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해산의 수고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해산하는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은 수고를 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사도 바울이 떠난 뒤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에게 찾아온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유혹이 되어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 얻기에 부족하고 그것 외에 구약 율법에서 가르치는 할례 의식을 반드시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시금 구약의 성전 제사, 할례, 음식 규례 등을 지켜서 유대 종교로 복귀시키려는 강한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가져온 복음의 생명과 자유를 도로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철저히 배격하고 그 가르침에 동조하여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라는 신앙의 근본 교리를 강력하게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매우 강경하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단호함이 가득한 내용이었으니,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1:8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위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 하나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이 지금 독이 되고 소화에 문제가 되는 못된 음식을 집어 먹는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그 아이를 가로막고 절대로 그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 아이를 사랑하기에, 큰일이 날 것이 분명하기에, 그토록 부모는 애간장을 태우면서 다시는 그러한 것에 손을 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가 어느 정도 컸다고 그 아이를 안심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청소년기, 청년기에도 그만한 유혹과 시험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영혼이 성장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바른 믿음에 굳게 서게 될 때까지, 분별력을 갖추고 듣고 믿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판단하기까지, 세상의 간교함에 맞서서 자기의 믿음을 신실하게 지켜갈 때까지 많은 유혹과 맞서 싸워가야 합니다.
삶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습니다. 나무를 잘라보면, 더디 자란 나이테는 반드시 그 해에 여름의 기근과 겨울의 극한의 추위가 몰아닥친 때입니다. 날씨가 좋고 비도 적절했고 바람도 선선하게 적당하게 불었던 때는 나이테가 넓고 무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무르기만 한 나이테를 가진 나무는 어느 해 몹시 무섭게 불어닥친 거센 폭풍 앞에 쉽게 부러지고 맙니다. 이처럼 신앙의 나이테도 많은 고비를 거쳐서 고난을 겪으면서 그 신앙의 나무가 튼튼해지고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신앙과 삶이 이렇듯 나무의 나이테처럼 잘 자라나는 성장기가 있는가 하면 성장 대신에 다지는 시기인 충실기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때로는 자녀들이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부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곤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과 같은 유아 신앙기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매우 신속하고 단도하게 편지를 써서 경각심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각심만 준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영적 아비인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와 같은 중보 기도의 씨름을 하겠노라고 본문 말씀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사단의 흉악의 결박에서 풀려나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 영혼이 일그러지고 균형을 잃어버린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가는 바른 성장을 하기까지는 많은 영적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는 마치 여인이 아이를 출산할 때의 고통과 같은 엄청난 고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잉태할 때에도 엄마들이 입덧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덧은 참 고통스러운데, 얼마전 조사가 나온 통계는 입덧이 심한 것은 그만큼 아이가 건강하게 자란다는 증거라고 하는 통계 조사가 나왔습니다. 부모의 고통이 자녀에게는 새 생명의 건강함을 보증하는 것인 셈입니다. 출산할 때에도 엄마가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난 아이들은 태어난 후에 모든 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인공절개수술을 통하여 해산의 고통 없이 태어난 아이는 기능들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발휘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고치에서 나오는 애벌레나 알에서 깨어나는 포유류나 새나 파충류의 경우에 고치나 알을 일부러 깨주어서 고통 없이 태어나게 하면 오히려 날지 못하고 힘을 못쓰고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내버려 두어 그 알에서 스스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중에 정상적인 힘을 발휘하여 잘 자나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즉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 없는 생명의 탄생이나 성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영적인 자녀들을 위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고통처럼 고통을 기꺼이 치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지혜롭게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내성을 가진 신앙인으로, 균형잡힌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는 바로 여인의 해산의 고통과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기도의 씨름은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삶을 살리고 세우는 힘입니다. 영혼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에서 거룩한 영적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은 기도의 씨름을 통하여, 결박에 묶인 한 영혼이 풀어납니다. 갈 바 몰라 헤매는 영혼들이 인도함을 받습니다. 질병에 눌린 사람이 치유함을 받습니다. 미성숙한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지는 은혜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이 새벽 우리 기도 속에 떠오르는 몸이나 마음이 아픈 영혼들, 영적 최전선에서 씨름하는 선교사님들, 앞길을 놓고 고민하는 우리 자녀들을 품고 간절하게 해산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새로워지는 귀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연어들은 수천리 바다를 헤엄치고 강물을 거꾸로 올라와서 알을 낳고는 결국 힘이 없어져 죽곤 합니다.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부모인 것 같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기에 많은 열매가 맺어진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과 삶을 두고, 우리의 자녀의 삶을 위하여 해산하는 기도의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옵소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땀을 흘린 고통은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이 기도를 축복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