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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 집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나이다(왕상 8:1-11)
1. 오늘의 말씀 : 왕상 8:1-11
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3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4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5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그와 함께 그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6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7 그룹들이 그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8 채가 길므로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거하나이다(전 5:2).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리까? 하늘 아래 사람은 실로 어두운 곳에서 먹으며 근심과 질병과 분노로 일생을 보냅니다(전 5:17). 하늘 아래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하늘에서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늘에 속한 영생을 주셨나이다. 이 생명으로 살고 이 생명을 전하는 자는 고난을 받으나 부끄럽지 않은 것은 이 일을 위탁하신 주께서 끝날까지 지키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딤후 1:12). 오늘도 이 믿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열왕기상 5-7장에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완성하였다. 8장에서 솔로몬은 성전 봉헌 예배를 드리고, 9장에서 하나님이 봉헌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하신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예배는 언약궤를 지성소 안에 들여놓는 일(1-11절)을 시작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12-21절)와 봉헌 기도(22-53절)를 드리고, 이어서 백성들을 위해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그들에게 권면한다(54-61절). 봉헌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서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를 드린다(62-66절).
솔로몬의 성전 봉헌 예배는 그 핵심이 하나님의 임재 사상이다. 특히 솔로몬의 봉헌 기도와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 백성의 삶과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여준다.
1-11절,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필요한 기구를 제작한 후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한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시온 곧 ‘다윗성’에서 성전으로 옮기려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각 가문의 대표인 온 지파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았다(1절).
시온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여부스 사람이 살던 예루살렘을 말하며, 그가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고 다윗성으로 불렀다(삼하 5:6-7). 다윗성은 성전의 남쪽,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솔로몬이 언약궤를 다윗성에서 메어오게 한 것은, 성전과 솔로몬의 왕궁이 다윗이 거하던 곳과 떨어져 있음을 밝혀 준다.
솔로몬이 언약궤를 옮겨오는 일은 온 백성을 위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여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각 가문의 대표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다(1절). 그뿐만 아니라 그 시기도 7월 절기(장막절)에 맞추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곱째 달, 곧 에다님월의 절기에 솔로몬 왕 앞으로 모였다(2절). 성전의 준공은 솔로몬의 재위 11년 불월, 곧 8월이었다(6:38). 성전 봉헌은 에다님월, 곧 7월 절기에 거행되었다. 대부분 학자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때가 성전을 완공한 이듬해 7월, 곧 11개월 이후라고 추정한다(이형원). 즉, 성전이 완공된 후 1년 가까이 봉헌 제사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한 후 이스라엘 월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7월에 봉헌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6:38의 성전 건축의 완공은 성전 제의 기능에 필수적이지 않은 기구나 부속물까지 완성된 때이기에 그보다 한 달 전인 당해 7월에 봉헌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그레이). 물론 연대기의 정확성보다 중요한 것은, 성전 봉헌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이자 제사장들이 궤를 메어 옮겼다(3절). 율법에서 언약궤는 오직 레위인이 메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10:8).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구를 모두 옮겨 왔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날랐다(4절).
이전에 다윗이 오벧에돔에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면서 맨 먼저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었다(삼하 12-13장). 솔로몬 역시 그러하였다. 왕과 왕 앞에 모인 온 이스라엘 회중이 왕과 함께 궤 앞에서, 양과 소를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잡아서 제물로 바쳤다(5절).
마침내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제자리, 곧 성전의 내소(지성소)의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안치하였다(6절). 그룹들이 궤가 놓인 자리에 날개를 펼쳐서, 궤와 채(언약궤를 메도록 길게 나와 있는 막대기)를 덮게 하였다(7절). 궤에서 삐죽 나온 두 개의 채는 길어서, 그 끝이 지성소의 정면에 있는 성소에서도 보였다. 그러나 성소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채는 오늘날까지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다”라는 추가 진술은 언약궤가 보이지 않으나 안치된 것이 분명하고 입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9절은 언약궤 내부에 관한 언급이다. 언약궤 안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두 돌판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뒤에 여호와께서 호렙에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 모세가 거기에 넣은 것이다(9절). 언약궤 안에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진술은 다른 것들도 그 안에 있다고 믿어져 왔던 때부터 유래된 것이 분명하다(그레이). 그 다른 것들이란,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 같은 것이다(출 16:33 참고).
히브리서 9:4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언약궤 안에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있었다고 믿었던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이것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의 상징물로서 언약궤 곁에 놓인 것으로 추정된다(민 17:10, “증거궤 앞”). 만일 히브리서 9:4에서 언급된 바가 사실이었다면 솔로몬이 언약궤를 접하게 되었을 때는 그것들이 분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10-11절,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놓은 다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소개한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여호와의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찼다(10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을 가득 채워서 구름이 자욱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11절). 성전에 가득한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스럽고 위엄이 넘치는 임재를 가시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그 백성들에게 임재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구름을 통해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널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앞에 행하던 구름 기둥이 뒤로 옮겨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와의 사이를 막아 애굽 군대가 밤새도록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사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출 16:19-20).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를 지날 때 낮에눈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하였다(출 16:19-20).
무엇보다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였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고, 구름이 회막 위를 덮었다(출 40:34).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완성된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성전에 언약궤가 안치되고 구름이 가득한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곳에 임재하셨다는 증거이다.
모세가 지은 성막이나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모세가 지은 성막에 두었던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에 안치되었다(수 18:1). 하나님은 그 성소에 임재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 와서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다(삼상 1:3).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이 패배하였다(삼상 4:2).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패배의 원인이 언약궤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하여 실로 성소에 있던 언약궤를 전장(戰場)인 에벤에셀로 옮겨왔다. 언약궤가 진중에 들어오자 이스라엘은 승리를 확신하였고 블레셋은 두려워하여 더욱더 무장하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언약궤를 보유한 이스라엘은 이전보다 더 크게 패하였다. 심지어 승리의 보루로 삼았던 언약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삼상 4:11). 왜 언약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실로의 성소에서 이미 떠나셨고(시 78:59-60), 언약궤에는 하나님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여부이다. 실로의 성소에서 떠나신 하나님은 솔로몬이 성전 봉헌 예배를 드린 후 다시 이곳에 임재하셨다(왕상 8:11; 9: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언약을 파기하자, 하나님은 이들을 이들을 끊임없이 경고하셨다. 그들이 끝까지 돌이키지 않자,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가셨다(겔 10장, BC. 592년). 하나님이 떠난지 6년 후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불살라졌다(렘 52:13,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불타고 이스라엘의 유력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다시 나타나실 것을 예시하셨다(겔 43:1-7). 에스겔이 본 성전의 환상은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회복할 하나님의 성전을 예시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요 1:1).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로고스는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시되, 그의 품에 계시는 아들이다(요 1:18). 말씀(로고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광이 충만하다(요 1:14).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이며(요 1:14), 구약적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이다(출 34:6).
하늘에서 온 로고스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다(요 3:13). 그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땅에서 들리신다(요 3:14). 그가 땅에서 들리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뜻한다(요 12:32-33; 행 2:33).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기 위함이다(요 3:15).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아들은 우리가 그와 함께 있어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영광 보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 17:24).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신약에서 독생자에게 충만한 영광의 그림자이다. 이제 누구든지 아들을 믿어 영생 얻은 자는 아들이 있는 곳에 거하여 독생자의 영광을 본다. 그리하여 독생자의 영광인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로 충만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받는 은혜중의 은혜이며, 곧 지복(至福)이다(요 1:16).
독생자의 영광으로 충만한 자,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당장 이해되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당장 해로운 일이라도 그것을 변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다(창 50:20). 또한, 만물 안에서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여도 결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승리한다(롬 8:35-39).
4. 나의 묵상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오직 주를 갈망하며 주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하여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시 63:1-2). 그리고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주의 인자(헤세드)가 자기 목숨보다 낫다고 하면서 여전히 주를 찬양하였다(시 63:3). 사랑하는 아들에게 당하는 다윗의 고통을 무엇으로 비할 수 있을까?
내 주께서 이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셨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다(눅 23:34). 그들 중에 바로 내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를 투사하며 믿던 자, 내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이다. 잠잠히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하니, 내가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 어디 있겠는가?
광야의 다윗을 생각하며, 또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주의 성소에서 주의 영광 보기를 사모한다. 독생자에게 충만한 인자와 신실이 내게 부어지기를 간구한다. 주말캠프 마지막 날과 다음 주 초 몽한선 컨퍼런스를 앞두고 낮추시고 또 낮추시는 주 앞에 엎드린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을 믿는다. 내 입술을 열어 주의 사랑(헤세드)을 찬양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언약궤를 안치합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떠나신 하나님이 다시 성전에 임재하십니다. 그곳에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제사드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기이하고 놀라웠으나 참으로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백성들이 범죄하여 다시 떠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불살라집니다. 성전이나 그 속의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태초부터 아버지의 영광중에 거하시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독생자에게 아버지의 인자와 신실이 충만합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영생 얻은 자마다 아들이 있는 곳에 그와 함께 있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봅니다. 요한 공동체는 그 영광을 보았고 우리도 봅니다. 나 같은 자에게도 영생을 주시고 그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아버지... 오늘도 아들이 있는 곳에서 주의 영광 보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광야에서 보았던 그 영광 보기를 원합니다. 환난과 곤고가 나를 사로잡아가나, 아버지 집에서 주의 영광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는 요셉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의 사명에 신실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성전으로서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나의 상태를 발견합니다. 성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가득하기를 소망하며, 카페에 앉아 주의 말씀을 잃고 곱씹어 봅니다. 말씀의 깊은 사귐에서 말씀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생명을 주시고 시원한 생수를 먹게 하옵소서…인터처치 예배와 모임 가운데 주님의 충만한 영으로 항상 인도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