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의 유니온신학대학원 국제 컨퍼런스 강연문 전문
나의 불교수행, 화엄세계관과 생명평화운동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행동하자
(Live as a buddha, Act as a buddha, Right now!)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도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외떨어진 곳이기도 한 지리산 산골짝에 사는 제가 이곳 뉴욕의 한복판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강연을 하게 돼 참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불러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한 장의 부적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2009년 미국 그래픽디자인 연감’ (Graphis Design Annual 2009)의 맨 앞장 6쪽에 걸쳐 실려 있었는데,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라고 해도 심심산골 지리산에서 만든 이 부적은 처음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적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 원하는 것을 다 이뤄준다고 믿습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부적 역시 인류가 희망하는 삶을 실현해주는 신비한 힘으로 발휘되길 기대하며 설명 드릴까 합니다.
‘생명평화(Life-peace) 무늬’, ‘인드라망(Indra`s Net) 무늬’, ‘어울림 삶’이라고 불리는 이 부적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각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인 안상수 전 홍익대 교수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 교수가 생명평화 세계관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 부적 한 장 속에 제가 45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회의와 갈등, 방황과 모색을 통해서 정리한 세계관과 실천론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평화롭고 행복한가.’ 라는 단순하되 근본적이고, 오래됐으나 여전히 새로운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결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일 밑에 있는 게 지금 여기 각자 자신을 포함한 사람, 오른쪽이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은 새와 물고기, 사람의 머리 위쪽이 숲 그리고 해와 달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생명과 사물들이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과 달이 곡식과 나무를 키웁니다. 그것을 사람과 짐승들이 먹고 살아갑니다. 마치 연못과 연꽃처럼 서로의 생명을 낳고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밥 한 그릇, 굼벵이 한 마리도 모두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한 어머니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 생명은 내 안에, 네 생명은 네 안에 분리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관념일 뿐입니다. 생각, 말, 글로는 분리 독립된 존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 사실과 진실로는 있지 않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살도록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가 인류 역사의 많은 지성들에 의해 파악되고 제시된 보편적 세계관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결론입니다.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모든 존재들이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거룩하고 신비한 모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서로를 낳고 길러내는 신비와 기적의 존재, 아주 귀하고 고마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극 정성을 다하여 서로 잘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생명의 법칙과 질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 우리의 생명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게 됩니다. 모심과 섬김이 곧 불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 때 저절로 평화로워진다고 봅니다.
이 길은 유신론‧무신론, 관념론‧유물론, 진보론‧보수론, 보존론‧개발론 등 모든 벽을 넘어서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길입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천도교, 원불교, 동양철학, 현대과학 등의 벽을 넘어 우리 모두 함께 해야 할, 오래된 미래의 길입니다.
불교 역사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우주의 존재법칙인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붓다가 되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보면 지금 여기 생명평화 무늬로 표현되는 세계와 존재 외에 비로자나 부처님과 하느님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창조적이고 고맙고 신비한 존재인 모든 생명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이고 부처님입니다. 당연히 본래부터 붓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마치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 것처럼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이해를 위해 몇 가지 물음을 던져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도둑질을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도둑놈이 됩니다. 특별한 존재인 붓다는, 예수는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행위입니다. 누구이든 지금 당장 예수 행위, 붓다 행위를 하면 그가 바로 예수요, 붓다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설명을 행위로 직접 들어가므로 비약이 되고 관념적인 설명이 됨)
깨달음, 해탈, 열반, 그리고 붓다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저 멀리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어떤 목적지나 경지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고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시고 섬기면 그 자체가 붓다로 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습니다.
잠시 제가 생명평화 운동을 하게 된 과정과 동기를 설명 드리는 것이 생명평화 사상의 실체를 실감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1949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념 대립의 비극적 사건인 제주도 4.3 때 돌아가셨습니다. 열여덟 살 때 출가해 승려가 됐으며, 스무 살 무렵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에 직면해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무엇이며 왜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인가 하는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원초적인 회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의 고승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기도, 참선, 경전공부 등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도 죽음과 허무의 문제, 또는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원초적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한국 불교 주류의 길인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은둔적이고 정적인 수행을 20 여 년 동안 했지만 깊은 회의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번민의 나날 속에서 우연히 간디를 만났습니다. 언제나 혼탁한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정직하고 유쾌하고 헌신적인 그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간디에게서 붓다의 삶, 보살의 삶을 보았습니다. 간디라는 한 인간의 거울에 비추어 본 저의 삶은 한 마디로 가짜였습니다. 참선, 삼매, 수행, 깨달음, 해탈, 열반, 붓다라는 거룩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고에 빠져 헛꿈을 꾸고 으스대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화엄경을 만났습니다. 온 우주가 참여해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있는 생명의 존재법칙, 한 송이 꽃이 그대로 우주요 우주가 그대로 한 송이 꽃이 되는 그물과 그물코에 대해 눈 뜨게 됐습니다. 그 내용을 단순화시켜 보면 이렇습니다. 연기무아와 동체대비의 본래 부처행을 적재적소에 맞게 실천하는 것을 깨달음, 중도, 완성의 실천인 바라밀행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고 그 삶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가능하며,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찾는 해답과 희망의 꽃이 피어납니다. 저는 화엄경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와 믿음, 만인이 함께 가야 할 삶의 방향과 길을 발견하고 비로소 길고 긴 방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게 됐습니다.
제가 많은 시행착오를 무릅쓰고 집요하게 생명평화 무늬의 정신에 천착하는 까닭을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인류문명사는 어처구니없게도 야만적인 살상과 파괴로 얼룩졌습니다. 이를 웅변하듯이 20세기 100년 동안 퓰리처 상을 수상한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집의 한국판 제목이 <죽음으로 남긴 20세기 증언>입니다. 백 년 동안 이루어진 발전 과정과 결과를 한마디로 특징짓는다면 ‘죽임의 역사’인 것입니다.
국가, 민족, 종교, 이념, 자유, 정의, 평화 등 아무리 멋진 명분이라 하더라도 편 갈라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뺏고 빼앗기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삶과 역사라면 그것은 야만이고 비극입니다.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본 것처럼 반생명 비인간적인 비극의 악순환이 줄어들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전망도 우울합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럽게도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는 마지막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21세기 백 년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가 그렇다면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변화와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요? 왜 이렇게 됐으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인류가 직면한 물음의 해답을 찾는 일이야말로 불교를 비롯한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여러 형태의 방황과 모색을 통해 나름대로 찾아내고 정리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설명 드린 생명평화 무늬 부적입니다. 붓다, 예수, 간디가 걸어가신 이 부적의 정신으로 20세기의 병을 치유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으로 생명평화 살림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작은 몸짓으로 대한민국 전라북도의 깊은 산골에 있는 실상사에서 생태자립 마을공동체 운동을 벌였습니다. 범종교시민들이 이념, 계층, 종교, 지역 등 진영의 벽을 넘어 ‘좌우 대립 지리산 희생자를 위한 각 종교계의 백일기도와 합동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자연생태의 재앙을 몰고 온 현대문명의 위기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뜻으로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지리산 1000일 기도’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비폭력평화 행동으로 막아내고 21세기 새로운 대안문명인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가자는 취지로 <생명평화결사>를 만들었습니다. 결사의 취지에 따라 온 몸을 던져 비폭력 평화행동을 할 사람 10만인 조직을 위해 2004년 3월 1일부터 2008년 12월 14일까지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걷고 얻어 먹고 얻어 자고 만나고 대화하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했습니다. 5년간 대략 1만 여 km를 걸었고 8만 여 명을 만났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첨예한 갈등과 대립으로 서로의 가슴에 극단적인 불신과 분노, 불안과 공포를 생산하는 현장인 천성산 터널, 새만금 개발, 봉은사 분규, 4대강 개발, 쌍용자동차 및 한진중공업 대량 해고, 제주해군기지 건설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관련 당사자들의 대화 테이블을 만들어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종교갈등을 넘어 종교평화의 길을 열어가고자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을 발표했는데 사회적으로는 큰 공감과 호응을 받았지만 불교계 자체적으로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 아직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생명평화 무늬의 정신에 의한 수행인 본래 부처와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한국 사회와 민족사회와 인류사회의 문제를 대안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는데 불교가 앞장서야 마땅하다는 믿음으로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한 ‘생명평화 1000일 정진’ ‘노동자 초청 무차대회’ ‘사부대중 야단법석’ 등 불교 본연의 역할을 하기 위한 몇 가지 모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 국가, 불교와 기독교, 진보와 보수, 개발과 보존 등을 명분으로 편갈라 극단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관성적으로 편갈라 싸우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우리의 바람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의 공통적인 염원은 현실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잘 짚어보면 심층의 자리에 인류 문명을 지배해온 존재법칙에 어긋나는 실체론적, 이원론적 세계관의 함정이 있습니다. 또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절실하고 중요한 가치인 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관념에 사로잡힌 병이 있습니다.
인류문명사를 성찰적으로 살펴볼 때 존재법칙에 어긋나고 생명가치를 망각한 채 상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증오와 공포의 마음으로 온갖 그럴듯한 명분으로 편가르고 싸우고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의 그 어떤 길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내와 관용과 비폭력 평화의 마음으로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몸 한 생명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명평화무늬의 길입니다.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염원이며 21세기 시대정신입니다. 우리 종교가 나서서 실현해야 할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는 바로 ‘지구촌 생명평화 공동체’입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 비로소 종교가 종교다워집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인류의 지성들이 제시한 옛길이요 오늘의 길이요 미래의 길이며 너와 나와 우리의 길인 ‘생명평화 무늬’ 부적에 담긴 보편적 세계관과 정신과 실천의 교훈을 주목해주십시오. 끝으로 생명평화 무늬의 이론적 토대인 <생명평화경>과 그 세계관의 정신을 일상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백 가지 문장으로 나누어 만든 <생명평화백대서원 절명상>을 소개하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
기사승인 2015.01.20 13:06:07
-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며 사는 삶이 곧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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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은 “삶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 수행, 붓다로 가는 길”이라며 “깨달으면, 그리고 붓다가 되면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
우리는 일 년 단위로, 한 달 단위로, 하루 단위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매 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어느 순간이고 처음이 아닐 때가 없고 마지막이 아닐 때가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해집니다. 매순간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면 지루하고 따분할 일이 없습니다. “또 이 사람이야” “또 이 일이야” 하면서 불평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달라집니다. 우리 몸에서는 끝없이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생각도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100년 만나도 볼 때마다 항상 처음입니다. 순간순간 매일매일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지식 쌓는 것이 공부 아니라
불교적으로 사는 것이 공부
어리석어 모르면 업보 중생
진리를 알고나면 모두 붓다
붓다로 사는 것이 불자의 삶
그 서원을 결코 잊지 말아야
그런데 우리는 실제를 보고도 실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으로 상대편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 아님을 모릅니다. 우리가 80세를 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80세가 돼야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죽었습니다. 매 순간 변하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이 처음이고 끝입니다.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냇가에 가면 어떻습니까. 물이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는 한복판에 서서 내가 한 지점을 보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물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지점을 통과하는 물은 매순간 새로운 물입니다. 냇가의 물이 항상 그 물 같은데 실제로는 항상 새로운 물입니다. 흐르는 물은 시작이면서도 동시에 마지막입니다. 우리 또한 항상 새롭게 사람을 만납니다. 어제의 사람을 오늘 만났더라도 그 사람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고 있는 나도 변했습니다. 10년 전부터 본 사람이라도 오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그 사람이 10년 전에 봤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일 뿐입니다.
실상을 알게 되면 과거의 일로 사람을 대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본 사람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내일 보게 되더라도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마음, 성 내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인데 어떻게 미운 마음, 성 내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오히려 반가움과 살가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는 것을 불교공부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공부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실질적으로 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실천이 없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만이 쌓일 뿐입니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무아(無我)가 있습니다. 불교계에는 무아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무아의 삶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무아적 삶은 무엇일까요. 무아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성, 또는 자기중심의 이익이 없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됐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무아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배웠으니까 무아를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실천은 없습니다. 행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걸 보통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합니다. 불교를 아무리 많이 알고 지식을 산처럼 쌓아도 대부분 유명무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불교는 유명유실(有名有實)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알면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 교리적인 지식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연기(緣起)도 무아(無我)도 공(空)도 몰라도 관계없습니다. 실제 살아가는 삶이 불교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붓다로 살자 모임을 갖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붓다로 사는 것일까요. 붓다로 살자 발원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라네.”
우리 모두 ‘붓다로 살자’를 결사 하려면 이 부분이 명확해져야 합니다. 이 부분이 확연하게 와 닿지 않으면 올바른 불자의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첫 머리의 “신기하고 신기하다”는 것은 감탄사입니다. “어리석음으로 실상을 모르고 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그대로 부처로구나”하는 탄복입니다. 그런데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내가 그대로 부처로구나 하는 의미가 알음알이가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돼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닌 거짓말이 될 뿐입니다. 말만 있고 실제가 없는 것을 불교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전도몽상(轉倒夢想)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말씀이라도 실제와 직결시켜봐야 합니다. 불교는 생각하지 말고 글로 하지 말고 실제로 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그렇다면 ‘붓다’의 뜻은 무엇일까요. 붓다는 깨달은 사람, 깨달을 수 있는 분, 완성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알고 믿고 그렇게 사는 것하고, 부처라고 알고 믿고 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자는 붓다가 되는 것이 목적인 사람입니다. 붓다가 되면 행복해집니다. 깨달으면 행복해집니다. 결국은 삶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붓다로 가는 길입니다.
불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참선이나 절입니다. 무엇 때문에 참선을 하고 절을 합니까. 붓다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이라면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참선이나 염불이나 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실천과 활동이 바로 수행입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을 만나면 물어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그러면 모두들 당황해 합니다.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왜’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인데 무슨 이유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 건지 의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내 삶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나에게 욕했지만 나는 상냥하게 대하겠다. 저 사람이 거짓말했지만 나는 진실 되게 대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한 내 삶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연기(緣起)법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가 인연 맺고 있으며 이어져 있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상대편이 욕을 했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르면 더욱 큰 폭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이 진리임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편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관계없이 선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삶의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붓다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명상이든 수행이든 삶과 분리돼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은 삶 속에서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어디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은 우리의 삶 속에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삶 속에서 완성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이뤄집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뤄지기에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는 만큼 이뤄집니다. 우리가 붓다라는데 과연 그럴까. 또는 붓다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의심에 찬 마음으로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불교라고 하면 교리공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붓다로 살자’는 이론이나 실제적 삶을 붓다로 살자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곧 붓다입니다.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한 것입니다. 잘 몰랐을 때는 업보중생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신기하게도 내가 붓다였구나, 이런 감탄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불자의 삶은 붓다로 살자가 답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붓다로 살자’라는 결사의 첫 관문입니다. 우리 모두 붓다라는 것을 확신하고 함께 붓다로 살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정리=신용훈 전북주재기자 boori13@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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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현기자 momojh89@gmail.com 기사 게재일 :2014년 01월 27일 |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 스님)가 결사 3주년을 맞아 ‘붓다로 살자’를 슬로건으로 각개 사찰과 신도가 주체인 결사운동을 추진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특히 한반도 생명평화 공동체를 위한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를 통한 사부대중의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지만,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과 진행 방식은 이르면 2월경에야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는 27일 결사 3주년 기념법회에서 '붓다로 살자'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승 스님 “34대 집행부, 사찰과 함께 사회속으로” 결사추진본부는 1월 27일 오전 11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자성과 쇄신 결사 3주년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결사추진본부장 도법스님은 한 결 같이 대중 속에서 실현되는 결사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각 사찰과 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자승 스님은 먼저 “처음 결사를 제안할 당시 형식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닌지 지속적 여부에 우려와 불신이 있었지만 사회 갈등 해소와 각종 쇄신입법과 4대 분야 10대 과제라는 종단의 쇄신안을 마련하는 등 여러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고 결사추진본부의 업적을 치하했다. 이어 “이제는 교구와 사찰 그리고 스님과 신도가 함께 주인이 되어 정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라며 “34대 집행부에서도 결사는 ‘사찰과 함께 사회 속으로’라는 확고한 기조로 실현해 나갈 것이며, ‘붓다로 살자’라는 실천의지를 통해서 결사추진본부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종무기관과 사부대중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도법 스님 “화쟁 순례 통해 ‘붓다로 살자’ 생활화” 앞서 도법 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결사3년의 최대 성과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붓다로 살자’라는 옥동자를 탄생시킨 것”이라며 “지난 3년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씨 뿌리는 세월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새싹을 거목으로 가꾸어 내는 막중한 일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도법 스님은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이었던 지난해 불교인들이 나서서 평화의 미래로 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화쟁 100일 순례’를 계획했고 올 3월 3일부터 화쟁 순례를 시작하려고 한다. 화쟁 순례는 ‘붓다로 살자’를 생활화, 대중화, 사회화하는 큰 걸음이며 결사가 대중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걸음이기도 하다. 사부대중 모두 함께 발심하고 원을 세워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기념법회에 참석한 조계종 3원장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사부대중은 마지막으로 “온 세상이 평화공동체가 되는 그날까지 붓다로 살기 위해 쉼 없이 정진하고자 하오니, 굳은 서원이 이뤄지도록 지켜달라”고 부처님 전에 발원했다.
결사추진본부, 천일정진 회향하며 대중운동 전개 붓다로살자·화쟁순례, 구체적 내용은 2월중 발표 한편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 총괄부장 덕산 스님은 같은 날 오후 2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결사추진본부의 2014년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결사추진본부는 지난 3년간 자성과 쇄신 및 결사를 통해 이슈를 도출하고 내용을 마련하는데 진전이 있었으나 결사대중의 조직화와 주체 역량의 결집 측면에서는 한계를 노출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올 한 해 ▲청규제정과 사부대중 ‘의식개혁 운동 교재’ 개발 ▲종교평화선언 재추진 ▲결사 대중화를 위한 ‘붓다로 살자’ 운동 전개 ▲사회 현안에 대한 화쟁활동 및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 지원 ▲생명평화 1000일 정진 회향 등의 사업을 꾸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눈길을 끈 ‘붓다로 살자’ 운동은 12월 22일 회향하는 생명평화 1000일 정진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기획됐고, 교구본사 및 각개사찰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수행과 보살행 실천 운동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총괄부장 덕산 스님은 “교계 NGO 단체가 하고 있는 걷기운동과는 무관하며, 올해 말 5대 결사 1000일 기도를 회향하는 시점에서 결사의 의미를 승화시켜 대승활동을 전개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붓다로살자 기획소위원회는 2월 중 공식입장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남남갈등 해소와 사회통합을 위한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는 총무원 사회부와 공동으로 추진한다. 3월 3일 제주도 한라산에서 입재를 시작으로 100일간 전국 14개 지역을 순례하고, 6월 10일 서울에서 회향하는 일정으로 짜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은 결사추진본부장 도법 스님,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지홍 스님, 총무원 사회부장 보화 스님 등을 중심으로 한 공동추진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며, 2월 20일 선언식에서 공식화될 것으로 보인다. ‘의식개혁 운동교재’는 동안거 해제를 전후로 한 1사분기 이내로 공식화되며, 종교평화선언은 종정과 원로의원을 비롯한 관련 단체의 의견수렴을 거쳐 오는 9월 채택 및 발표될 예정이다. 결사추진본부는 이밖에도 권역·본사별 대중공사와 사부대중 야단법석, 대한민국 야단법석, 무차대회 등을 계속사업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
"본래부처다"라는 말의 허와실
도법스님이 말하는 ‘본래부처’를 중심으로
A. ‘본래부처’니까 당장 ‘붓다로 살자’
최고의 존재= 천상천하유아독존 =사람이 본래부처=화엄경 사상
예) 거짓말하면= 즉각 거짓말쟁이가 된다.
고귀하게 말하면=즉각 고귀한 사람이 된다.
평화롭게 말하면=즉각 평화로운 사람이 된다.
마음먹은 대로 즉각 이루어진다. 이것이 도법스님이 방황과 좌절을 겪으며 참선, 기도, 염불등을 해 본 결과 새로 찾은 불교다. ‘붓다로 살자’는 이것은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있다.
B. 본래부처니까 당장 부처로 살기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야한다.
어떻게 하면 고귀하게 말할까?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말할까? 라고 생각하며 대화해야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쉽게 안 된다. 무루익어지면 절로 절로 콩나물에 물주는 것처럼 하고 또 하고 계속해서 해야 한다. 죽기 살기로 해야한다. 이게 불교다.
문제점: A와 B처럼 도법스님은 ‘붓다로 살자’라고 말하며 때로는 ‘즉각적이다’고 하고 때로는 ‘꾸준히 노력해야한다’고도한다. ‘거짓말하면 즉각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비유가 ‘즉각 붓다로 살게된다’는 것의 설명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의 비유등 다른 비유도 적절치 않다. 결과적으로 도법스님의 ‘붓다로 살자’는 “부처님 뜻에 따라 살자”는 이야기 일뿐 대승의 특별한 사상이라고 볼 수도 없다.
1.이 말의 출처: 중생이 부처다 :<60화엄경> 제10권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2.의도: 깨달음의 관점에서 설명, 대승이 발전하게 된 시대상황, 수많은 보살들이 출현하여 타력불교가 성행하고 믿음이 강조되는 시기
3.장점: 진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대승의 언어, 믿음과 자신감을 준다. 불교가 쉽게 느껴진다.
4.단점: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아 사유가 관념화 되고 다양한 실천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이라는 말과 쉽게 연결되며 믿음의 영역으로 가게한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처럼 맹목이 된다.
첫댓글 이 질문은 다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언어 차이를 공부하게 할것입니다. 언어가 중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