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 유착
※ 정-경 유착보다 사실 더 국민이 언론을 모니터링 하고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이유는 '펜은 칼보다 강하기 때문' 입니다.
※ 기업들의 가격담합 이나, 대기업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서 백혈병이나
암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친편향적 일부 언론의 그릇된 시점에서의 짝눈
으로 세상바라보기는 그 다음 문제이고요.
(언론 기득권 : 조중동+연합+뉴롸이트 데일리안/뉴데일리 / kbs / ktv) ↔ (정권심판론&경제민주화 적 접근이 아닌) 서민경제+
가계부채 증가+극빈층 제외한 바로 윗 계층인 서민계층에서 세금 젤 많이 거둬들이기 같은 경제무능 정권을 지속적으로 압박 !)
※ 한국은 언제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언론이 나올 수 있게될까요?
p.s 한국 언론과 유럽언론의 차이점은..
한국 언론의 경우 '조중동' 일보가 역사가 젤 오래되서 그런지몰라도 지나치게 선정적-자극적이다 ('JTBC'=중앙일보 포함)
- 연합늬우스의 경우 정부여당이 어느당이냐에 따라서 좌우되고, 정몽준 의원 (연합뉴스 주식지분 젤 많이 보유)에 의해서
편향적이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은 기사를 쓰는경우가 대부분임.
- 유럽언론과 미국언론의 경우 FACT를 기반으로 해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같음.
- 다만 한국의 일부 짝퉁 언론 (수꼴 & 극좌) 처럼 추측성 기사를 쓰진 않음
- 일본을 정말 싫어하지만, 일본 언론의 경우에도 <산케이신문=극우신문의 정점에 선 신문. 좃선일보-LUV관계-산케이신문>
- 일본의 대다수의 언론들은 문제점 해결에 대한 제시와 대안마련을 모색해봅니다.
미국이나 유럽언론처럼 말이죠.
- 한국 언론의 경우 전문가라고 하는 사회 지도층 (의사, 교수)등이 나와서 정권의 입맛에 맛는 답변을 함으로써
국민&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사고를 하지 못하고 막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 한국 언론의 대다수가 '더 썬 (The Sun) 같은 찌라시가 많다는게 참으로 서글픕니다.
- 빌트(독일)이나 가디언(영국) 그리고 세계최대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의 '저널리즘' 과 해결책 방법제시등을
보면서, 한국의 언론들이 말로만 정론직필이라 떠들지말고 공부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블로터닷넷
출처2 : 각 나라 언론의 성향
http://mirror.enha.kr/wiki/%EC%96%B8%EB%A1%A0%20%EA%B4%80%EB%A0%A8%20%EC%A0%95%EB%B3%B4
4월14일 오전 안타까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에 나온 지 28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방치해 숨지게 한 비정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대구 동부경찰서는 아이를 돌보지 않은 이 아비에게 살인죄를 묻기 위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한다. 14일 오전 포털사이트에 나온 뉴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수십여개 언론사가 사건을 다뤘다. 헌데, 제목이 좀 이상하다. ‘게임’이 크게 부각돼 있다. 연합뉴스와 경향신문, 국민일보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이 사건을 다루며, 게임을 핵심 소재로 내세우고 있다. 마치 게임 때문에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 내용은 이렇다. 대구 동부경찰서가 발표하길, 아내와 별거 중인 이 못난 아비는 게임을 하기 위해 PC방을 전전하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렀을 뿐 또다시 게임을 하기 위해 외출했고, 경찰은 그 사이 아이가 굶어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게임’을 용의자로 소비하는 언론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보도에 게임이 크게 부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친부모가 게임에 열중하느라 아이를 굶겨 죽인 사건은 2010년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게임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를 죽인 학생도 있었고, 2012년에는 학교폭력의 주요 원인으로 게임의 폭력성이 한창 거론되기도 했다. 이 논리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한 중학생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뒤부터다.
게임은 왜 이 같은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언론은 왜 마치 게임이 사람을 죽인것마냥 보도하는 것일까. 사건을 가장 쉽고,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손쉬운 용의자가 바로 게임이기 때문이다.
최진순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교수는 “저널리즘의 가치와 역할이라 한다면, 사건이나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배경과 맥락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라고 보는데,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상적인 주제를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취재 기자 입장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또, 이런 것들이 온라인에서 읽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선택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은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에 집중한다. 언론이 게임을 용의자로 소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진순 교수는 이를 언론의 ‘마켓 드라이브 저널리즘’으로 풀어 설명했다. 국내 언론이 처한 상황이 깊이 있는 뉴스, 맥락 있는 해설을 할 수 없도록 부채질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우리 저널리즘이 처한 시장 상황이 깊이 있고, 본질을 다루는 것에 주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선정적으로 이슈를 잡고, 또 그러는 것이 주목받는 게 현실이죠. 언론이 놓여있는 지형 자체가 선정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고 이를 스스로 깨는 것이 뉴스룸의 사명일 텐데,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또한 안타까워요.”
최진순 교수는 이어서 “이 같은 보도가 반복될수록 독자 처지에서는 사건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언론이 게임을 대중이라는 법정에 세울 때, 대중이 게임을 손쉽게 심판하려 할 때, 게임에 대한 사회의 논의는 ‘중독’과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사회는 게임을 악으로 만든다.
정말로 게임이 문제? 아니올시다
사실, 악역은 게임이 맡지 않아도 좋다. 게임을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사회의 악역을 담당할 수 있다. 게임은 그저 이런 올가미에 ‘재수 없게’ 걸려들었을 뿐이다. 게임 이전에는 만화책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일본문화’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팝송이 있었다. 게임은 팝송과 만화책의 적자요, 후예일 뿐이다.
게임으로 시작한 얘기가 저널리즘이라는 거대한 담론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이건 꽤 심각한 문제다.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잘못된 언론의 시각 때문에 사회가 지출하는 비용이 적잖다는 점이다.
지난 2011년 ‘강제적 게임 셧다운제’가 국회를 통과했다. 청소년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안이 당당히 법으로 명시된 것이다. 2013년 봄에는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이 이른바 ‘게임 중독법’을 국회에 발의했다.
셧다운제와 게임 중독법으로 얼마나 많은 청소년과 게임 개발자, 학부모, 게이머가 고통받아 왔나. 숱하게 열린 토론회와 세미나는 또 어떤가. 이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이들의 날 선 대립도 끊이지 않았다. 사회를 구성하는 에너지의 일부가 낭비된 셈이다. 규제가 더해진 바람에 게임 개발업체와 게이머가 지불한 비용도 만만찮다.
다른 하나는 사건을 근본을 고치지 못하는 주먹구구식 행정처리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12년 발생한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을 돌이켜보자. 언론은 학생을 괴롭히던 또래가 게임을 강제로 시켰다는 증언에 특히 집중했다. 이 같은 보도가 연일 이어지자 급기야 학교폭력의 원인이 게임에 있다는 여론까지 일어섰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게임 쿨링오프제’라는 또 다른 규제 카드를 슬쩍 꺼내들기도 했다.
게임과 관련은 적지만, 지난 2013년 발생한 용인시 모텔 살인사건도 똑같은 맥락이다. 언론의 보도는 용의자가 영화 ‘호스텔’을 봤다는 점을 부각했다. ‘호스텔’이 어떤 영화인지 찾아보려는 이들은 영화의 내용과 용인시 사건을 비교하며 치를 떨었다. 2005년 미국에서 제작된 B급 공포영화일 뿐인 ‘호스텔’은 태평양을 건넌 한국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의 원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을 괴롭힌 것은 게임이 아니라 또래집단의 폭력이었다. 잔혹한 수법의 용인시 살인 사건 용의자는 영화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얘기하는 아이들의 ‘게임 중독’ 문제도 근본은 게임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교육에 있다. 대구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게임과 PC방은 수사 과정 중 나온 열쇳말일 뿐이다. 사건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반성해볼 일이다. 게임을 사회의 악으로 만든 것은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언론인 것은 아닌지를. 게임을 용의자로 소비하기만 하는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의 목에 채워진 길로킨은 앞으로도 쉽사리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