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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9일(금)
* 시작 기도
주님...
해 아래(만물 안)에서 무언가 이루어보려고 모든 것이 헛될 뿐임을 경험으로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여,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속히 깨달아 알아서 주님이 계신 거할 성읍에 들어가게 하소서.
만물 안의 것을 속히 내려놓을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진리를 알고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진 무덤의 성소에서 주님과 더 깊은 말씀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세상에 속한 정욕과 탐욕 자기주장의지 등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내가 거하는 이 자리가 주님의 품이요 거할 성읍이게 하소서.
오늘부터 난생 처음 전도서를 묵상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1:1-11
제목 :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자,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알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 나의 묵상
성경 전도서는 구약성경 중 지혜서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스스로 삶을 돌이켜볼 수 있으므로 그가 살아온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는 노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륜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교훈한다.
1장 1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로 밝히는데 그가 곧 솔로몬으로 본다.
전도자는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며 구약성경에서 전도서의 명칭이다.
코헬렛은 사람들의 ‘모임’과 관련되어 있으며(출 16:3; 민 16:3),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연설하는 자’란 뜻이다.
그래서 코헬렛은 ‘전도서’의 명칭이며 동시에 저자인 ‘전도자’를 칭한다.
전도서 12장 9-10절에서는 코헬렛 자신의 직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혜를 탐구하고 경구를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록하는 일이다.
한편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전도서(코헬렛)를 헬라어 ‘에클레시아’(모임)에서 파생된 ‘에클레시아스테스’로 불렀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 전도서는 헬라어의 음역인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로 부른다.
한편 신약시대 ‘에클레시아’는 모임을 의미하는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지혜란 삶에 관한 지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서 제시되는 훈계는 주변 세계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인 지혜는 계몽적인 범주 안에서 제시되며 일정한 인과법칙을 따른다.
특히 잠언서가 그러한데, 잠언의 지혜에 있어 교만한 자는 망하고 어리석은 자는 가난하다.
겸손한 자는 부귀를 차지하고 부지런한 자는 성공한다.
이러한 지혜는 만물의 법칙을 따르듯 그 법칙을 따르면 윤택한 생애를 보상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코헬렛은 일반적인 지혜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지혜를 탐구하고 해 아래(만물 안)에서 일어난 일을 탐지하는 것은 결국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코헬렛은 세상과 세상의 지혜에 대해 무익하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그런 지혜로 얻은 인간의 공적은 허무하고 그로 인한 인간의 자랑은 거짓된 것임을 폭로한다.
그는 그런 인생들과 투쟁하는 자이며, 궁극적인 실재이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게 한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제시함으로써 경전의 가치를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신앙이란 인생을 ‘해 아래’(만물 안)에 가두어버리는 거짓된 환영(幻影)과 결별함으로써 주어진다.
이 점에서 전도서는 인생의 의미가 성공과 풍요, 자랑이 전부라고 속이는 거짓 교설에 대한 이별의 눈물과도 같다.
그래서 전도서는 번영신학에 물들어 이생의 성공과 풍요, 자랑을 쫓아가는 신자들에게는 맥 빠지게 만드는 성경이다.
하지만 참된 신앙을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복음이다.
그들의 속 깊은 물음, 영적인 번민을 대변하며 그들을 참된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만물 안에 갇힌 인생을 만물 위의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모든 구약성경이 그러하듯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전도서는 ‘무의미’로 시작하지만(1:2), ‘참된 의미’로 끝난다(12:13).
그렇다! 만물 안에 속한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런 인생이 만물 위의 하나님을 만나면 비로소 충만해진다.
코헬렛(전도자)은 말한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2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3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늘 그대로였다(4절).
해는 떴다가 지고 그 본래의 장소로 헐떡이면서 가서 거기서 다시 떠오른다(5절).
바람은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돌아오고 늘 돌아왔다 돌아가며 돌아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6절).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도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다. 그곳에서 강물은 사라져서 늘 그곳으로 간다(7절).
4절에 이어 전도자는 다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한다(8-11절).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않는다(8절).
모든 말들은 피곤하게 하며 아무도 (모든 말을) 다 할 수 없다. 눈은 다 볼 수 없고 귀는 다 들을 수 없다(8절, 원문직역).
끝이 없는 말, 보아도 족함이 없는 눈, 들어도 알 수 없는 인생들, 그래서 그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9절).
그러나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으니, 과거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게 되고 과거에 행해졌던 일이 다시 행하여진다(9절).
누가 ‘여기 새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이다(10절).
다만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에 새 것으로 비친 것뿐이다(10절).
이전 사람들은 기억에서 사라지며, 장차 태어날 사람들 역시 기억에서 사라진다(11절).
일반적인 지혜에서는 죽음후의 명성이 가치 있는 것으로 칭송된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것조차도 무용하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말한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
해 아래는 ‘만물 안의 세계’이다.
그리고 만물 안의 역사는 반복된다.
해 아래에 속한 인생, 그 끝은 공허와 무의미와 절망이다.
누구라도 만물 안에 갇힌 인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말을 많이 해도, 많이 보아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만족이 없다.
그래서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 것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새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은 다 옛 것이다.
다만 잊어버린 것을 새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만물 안에 속한 인생, 새 것을 찾아 유리방황하나 그 영혼이 피곤한 채 안식이 없다.
(시 107:4-5)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다.
(사 43:19a)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영원에 계신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들, 그 영혼이 피곤한 영혼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신 구원이다.
(시 107:7-9)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영원’은 하나님의 세계이며 시간(크로노스)의 변화에 굴복되지 않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만물 안에 속한 모든 것은 시간의 변화에 굴복되어 쇠락의 법칙, 무상성(無常性)의 법칙을 따른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
그러나 만물 위, 영원의 세계에 실재하는 것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는 항상성(恒常性성)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새 일’은 오직 만물 위, 영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새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영원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만물 안에 속한 옛 일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이전 일(옛 일)을 기억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사 43:18).
새 일은 하늘(영원)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대망한다(요 3:13).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 옛 사람은 죽었고 지나갔다.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존재, 새 생명이 태어난다.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영원’이다.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생명, 곧 영생이다.
그리고 영생의 삶은 만물 안의 인생과 신앙이 종결된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영생은 옛 사람으로 점철된 과거를 부정하는 힘이다.
날마다 생명으로 사는 삶은 옛 사람을 부정하고 몰수하는 실제적인 힘으로 역사한다.
그 힘은 옛 사람으로 인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기억을 깨트리며 소멸시킨다.
그래서 용서란 새 일이 왔기 때문에 옛 일을 과거 속으로 내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영원을 현재로 사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거하여 옛 일을 무력화시키며 만물 위에 속한 자원으로 살아간다.
곧 다함이 없는 사랑(고전 13:8), 항상 누리는 기쁨(살전 5:16),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요 14:27)이 그의 현존 안에 있다.
난생 처음으로 전도서를 묵상한다.
나는 잠언을 비롯한 전도서는 극히 인생의 삶에 지혜를 가져다주는 책으로만 이해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전도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며 또한 묵상을 하려니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제 전도서의 시작이지만 코헬렛 곧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는 나의 모든 선입견을 무너뜨린다.
이생의 성공과 명예 그리고 풍요와 안락을 위하여 살아온 나의 삶의 기준을 완전히 박살내고 만다.
전도자가 묻는 질문은 저만치 던져버리고 그저 어느 훌륭한 위인이 하는 이야기쯤으로 흘려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까지도 만물 안의 신으로 전락시킨 자였다.
잠시 머물다가 갈 이 세상 곧 만물 안의 세계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고자 몸부림을 치며 애쓰고 또 애썼다.
그런 나는 결국 그러한 일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몸소 실감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애쓰며 힘써 노력하여 쌓아올린 모든 사역의 기둥이 정말이지 처절하게 무너짐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과연 전도자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쌓아올렸던 성벽은 무너져야만 하는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불신과 탐욕 그리고 순전히 나의 정욕으로 쌓아올린 바벨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그 성은 무너지는 것이 공의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짐을 당하고 나니 하나님의 심판이 옳습니다, 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 무너진 무덤의 자리에서 우리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세워주신 성전을 나의 성전 삼고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를 한다.
나는 이 교제가 우리 주님과의 사랑의 나눔이요 또한 아는 것(야다)의 실재임을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의 그 생명으로 오늘 하루도 넉넉히 살아갈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자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폭로되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였고 알 수도 없는 미말에 속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요 미말에 두셔서 세계와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자입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내가 이렇게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살아났으니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남은 인생을 주를 위하여 살기 원합니다.
하오나 주님의 생명을 받은 자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연약하여 잘 넘어지고 깨집니다.
이런 나는 오직 예수가 필요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께서 이런 나에게 하늘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내일도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오니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받아주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