대여섯 명이 이부자리를 깔고 잠을 잤다. 밍마도 거기에 끼어 있어 핫팩을 하나 주었다.
이층 롯지 전체가 나무라 사람이 지나가면 쿵쿵 울렸지만 방은 넓고 좋다.
오후 2시 50분,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 방 밖으로 나가보니 소들의 짐을 풀고 있다. 오늘 내가 왔던 험한 바위 너덜길과 급경사 내리막길을 소들이 짐을 싣고 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10명의 미국팀에 딸린 식구들이 많다.
개인 텐트와 식당 텐트 설치 후 3시 45분 미국팀 도착.
느지막하게 도착한 미국 할배들이 맥주 한 잔 하시는 중
힘들었을 텐데도 마냥 즐거운 할배들
포터들이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군사에서 체람까지. 두 번째 Sele la는 Sinion La임.
[참고영상] 셀레레 - 시니온라 - 미르긴라 - 시네랍차라 - 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