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외무장관 합의에 반발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도 일본 대사관 앞 노숙 농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2박 3일 일정으로 지난 20~22일 일본 도야마(富山)에 다녀왔다.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방학을 이용해 고등학생들과 함께 일본 내 흩어져 있는 일제 강제동원 현장 등 역사현장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사업은 광주광역시 교육청이 후원하고 있다. '한일 청소년 평화교류단' 6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8명으로 인솔교사와 자비를 들여 참여한 시민 등 방문단은 모두 12명이었다.
원래 일정은 3박 4일 일정으로 19일(화) 오전 9시 인천공항 출발 예정이었지만, 일본 현지 기상 악화로 인해 출발 직전 항공편 결항 소식이 들려왔다. 밤잠을 설치고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에서 눈 속을 헤치고 달려 온 어린 단원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득이 다음 날로 출발이 하루 연기된 항공편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서 서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의 노숙 농성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대신한 단원들은, 다행히 20일 오전 9시 우여곡절 끝에 도야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 사진1 20일(수) 도야마 비행기 취항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인청공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이경훈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도야마현 전경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도야마는 지형적 조건으로 겨울철에 눈이 많은 지역이라는 게 현지인의 설명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일본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어린 나이에 후지코시 회사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소송을 오랫동안 지원해 온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이었다.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와 80대 청년 김병권의 운명적인 만남
도야마에서의 첫 일정은 버스로 1시간 남짓 거리인 '가나자와'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였다. 현지 안내를 맡으신 분은 올해 84세인 김병권 선생님이었다. 몇 달 전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특강을 통해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와 관련해 김병권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분을 직접 일본 현지에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윤봉길 의사의 짧지만 강력했던 삶 :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열린 만주사변 전승 축하식에서 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은 사망하고,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의거 후, 일본 헌병에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상해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오사카로 호송된 후, 같은 해 12월 19일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중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철천지 원수 격인 윤봉길 의사에게 최대한 치욕적인 죽음을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사형집행일 윤 의사는 양팔이 묶이고 억지로 무릎이 꿇린 채였다. 결정적으로 결국 총살에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순간, 머리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가 일장기를 그리며 죽어가도록 한 장면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 사진2 도야마 공항 도착 직후,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로 이동하기 직전, 공항 미팅룸에서 1시간 정도 김병권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모습입니다.
ⓒ 이경훈
그 뿐이 아니었다. 죽은 이후 그 혼까지 모욕을 주기 위해, 가나자와 일본 육군 전몰자 묘지 옆 통로에 시신을 암매장해서 이곳을 지나는 일본인들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밟고 다니게끔 만들었다.
암매장지가 확인된 것이 1946년 3월, 김병권 선생님은 어렸을 적 자신이 동네 아이들과 뛰어 놀고 수없이 밟고 다녔던 곳이 다름 아닌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시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김병권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말씀을 제대로 잇지 못하셨다.
'역사와 윤봉길 의사에게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수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 김 선생님은 그때부터 이 곳 암매장지를 돌보며 그 실상을 알리는 것을 본인의 사명으로 생각해 왔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와 김병권 선생님의 현재의 삶, 이것이 운명이 아닐까!! 다행히, 윤봉길 의사의 암매장지를 발굴 보존해내는데 수많은 재일교포와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큰 도움이 됐고, 전직 한 가나자와 시장도 이곳 암매장지 일대를 영구임대로 해줘 오늘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 사진3 도야마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가와자와'시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 입구 사진입니다.
ⓒ 이경훈
그러나 대한민국 4,500만 인구 중에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가 일본 가나자와에 이렇게 기가 막힌 사연을 품고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고,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김병권 선생님은 최근 가뜩이나 염려가 많다. 본인은 이미 연로한데다, 특히 아베 정부 들어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영구임대로 남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앞으로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후엔 이곳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며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는 모습에서는 순간 숙연해지며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 한편에서 솟구쳐 올라옴을 느꼈다.
강제징용지 후지코시 지하 군수공장 터널, 문전행동 견학
방문 이틀째, 21일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현장이었던 '후지코시 지하 군수공장 터널'에 이어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는 집회현장을 방문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터널은 방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원들이 들른 그 동굴에서도 당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와 충분한 장비도 지급받지 못한 채, 엄청난 지하 땅굴을 파내야했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장을 직접 보던 단원들의 표정은 긴장과 허탈함 그리고 분노 그 자체였다.
▲ 사진4 윤봉길의사 암매장지 앞에서 김병권 선생님과 단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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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단원들은 강제 징용 당사자인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개최되는 '문전행동'에 한 시간 동안 함께했다.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후지코시' 공장 앞에서 '문전행동'을 갖기 시작한 것도 벌써 수년째라고 한다. 이날은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지만,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혹 일본 우익 단체들이 '문전행동' 시간에 맞춰서 바로 옆에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는 수법으로 '문전행동'을 방해하기도 하는데, 숫자라야 몇 명 되지도 않고, 그나마 젊은 사람은 고사하고 걸음걸이도 어려워 보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거의 대부분인 상황에도 '문전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수년 동안 지속해 온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의 모습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 사진5 강제징용 현장인 후지코시 지하 군수공장 터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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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6 일제치하, 강제징용 회사인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벌인 '문전행동'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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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아닌, 평범한 한-일 국민들이 마음의 벽 허물어야
마지막 날 저녁은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과 홈스테이 가족 및 인근 주민들이 손수 만든 음식들을 나눠 먹으면서 2박3일 동안의 짧은 일정을 마무리했다. 특히 언어도 다르고, 기껏 하루 저녁이나 짧은 시간을 같이했을 뿐인 한일 양국 청소년들이 헤어지는 순간 서로 눈물을 머금고 아쉬워하는 모습은 신선하고 각별했다.
과거 불행했던 '한일 간의 역사'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갈라진 간극을 다시 잇는 주체는 결국 평범한 한-일 양국 시민들이어야 하고, 그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 이번 도야마 방문 일정이었다.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에서 만난 80대 청년 김병권 선생님의 삶, 그리고 강제 징용 문제를 붙들고 우익들의 위협 속에도 수년째 문전행동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이 그 가능성은 아닐까?
▲ 사진7 '문전행동' 벌일 때,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이 본사 정문앞에 놓아둔 강제징용 어르신들의 사진입니다.
ⓒ 이경훈
▲ 사진8 문전행동을 끝내고, 평화교류단 단원들과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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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하고 답하기도 한다. 김병권 선생님은 80대 연로하신 몸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사시는지, 그리고 정작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도 무관심해 하는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왜 일본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은 일본 우익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수년 동안 '문전행동'을 지속해오고 있는지, 오늘 2016년을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우리 자신들이 곰곰이 생각해볼 숙제다.
▲ 6기 한일청소년평화교류단은 도야마 방문 일정 가운데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를 찾았다.
-천추의 한을 이어가다 -어릴 때 밟고 놀았던 곳 `충격’… 한으로 지킨 김병곤 씨 - “일제의 참혹상, 눈물 흘린 일본인들 기념비 함께 설립”
망국노 신분으로 일본의 소학교를 다니던 까까머리 소년은 알지 못했다. 늘 밟고 다닌 땅이 나라 위해 몸 바친 윤봉길 의사의 암매장지라는 사실을. 시신마저 참혹하게 내 버린 일본의 만행만큼 어릴 적 철없던 행동은 한이 돼 남았다. 이제 83세의 고령인 그는 윤 의사 암장지터를 정성스레 돌보는 파수꾼으로서 인생 후반부를 넘고 있는 중이다.
6기 한일청소년평화교류단은 일본 도야마 3박4일 일정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로 뜻밖에 윤봉길 의사 암매장지 방문 기회를 갖게 됐다. 이번 프로그램을 주관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측은 “윤봉길 의사가 묻힌 곳이 일본의 버려진 땅이었다는 사실은 일제강점기 참혹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라며 방문 배경을 설명했다.
윤 의사 암장지터로 가기 위해 5일 아침 일찍 도야마를 출발한 교류단은 한 시간여를 달려 가나자와에 도착했다. 그곳에 교류단을 반갑게 맞아한 이들은 두 명의 한국인이었다. 재일교포 김병곤 씨와 김 씨의 손자 김용수 군이 윤 의사 암장지터로 향하는 길잡이가 돼 주기로 한 것.
김병곤 씨는 윤봉길 의사 사적지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20년 넘게 윤 의사 암장지터를 지켜 온 장본인이다. 그는 윤 의사 암장지터와 관련된 일화를 간직한 채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뜻을 같이 하던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김 씨에게 대동한 손자 용수 군은 자신의 길을 이을 희망의 끈이기도 하다.
마을 공동묘지에 들어서면서 김 씨가 가장 먼저 가리킨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비석들. 윤봉길 의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일본군 등의 묘다. 묘비의 크기로 천황에 충성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만큼 입지와 규모가 교류단의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어서 안내된 윤 의사 암장지 터는 앞서 본 널찍한 묘지와 비교가 무색했다. 바로 맞은 편 수풀 속에 숨어 있어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 김 씨에 따르면 예전에는 소나무 밭이었는데 20여 년 사이 비석과 계단이 생기고 묘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이곳은 1946년 윤 의사의 유해가 발굴될 때까지 약 13년 동안 암매장해 방치된 곳이다.
인근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김 씨도 그 사실을 몰랐다.
“(이곳은) 내가 다니던 소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를 하러 온 곳이에요. 인근엔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고 그 옆엔 화장실이 있었어요. 쓰레기를 치운 뒤 이곳 경사로를 타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죠.”
김 씨가 어릴 적 밟고 뛰어 다니던 곳이 윤 의사 암매장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다.
“망국노의 아들이 국가적 영웅의 시체를 밟았다고 생각하니 충격이었어요. 윤 의사는 수의도 입지 않고 일본군에게 사형당한 그대로 얕은 땅에 묻혔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진 것이죠.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다녔다는 게 한이 된 것 같습니다.”
이후 윤 의사 암장지 터에 묘비를 건립하고 기념사업 등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진행됐고 김 씨도 일원으로 참여했다. 잃어버린 역사 때문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김 씨의 행동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1992년 윤 의사의 암장지 터가 새롭게 탄생하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그다.
“아마도 윤 의사 암매장지가 이곳 가나자와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예요. 그 사실을 알리자 재일교포를 비롯해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많이 동참해 주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어떤 관계로 역사를 회복해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일일 테죠.”
이제 김 씨의 바람은 단 하나다. 윤 의사가 역사에 남긴 흔적과 일제강점기 민족의 아픔이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일. 그 한을 잇기 위해 김 씨는 손자 용수를 데리고 윤 의사 암매장지를 찾는다.
오래되지도 않은 70여년전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광복되었으나 일본의 위안부,강제징용, 정신대동원 어느하나 진정으로 사과와 배상도 없는 일본과 정보교환 등 군사적 연대로 동족을 굼겨죽인 다고 !!! 그리고 사드배치하는게 말이되는가 !!! 하라는 개혁은 시작도 못하고 문정부에 너무 실망이 크다 !!!
첫댓글 그동안 언론들은 몰라서 침묵했을까,
아님 조중동이 친일파 후손이라서 졸개언론들도 침묵했는가,
최소한 3.1절이나 6.25,광복절에 한번씩만 보도를 했어도
국민들이 알고,친일청산을 가슴에 새길건데...
이걸보면 노통이 발의했다 실패한
-친일파 재산환수법-
- 사학법 개정-
2개법안은 반드시 통과시켜 재산을 국고에 환수해야
친일파 후예와 졸개들이 힘을 못 쓸건데..
현재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보면 안할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 밟은 발들이 왜놈 발들이
썩어 문드러 지소서
계속 동서남북만 하고 있는 현실을 안의사님은 지하에서 뭐라고 하실꼬!
오래되지도 않은 70여년전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광복되었으나 일본의 위안부,강제징용, 정신대동원 어느하나 진정으로 사과와 배상도 없는 일본과 정보교환 등 군사적 연대로 동족을 굼겨죽인 다고 !!! 그리고 사드배치하는게 말이되는가 !!! 하라는 개혁은 시작도 못하고 문정부에 너무 실망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