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다른 학문이 다른것은 오직 철학만이 무엇이라고 물어본다. 가령 심리학은 마음의 여러분야를 다루지만 철학은 심리학이란 무엇인가라는질문을 통해 심리학의 본질을 다루려고 한다. 때로는 해체를 통해 때로는 통찰을 통해 다루려고 한다.
칸트는 물자체라는 개념으로 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나 진리가 있다면 인간은 이 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 한계를 그어주는 작업을 했다.
물론 그 이전에 경험으로 파악 할 수 있다는 경험주의와 이성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는 이성주의가 있었고 칸트가 이를 통합하였다.
그 이후에 헤겔이 등장하여 물자체를 알 수는 없으나 정반합의 피드백으로 끊임없이 가깝게 접근하여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변증법을 제시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하여 논리실증주의의 개념으로 한계를 명확히 그어냈다. 외부의 대상이 있던 없던 인간의 언어구조속에서 포착이 되지 않으면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정의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본질이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하나의 넌센스에 불과한 말장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필요한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끝내버리고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후에 다시 자기의 철학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캠브리지로 다시 돌아와 언어게임과 가족유사성을 연구하였다.(청색본 갈색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고 죽음을 예견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본질보다 세계내에 실존하는 현존재가 더 중요하며 실존이 본질에 더 앞서며 인간은 불안한 지각을 안고 있으며 피투성(세상에 청탁없이 내던져저 태어남)으로 태어나 기투(세상에 태어났으니 그래도 의미를 찿아가는 행위)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대표적인 실존주의자와 존재주의자임
노벨상 수상작가인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소설에서 인생은 부조리하며 길고 긴 인생을 허무하고 무료하게 쓸데없이 채우고 살아내는 존재가 인간의 본질임을 묘사하였다.
자크 데리다는 환대와 사랑 그리고 용서에서 인간의 존재를 해체하고 다시 재규정하였다. 환대란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 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인간의 본질은 현존적 자기동일성의 고집대신에 모든것이 타자에 대한 열린 흔적들로 나의 존재가 드러나며 위상이 결정된다고 본다.
양자역학에서 존재는 오직 관계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찰당하지 않는다면 존재는 중첩되고 파동의 형태로 확률적으로 전우주에 분포함 양자역학에서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오직 파동함수로만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속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입자를 정의하게 위한 편의적 개념일뿐이다.
초끈이론에서 모든 것은 진동하는 0차원의 끈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공하다고 하며 공하다라고 함은 실체가 없으며 작용만 있으며 작용은 조건에 기반하여 발생하고 소멸한다. 존재는 실체가 없으며 조건따라 생성 소멸되는 무상한 것으로 파악한다.
도교에서 존재는 빛의 덩어리이며 에너지덩어리이다. 존재는 언제든지 빛으로 현현되고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빛과 에너지를 잘 개발해서 존재를 고귀하게 가꿀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팔씨름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적으로는 전자기력이란 힘의 작용이며 역학의 개념이 들어가며 어깨와 손목의 360도 회전은 무한한 변수의 벡터를 만들어낸다. 제한된 공간에서 특정한 기구를 이용해서 서로 상치되는 힘을 작용시켜 특정한 곳에 나의 힘과 의지를 관철시키는 스포츠이다.
그렇다면 팔씨름의 본질은 무엇인가? 팔씨름의 본질은 실존주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한결 쉽다. 의자의 본질은 앉기위함 이듯이 팔씨름의 본질은 상대방 손을 건너편 핀패드에 닿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의 개념으로 보자면 팔씨름이라는 단어는 팔과 씨름으로 구성되어 있고 씨름은 몸을 엉켜붙어 상대방을 밀치거나 땡겨서 점수를 내는 스포츠이므로 팔씨름은 팔이 서로 엉겨붙어 밀치거내 땡겨서 점수를 내는 스포츠라는 언어적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팔이라는 언어는 어디를 지칭하는가? 신체에서 팔이 명확하게 나뉘어지는 경계면은 어디인가? 씨름이라는 일반명사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까지 정의를 내려야하는가? 몽골씨름과 한국씨름을 씨름이라고 지칭해야 되는가? 레슬링이나 스모는 씨름이라는 단어에 일부분 포섭이 되는가? 팔씨름을 하지 않는 안드로메다 외계인들에게 어떻게 팔씨름을 설명할 수 있는가? 팔이라는 단어의 기표와 기의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가 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손목이 회전되지 않는 안드로메다 외계인들에게 팔씨름과 뚝심은 같은 것인가? 다른것인가? 팔씨름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인가? 팔씨름은 보여질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사태에 대응되는 언어의 논리함수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자크데리다의 팔씨름은 우정과 환대가 포함되어 있다. 팔씨름은 혼자 할 수 없으며 항상 상대를 필요로 한다. 나의 팔씨름테이블 앞에 있는 타자는 그의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순간에 함께하는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를 환대하고 우정을 쌓아가야하며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언젠가 그가 아니면 내가 죽음을 맞이해야하고 동시에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우정에는 항상 애도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데라다에게 팔씨름의 본질은 환대와 사랑 그리고 용서이다.
첫댓글 종배님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