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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삼일운동과 촛불혁명
삼일운동에 대한 김경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고, 이 기회에 평소 느꼈던 점을 글로 정리해서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삼일운동과 촛불혁명은 여러 점에서 닮았다. 나는 두 가지 공통점을 꼽고 싶다.
첫째, 둘 다 비폭력저항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둘 다 무기를 들고 싶어도 들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지도부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운동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만, 삼일운동 당시의 소식을 잘 알고 있던 김 산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영문 책 <Song of Arirang>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 내용이 기억에서 많이 사라졌지만, 한 가지 인상적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세상에 민족적인 거사를 비폭력으로 하는 순진한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하는 비판적이면서도 못내 아쉬워하던 사람의 탄식어린 코멘트였다. 당시 젊은 피가 끓던 청년이었기에 나도 그의 말에 공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도 무자비했던 일본 경찰이 가만 놔두었을 리가 만무했고, 무고한 백성들의 피가 강물을 적시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 이런 거국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기적’과도 같은 운동이었다. 두고두고 기억할 만하고 자랑할 만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고 주저 없이 평가하고 싶다. 삼일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끼친 영향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중국 문화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격인 북경대학의 진독수 교수는 "보라! 이번의 조선인의 활동을! 무기가 없으니까 라고 하여 반항도 감행하지 않는가. 주인공의 자격을 방기하여 제삼자로 되는가? 어떤가. 조선인에 비하여 우리들은 참으로 참괴함을 금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폭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진리 때문만은 아니다. 또 억압을 받는 약자의 폭력이 강자의 폭력보다 정당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해서 그러는 말도 아니다.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로 해서도, 폭력적 저항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공권력을 지닌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해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강자의 폭력은 언제나 약자의 폭력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니,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부추기고 유발하기도 한다. 강자는 무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을 장악하고 있고 선전, 선동에 능하지 않는 권력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비폭력 저항을 무저항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피를 흘릴 용기가 없는 비겁한 자들의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이건 큰 오해이고 모독이다. 비폭력 저항의 대명사와도 같은 간디 영화를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유명한 소금 행진 때 영국 병사들이 내리치는 회초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빗발치는 총탄에도 불구하고 떳떳이 행진하던 간디의 추종자들이 얼마나 용감했던지 우리는 보았다. 간디의 글을 읽다가 마주친 기막힌 말이 생각난다. 전 유럽대륙을 점령하다시피 한 독일군이 영국마저 공격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간디의 조언을 묻는 편지에 대한 답장인데, 정말 기가차서 말이 안 나온다. 간디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냥 손들고 다 내어 주라는 말이다. 독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영국을 점령하고 영국의 부와 재산을 약탈하는 건데, 그냥 다 내어주라는 것이다. 어차피 독일군을 이기지도 못할 것이 뻔한데 공연히 무고한 피만 흘리지 말라는 간디 나름대로 장고 끝에 내린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비폭력 저항은 결코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때로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임을 우리는 간디와 삼일운동과 미국 흑인 인권운동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비폭력 저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간디 같은 전국적 추앙을 받는 한 인물의 목숨 건 단식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전 국민이 참여하는 동맹파업이다. 나라전체의 경제를 마비시키는 파업 앞에서 버틸 만큼 무모하고 극악한 독재정권은 없다. 하지만 비폭력저항은 삼일운동만큼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을만한 대의명분이 선명해야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파업은 아무나, 아무 때나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다. 참여하는 사람들 자신들도 상당한 불편과 손해는 물론이고 때로는 극심한 고통도 오래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다.
둘째 공통점은 삼일운동과 촛불혁명이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을 아우르는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저항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삼일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 오로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마음으로 뭉쳐 일어난 거사였다. 당시 불행하게도 천주교는 공권력의 심한 탄압 때문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때였기에 거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불교계 또한 조선조의 심한 탄압으로 위축된 상태에 있었지만 다행히도 한용운, 백용성 같은 걸출한 스님 두 분이 독립선언에 가담하셨다. 삼일운동과 촛불혁명이 민족 전체가 참여한 거국적인 운동이었지만, 촛불혁명은 오랜 반독재 투쟁으로 온축된 시민의식과 정치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권의 비리가 누가 보아도 어이가 없고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지면서 지배체제에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을 가하다가 급기야 대통령 사임으로 귀결되었다. 남녀노소의 차이나 지역과 도농 간의 차이를 뛰어 넘어, 그리고 특정 종교의 신자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무엇보다도 이렇다 할만 한 어느 특정 집단이나 세력의 주도 없이 범국민적, 범시민적인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군중이 모이면 크고 작은 폭력 충돌 같은 것이 벌어지게 마련이어서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는데, 다행이 이렇다 할만 한 폭력 사건 하나 없이 마무리 되었으니 유사 이래 이러한 저항운동이 또 있었을까 할 정도로 평화적인 시위였다. 연인원 천만명이 참여했지만 시위가 끝나고 떠난 자리는 언제나 휴지조각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말끔히 치워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고, 한국 민족과 민중의 높은 도덕적 역량과 성숙한 시민의식은 실로 세계인들의 감탄을 받고도 남을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두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운동 사이에는 삼일운동이 단기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반면, 촛불혁명은 그래도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성공’했다는 사실이 큰 차이라면 차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가 일제 30여년의 통재를 벗어나게 된 것도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주어졌다는 사실 또한 큰 차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밖에도 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이는 표면상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삼일운동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실패한 저항운동이었다 해도 그 정신은 오히려 대대로 이어져서 한국인들의 민족정신과 민주의식, 주체의식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출이집트(exodus) 사건이 그들의 4,000년의 세월에 걸쳐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속에 면면이 살아 있어 그들의 정체성을 다지는 뿌리가 되었다. 우리가 3.1 운동 백주년을 맞은 해에 우리 선열들이 남겨준 이 자랑스러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는 단지 과거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는 현재적 기억이 되며, 우리가 꿈꾸는 미래 역시 우리의 역사를 추동하는 현재적 미래가 되는 것이다. 김경재 목사님의 표현대로 삼일운동은 미완의 사건이었고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반면에 촛불혁명이 비록 독재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를 우리 손으로 쟁취하기는 했지만, 불길한 남남갈등이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다. 마치 1945년에 그렇게도 고대하던 민족의 해방이 극심한 남남갈등으로 인해 끝내 민족의 분열과 강토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그 여파가 7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뼈아픈 역사의 교훈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못난 후손, 못난 민족으로 우리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다른 문제는 얼마든지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지만, 남북문제만은 합심해서 대응해도 모자라는 판에 여전히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고 좌절감마저 느낀다. 지금 우리민족은 전례 없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이번에 주어진 북미와 남.북 사이의 화해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 민족은 6.25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동족상쟁의 역사를 되풀이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불안감이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서 화해의 역사를 창출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3.1운동과 촛불혁명을 완수하는 길일 것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우리 앞에 놓인 과제 가운데 이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 종교계의 각성을 촉구하고 싶다. 삼일운동에 범 종교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말고, 바로 지금 민족의 역사를 선도하는 종교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화도에서 심도학사라는 공부와 명상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초종교적 영성, 종교다원적 신학과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하지만, 나는 늘 말하곤 한다. 비록 심도학사가 불교, 그리스도교 등 제도종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제도 종교들과 성직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말을 참가자들이 종종 쏟아내기도 하지만, 나는 결코 제도종교의 적이 아니다. 나는 성직자들을 조롱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정이야 어떻든 성직자들은 모두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영적 가치를 주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과감하게 결단을 하고 나선 분들이라는 점에서 나는 늘 그들의 용기를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냉정하게 볼 때, 제도 종교들과 성직자들이 세인의 존경은 고사하고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며, 나는 개인적으로 이에 깊은 비애를 느끼며, 거기에 비례하여 커지는 분노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이 결정적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는데, 우리 종교계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절망적인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한국종교계는 이 세인의 조롱과 멸시를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뒤엎어 버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한국 종교계는 종교 본연의 정신에 따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역사적 변혁의 기미가 보일 듯 한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고 움켜쥐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해나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임한다면 어느 나라, 어느 지도자들도 우리의 굳은 의지를 꺾지 못할 것이다. 특히 남북이 똘똘 뭉쳐 미국과 중국, 일본 주변 강대국들에 다시는 우리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더 이상 이 부끄러운 조국 분단과 민족 갈등의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해야만 할 때이다.
나는 이를 위해서 차제에 한국 종교계에 두 가지 과감한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각 종교는 민족의 단결과 화합을 해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선언을 만천하에 공포하자. 각 종교와 종단들은 이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에 우선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남과 북, 남과 남,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차이와 종교적 차이를 뛰어넘는 일치단결을 다짐하자. 둘째, 한국 종교계는 이 시대적 사명에 대한 헌신을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심판하는 척도로 삼자. 종교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표방하는 구호가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의 참다운 실천을 담보해주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질지도 모를 남과 북, 북과 남의 평화 만들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시대적 사명을 우리 종교계가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우리 종교계의 명운이 달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일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자유와 평등을 핵으로 하는 계몽주의의 정신을 외면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땅에서 더 이상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 종교는 세인의 조롱을 받고 무시당해도 마땅하다는 각오로 시대와 역사 앞에서 떳떳한 종교가 되자.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종교계가 해야 할 오늘의 삼일운동이고 촛불혁명이다. 우리에게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하늘에 대한 든든한 믿음이 있다.
하늘이 정의와 평화의 편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기적’을 보여주자,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진리파지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우리 민족을 오랜 역사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위대한 시대를 열자.
첫댓글 비폭력운동의 공통점이 있지만 3.1운동에 견줄수 있는 후대에 남길 의식혁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소통이 없는 정부는 무자비한 역사의 반복일뿐입니다. 발전의 과정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