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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돈오점수론
보조 스님의 사상 가운데 아마도 돈오점수론이 가장 널리 알려진 사상일 것 같다. 주목할 만 한 점은 돈오점수 사상이 비단 선불교에만 국한된 사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통하는 길이며, 종교를 넘어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할 참다운 인간됨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론에 직접 영향을 준 규봉 종밀 선사는 돈오점수를 “법(法)에는 불변과 수연의 두 면이 있고 사람(人)에게는 돈오와 점수 두 문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법이란 우리가 깨달아 알고 닦아서 실현해야 할 진리를 가리키며, 돈오와 점수, 줄여서 悟(깨달음)와 修(닦음)는 사람이 이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따라야 할 두 길이라는 뜻이다.
지눌에 따르면 돈오와 점수에는 반드시 선후의 질서가 있어서 순차를 지켜야만 한다. 반드시 선 돈오 후 점수여야만 한다는 원리다. 이유인즉 깨달음, 즉 진리를 깨닫는 앎, 중생들이 자기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자각이 없으면, 마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의 과정은 어렵고 고된 길이 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자기 마음이 비록 번뇌에 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바탕, 마음의 본성이 부처님의 성품임을 자각한다 해도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지속적인 수행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본성 – 진심, 불성 - 을 제대로 지키거나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눌은 종밀의 가르침에 따라 선 돈오 후 점수의 진리를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는 갓난아이가 비록 이목구비를 온전히 다 갖춘 어엿한 사람이지만, 실제로 사람 구실을 하려면 성장과 배움의 과정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음과 물의 비유로서, 얼음이 비록 물임을 안다 해도 얼음이 실제로 물이 되려면 장시간 태양의 온기를 받아 녹는 시간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비유를 즐겨 사용해서 설명한다. 시골 사람이 서울로 이사하는 순간 이미 서울시민이지만, 그가 실제로 서울 사람 노릇을 하려면 지리도 익히고 사람을 사귀는 등 서울살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필요한 것과 유사하다는 비유다.
나는 진리에 대한 자각과 지속적 수행의 필요성이 비단 선불교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에도 해당되는 보편적 진리이며, 더 나아가서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할 진리라고 생각한다. 돈오와 점수 사이에는 얼마간의 모순과 긴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번뇌가 본래 공이며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중생의 본래 모습이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다면, 당연히 수행이 왜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지눌과 종밀 스님의 대답은 번뇌는 이(理)의 측면에서 보면 공이여서 실체가 없지만 사(事)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와 사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진리, 즉 색즉시공이나 이사무애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그런 어긋남이 있을 수 있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진리이고 번뇌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두 가지 진리 혹은 사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며, 인간은 결국 오와 수, 이론과 실천, 본질과 실존 사이의 괴리라는 문제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비단 선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 모든 인간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사람은 처음부터 사람다움의 원형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원형은 아무 부족함이 없이 완전해서 불교에서는 불성, 여래장, 본각진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의 모상(imago dei), 신의 씨앗(Seed of God) 혹은 내면의 빛(inner light)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교에서는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인간의 본성(天命之謂性),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여 성인과 필부 사이에 조금도 차이가 없지만, 기질지성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 상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나는 이 기질지성에는 물론 후천적인 환경이나 교육 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또 힌두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본성을 아트만(Atman)이라 부르며 이 인간의 본성이 곧 우주만물의 본성과 일치한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 모든 가르침에 공통된 문제는 인간의 참 자아, 참사람(眞人)의 모습은 하나지만, 사람마다 환경과 교육과 수행과 몸을 비롯한 환경과 물질적 여건의 차이로 말미암아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성과 현실성의 차이를 극복하여 온전한 참사람이 되는 길은 돈오와 점수, 즉 자신의 본래적 성품을 먼저 자각한 다음 현실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자질을 다 갖춘 온전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아무 흠이나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아프면 마구 울어도 누구 하나 갓난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맑은 눈망울에 비친 삼라만상을 보라. 얼마나 순수하고 신기한가? 또 아기가 말을 배우는 2-3살이 되면서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가? 문자 그대로 사람은 다 하늘이 낸 천재이고 영물이다.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고 하늘의 축복을 누린다. 그런데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받은 이 보편적이고 영원한 본성이 세파에 시달리고 경쟁에 내몰리면서 번뇌에 싸이게 되고, 이것이 제2의 본성처럼 되어서 온갖 괴로움을 겪는다. 따라서 교육이 필요하고 인격 형성이 필요하며, 본래성을 되찾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사람 노릇을 통해서 본래적 존재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하느님의 아들, 부처)를 알아야 하고, 아는 것과 하나가 되도록 번뇌에 싸인 현실적 자아의 때를 벗겨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수행의 열매를 모두를 사랑하고 품는 행위를 통해 이웃과 세상에 바치는 삶을 살자는 것이 모든 종교의 근본 가르침이다.
우리는 깨달음이 불자들만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성령,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기독인들만의 특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는 깨달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거나 깨달음 지상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은 변치 않는 진리다. 신앙이란 단지 이러한 진리를 깊이 깨우치고, 신학자 틸리히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이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자기의 귀한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수용하는 (그의 표현으로는 acceptance of acceptance)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지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나 <법화경>에 나오는 궁자의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진리를 아무리 깊이 자각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유혹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부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깨달음과 자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깨달음이 대번에 다 완성되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주어진 깨달음이 없는 돈오는 없고, 돈오 없는 점수는 결코 쉽고 가벼운 수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넓게 이해하고 있는 돈오점수론이다.
사람은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무엇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존재다. 내가 이미 온전한 존재라는 것,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 어린 아이는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해서, 예쁜 짓을 많이 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두기만 하면 된다. 존재의 충만함이 넘친다. 사람은 생명을 지닌 신의 알맹이이고, 생명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부모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 진 어린아이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하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실 세상의 부모치고 자식을 위해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예수는 하느님을 대신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러한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로 보았다. 아무런 소유도 없고, 비싼 장난감이 없어도, 내세울 성취나 업적이 없어도, 어린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생명의 기쁨을 누린다. 어른들도 삶의 어느 순간에는 그런 기쁨을 경험한다. 깨닫는 자,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돈 주고 살 수 없는 존재의 행복이다. 오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는가? 현대인은 이런 존재의 기쁨을 상실하고 밤낮 없이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이 되려 하고, 무엇을 하려 하면서 자기도 피곤하고 남도 피곤하게 만든다.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아무리 중한 것이라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고 벌거벗고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온갖 거추장스러운 옷과 장식품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자, 아무 할 일이 없는 무사한인(無事閑人), 무위진인(無位眞人) 혹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늘이 준 본래의 성품을 되찾고 존재의 뿌리로 귀환 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종교를 통해,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선정을 닦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고,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순수한 기쁨과 평화가 있고, 거기서 나오는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사의 표현인 사랑이 있다. 크고 작은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산다. 우리는 질지도 모를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이 점이 마음에 걸려서 뒤늦게나마 밝힌다. 나는 "하느님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한다.) 이것이 영적 휴머니즘이 추구하는 쉽고 가벼운 길이다. 수행은 우리가 애써 획득하여 달고 다니는 계급장이나 남에게 보여주는 표창장이 아니다.
무소유와 가난의 기쁨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보물이다. 사람에게만 존재의 희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이러한 존재의 충만과 기쁨을 누리며 산다. 봄에 피는 꽃들은 생명의 노래요, 시요, 춤이다. 진달래 앞에서 웃음 지으며 사진 찍는 사람들은 그 생명에 화답하여 노래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존재의 기쁨을 알려면 껍데기를 벗어야 한다. 옷을 벗어야 한다. 소유든, 감정이든, 욕망이든, 생각이든, 관념이든 참 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배운 것이고 습득한 것들이다. 밖에서 들어온 소리가 잠잠해져야 안에서 나오는 참 나의 소리가 들린다. 나라고 우기는 모든 것들(我相)을 내려놓으면 스스로 밝은 빛이 비쳐온다.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비치는 빛, 그것이 부처님의 광명이고 아트만이고 신이 비추어주는 로고스의 빛이고 거룩한 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그대로 비출 뿐 어떤 망상도 어떤 번뇌도 덧붙이지 않는다. 덧붙일 것이 없으니 제거할 것도 없다. 이것이 깨달음 후의 닦음(悟後修)의 진면목이다. 닦음 없는 닦음, 번뇌를 끊지 않는 끊음, 묘한 닦음(妙修)이라고 한다. 본래 잃은 것이 없으니 구하는 것도 없고(無所求) 얻을 것도 없는(無所得) 진인의 세계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것이야 말로 초탈한 천하 자유인의 삶이며 하느님의 아들의 삶이다. 아무 이유 없이(ohne Warum, without why) 사는 무사한인(無事閑人)의 삶이며, 그냥 살기 위해 사는 삶이라고도 했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가면서 자승자박하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귀한 진리가 있을까?
종교마다 수행법이 다르지만, 중요한 사실은 어느 것이든 수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됨이 목적이다. 그러나 요즘은 수행을 무슨 공덕을 쌓는 것처럼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많다. 기독교인 중에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다니고, 40일을 금식하고, 성경을 몇 십 번 읽었다고 자랑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불교에서도 십여 년을 참선하며 눕지도 않고 수행을 했다거나 불교경전을 여러 권 외우고 있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에 종교생활만 열심이지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별로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예배중독자나 종교중독자라고 부른다. 수행한다고 많은 종교서적을 읽고 여러 수행 처나 기관을 찾아다니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내면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답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수행은 남이 보라고 하거나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무슨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행을 고행(苦行)으로 여기는 것에 반대한다. 수행도 기쁘게, 가볍게 해야 한다. 이것이 오후 수에 하는 ‘수 아닌 수’, 즉 묘수라고 지눌 스님을 말한다. 수행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하면 된다. 나는 숲속을 걸으며 명상하거나 조용한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면서 집중하는 것도 좋고, 이런 저런 경전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화분에 물을 주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밭에서 일하는 것도 다 수행이다. 자고 먹고 놀고 일하고, 대화하고 심지어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 수행 중에서도 일상생활을 수행으로 여기지 않는 수행은 수행을 위한 수행이 되기 싶다. 왕양명은 그래서 일을 하며 수행할 것을 권하면서 일을 통해 연마한다는 의미로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주장한 것이다. 수행이 바쁜 삶을 살고 일에 지쳐 있는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일이 되고 부담이지 되지 않으려면, 수행은 오히려 우리의 무거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