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에 몸에서 비늘이 생길 지경이었는데 오랜만에 해가 나고 하늘이 열렸습니다. 산이 가까이 있으니 해가 지면 금세 시원한 바람이 산에서 내려옵니다. 상촌초등학교 앞 논에는 어느새 훌쩍 자란 벼들이 기분 좋게 바람을 맞고 있네요. 그 옆 텃밭은 사정이 좋질 않군요. 상추는 다 녹아 내렸고 땅에 비닐을 씌우지 않은 밭의 고추들은 어째 비실비실해 진 것 같습니다.
농사에 ‘ㄴ’도 모르는 이가 이곳에 이사와 이웃들 텃밭을 기웃거리며 여러 해 푸성귀를 얻어먹었습니다. 볍씨를 틔워 모를 심고, 김을 매고, 태풍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 기어이 가을볕에 벼가 익어가게 애쓰는 농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 입에 들어가는 밥을 씹는 것도 귀찮아 할 만큼 게으른 사람이라 한 번도 땅을 일궈 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때’를 맞춰 심고 수확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일기예보를 듣지 않고도 ‘때’를 아는 농부의 마음을 잘 나타낸 책이 있어 소개합니다.
≪나는 농부란다≫/이윤엽 쓰고 그림/사계절
수원에서 태어나 노는 게 삶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을 ‘완벽한 시간’이었다고 기억하는 이윤엽 작가의 그림책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판화에 많이 담아내는 작가이고 지금은 안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농사를 짓고 있기도 해서인지 그림이 아주 구체적이고 구성도 재미있습니다. 10쪽에 나와 있는 할머니는 결전을 앞둔 파이터처럼 화려한 ‘몸빼’바지를 입고 호미와 낫을 두 손에 꽉 쥔 채 우뚝 서 계십니다. 그런데 토시는 짝짝이고 가수 싸이와 비슷한 썬글라스를 쓰고 계시네요. 땅을 일구는 일이 힘들고 고되기만 한 게 아니라 설레기도 하다는 말이 썬글라스 할머니의 자세에서 느껴집니다. 마치 “덤벼 봐! 내가 다 키워 주겠어!” 하는 것처럼 말이죠. 26쪽 “장딴지에 힘 있을 때 일해, 이것들아.” 하고 외치는 농부의 목소리는 딴딴한 장딴지 근육처럼 곧게 파 낸 글씨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글씨만 봐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쩌렁쩌렁합니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어디서 오는 지 잘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림 곳곳에 숨어 있는 작가의 장난기가 딱딱할 수도 있는 내용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우리 동네 논과 밭을 사계절 둘러본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데지마 게이자부로 지음/보림
이윤엽 작가처럼 목판화 작업을 하는 일본 작가인데 고향인 홋카이도의 자연과 동물을 목판화로 표현한 그림책을 많이 펴냈습니다. 여우는 배가 고픕니다. 차갑게 얼어버린 숲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앗, 토끼 발자국이 보이네요. 하지만 언덕 꼭대기에서 토끼는 사라져 버립니다. 배고픔에 지쳐 헛것이 보이는 걸까요? 숲 가운데에 엄마여우와 아기여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공기까지도 꽝꽝 얼어붙은 겨울 숲은 신비롭습니다. 여우는 즐겁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차갑고 맑은 겨울 숲의 풍광이 굵고 힘 있는 선과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된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우와 함께 다른 나라의 겨울 숲에 머물다 보면 습하고 더운 날씨에 지친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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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이
(사)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
엘지빌리지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