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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0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주일을 앞둔 준비일이오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잘 계수하게 하소서.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는 하노이 신학교 학생들을 만납니다.
이들과 함께 만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때 성령께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나를 덮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1:12-18
제목 : 구부러진 인생을 창세전 언약 안에 있는 복음으로 고침을 받다.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 나의 묵상
코헬렛(전도자)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는 지혜를 탐구하고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구하고 살폈다.
이것은 괴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워주신 무거운 짐이다.
그가 지혜를 다하여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니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할 수 없고 없는 것은 셀 수가 없다.
전도자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왕노릇한 사람 중 누구보다 나아 지혜와 지식을 다 깨우쳤다.
그래서 지혜가 무엇이며 미친 것과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인 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도 많고, 지식을 쌓으면 그만큼 고통도 늘어나기 때문이다(18절).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한다.
이스라엘에서 솔로몬은 지혜를 대표하는 위대한 왕이다.
(왕상 4:29-3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코헬렛은 고대 지혜서의 전승대로 자기 독백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지혜자 솔로몬은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지혜로 포착하고자 지혜를 탐구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지혜의 추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짐으로써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전도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자기 자신에게 기초를 둔 자율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 기초한 삶으로 여기고 있다.
전도자가 보기에 인생에 대해 지혜를 묻는 비판적인 질문들은 인간의 재량권에 맡겨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당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을 비판적으로 묻고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참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살펴보고자 애썼다.
그런데 이것도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어떤 지혜도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할 수 없고, 없는 것을 셀 수 없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것을 펼 수 없고 없는 것을 셀 수야 없지 않은가’ 이 말은 당시의 속담이다.
전도자는 지혜를 다 알고자 하여 그것을 탐구했으나, 그런 지혜가 구부림을 절대 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과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온갖 시도도,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셀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온갖 노력 역시 확고하게 짜여진 세상사(世上事) 앞에서는 좌절하고 만다는 것이다.
코헬렛은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말한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예루살렘을 다스린 어떤 왕보다 큰 지혜를 얻었다.
그 스스로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도 헛되어 도리어 지혜가 많을수록 괴로움이 커지고 지식이 많을수록 고통이 온다.
일반적인 지혜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헬렛은 도리어 지혜와 지식이 괴로움을 더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삶을 지혜롭게 영위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서, 만물이 비밀에 가득 찬 조직으로 짜여 있다는 사실에 부딪치고 만다.
더 나은 지혜로 이런 비밀을 파헤치려고 할수록 고통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어떤 지혜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딜레마, 거기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인생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
참된 인생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저버린 이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짐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궁극적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질문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질문할 수 있으나 궁극적 대답은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궁극적 대답은 궁극적 실재이신 만물 위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해 아래 곧 만물 안에 속한 인간은 질문을 하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다.
다만 질문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해 아래, 만물 안의 지혜는 그 결국이 고통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지혜로도 구부러진 것을 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세상의 구조 자체가 참된 인간의 길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 아래의 지혜, 그 끝자락에 좌절과 고통이 더해진다.
그런데 참된 지혜가 있다.
그것은 구부러진 것을 펴는 지혜이며, 이는 만물 위 곧 하늘에 속한 지혜이다.
이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고전 2:7-8)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지혜는 창세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의 생명을 주시는 지혜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다시 말해 만물 위에 속한 지혜는 아들 안의 생명, 영생을 주시는 참된 지혜인 것이다.
(고전 1:22-23a)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해 아래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그리스도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창세전 약속된 생명을 주실 수 있으며, 이는 창세전 미리 정하신 뜻이기 때문이다(딛 1:2; 벧전 1:20).
세상의 어떤 지혜로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날 때부터 구부러진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완전한 지혜나 지식이라도 그것이 구부러진 인생을 펴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한 길, 만물 위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만이 새 생명을 주어 사람을 바꾸며 구부러진 인생을 펴신다.
사도 바울은 이 지혜를 알고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전하게 하였다고 고백한다.
(엡 3:6-9)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곧 영원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인 영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엡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외친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구부러진 인생, 파괴된 인생, 사망의 인생이 새롭게 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태어나 그 생명으로 사는 것뿐이다.
나의 인생은 구부러진 인생이요 파괴된 인생이며 사망의 인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으로 태어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자이다.
이런 나는 하는 것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도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학교에 들어갔다.
대학교와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단순히 학력을 취득하고자 하는 나의 역기능적인 노력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다가 직장을 다니면서 결혼을 했고 학원 사업을 하다가 신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신학의 동기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아서 목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근본적인 근거이다.
이렇게 목사가 되고난 후에 힘에 지나도록 열심을 다하여 사역을 하였다.
그런 열심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내 안에 타오르는 열정은 주를 위한 진정한 열심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열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내 안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자기주장의지이며 선악과를 먹은 아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신학의 시작부터 구부러진 자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렇게 교회가 성장궤도에 들어섰을 때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문제, 담임목사인 나와 장로 사이에 불거지는 다툼 등 걷잡을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갔다.
이런 일들을 대화로 풀어보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 당시에 하늘에 속한 복음을 듣게 되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동안 땅에 속한 것들만 추구하던 나에게 하늘의 생수가 부어졌다.
그 생수를 마시며 날마다 위로부터 나리는 은혜의 소낙비로 나의 심령을 적셨다.
주께서 주시는 그 생수를 지금도 마시고 있다.
나는 이 생수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오늘 하루도 살기 위하여 먼저 은혜의 생수요 말씀의 생수를 마신다.
물론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나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목회를 그만두고 나와서 지금은 베트남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맡아서 정말 행복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복음이 구부러진 나의 인생을 바르게 펴주었다.
이제는 이 복음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자각하며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나의 남은 인생을 살고자 한다.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자이기에 예수가 없으면 나는 죽은 자이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을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 낸 우상 정도로 믿어왔던 극히 연약한 자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목이 터져라 부르짖으며 기도하여 나의 필요를 얻어내려고 했던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믿지 못하고 세상에 널리고 널린 우상에 우상 하나를 더 얹어놓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는 제법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하나님의 뜻도 모른 채 그저 나 좋은 것만 선택하는 악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지옥에 보내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을진대,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고난을 통해서 무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무덤이 나의 성소요 다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부활의 산실이었음을 믿습니다.
이렇게 구부러진 인생, 해 아래 곧 만물 안에서는 어디에서나 무엇으로도 펼 수 없으나 오직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만 개의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으로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겠습니다.
오늘도 이 작은 입을 크게 벌려 주를 찬양합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