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경험을 한 사회사업가가 당사자를 더 잘 도울 수 있나요?
아픔을 경험한 사회사업가가
비슷한 아픔 속에 있는 당사자를 깊이 공감하면서 더 잘 도울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아픔을 경험해서 그를 잘 이해할 것 같지만, 이미 그 아픔을 경험하고 또 극복까지 했다면
오히려 아픔 속에 있는 당사자의 상황을 별 것 아니라 여길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경험이 오히려 공감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공감하고 싶으면 내 경험에서 빠져나와라
타인에게 공감하기 위해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기’는 자칫 위험할 수 있다.
타인이 어떤 처지일지 생각해 보려고 ‘나는 어땠더라’를 떠올리다 오히려 자신의 극복 경험(기억)에 사로잡혀
“라떼는 말이야”로 반응하며 상대방의 고통을 낮게 평가하고,
오히려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공감보다는 한심함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 중 한 명인 로런 노드그렌 (Loran Nordgren)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빠져 나오라”라고 제안한다.
‘나는 저 상황에서 어땠더라’라고 생각 하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지 말고,
바로 앞에 있는 상대방이 현재 어때 보이는지 그의 신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조언을 찾을 때에는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최적의 후보자가 아니며,
오히려 유사한 경험이 없 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위로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경험해 본 사람이 공감도 더 잘할까?> 양민경, 2022.4.19
당사자와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회사업가가 그 당사자와 그 지역사회를 더 잘 도울 수 있을까요?
(<복지관 지역복지 공부노트>에서 ‘이웃 동아리 활동’ 가운데 ‘복지관 사회복지사, 그 지역에 살아야 할까?’ 참고.)
이 또한 그럴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전 어느 종합사회복지관 사회사업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어느 새내기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잘 돕고 싶은데 소극적 성격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주민을 잘 만나고 공감하기 위해 성격을 바꿔야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이것도 비슷합니다. 사회사업가가 되기 위해 알맞은 성격이란 게 있을까요?
성격이 공감에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당사자를 움직이게 하는 건 무언가요?
사는 곳이 같거나 동일한 경험 혹은 어떤 성격이 분명 당사자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있습니다.
공감하게 하는 데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사자를 잘 돕는 일에는 무엇이 중요할까요?
당사자를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바라보고
그래서 작은 일도 당사자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여 당사자의 일이게 할 뿐입니다.
사는 곳이 다르고, 비슷한 경험이 없을 지라도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만날 뿐입니다.
그렇게 시종일관 당사자를 인격적으로 만나려는 과정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거라 믿습니다.
즉,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세’가 먼저입니다.
이런 자세로 만나는 가운데 ‘공감’하는 마음이 만들어지기도 하겠지만,
당사자의 상황이나 처지를 공감할 수 없다고 해도 꾸준히 그를 존중하려는 인격적 만남이 일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품성과 태도가 당사자의 상황을 더 잘 공감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만나려는 자세’만으로 충분할까요?
사회사업가로서 당사자를 잘 돕고 싶다는 구체적 행위는 ‘학습’입니다.
당사자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글,
그런 이를 도운 사례 따위를 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힘씁니다.
그런 간접 경험이 당사자와 그 상황을 이해하게 하고, 이해가 공감의 깊이를 더해줄 겁니다.
기질과 유전으로 공감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사회사업가로 일하기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훈련으로 근육을 키우듯 학습과 연습으로 공감 ‘능력’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이해해야(인지해야) 정서적 공감이 일어나고, 정서적 공감 뒤에 어떤 행동이 따라옵니다.
‘인지’하기 위한 훈련이 (사례)학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공감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감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사실 ‘공감’이란 사람들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몇 가지 방식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인지하는 것(인지적 공감),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정서적 공감),
그들의 경험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공감적 배려)이 바로 그 방식들이다.
<공감은 지능이다 The War for Kindness> (자밀 자키, 심심, 2012)
<내 마음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나요?>(구슬꿰는실, 2021)에 실린 이야기들처럼,
사회사업가로서 그를 이해할 준비는 ‘학습’입니다.
직접 경험이 절대적이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중요한 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학습을 통해서라도 간접 경험을 꾸준히 쌓아갑니다.
모르면 못 도울까요?
모르면 오해하고, 무지하면 혐오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다양한 실천 이야기를 읽고 공부하며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잘 알아야 잘 도울 수 있을까요?
잘 알아도 다시 묻습니다.
모르면 더 열심히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묻습니다.
그러나,
<몽실언니>나 <올리버 트위스트>를 완벽하게 읽었다고 해서 가난한 아이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와 관련한 지식이 차고 넘친다고 해도 한 번의 구체적 경험과 비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당사자의 삶을 다 안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작은 일도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여 당신 일이 되게 할 뿐입니다.
당사자와 비슷한 경험이 많아도 묻고 의논하고 부탁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학습하여 간접 경험을 쌓지만,
학습이 이 마음을 높은 자리에 둘까 두렵기에
더욱 작은 일도 당사자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여 당신 일이게 합니다.
나아가 이런 실천조차 틀릴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합니다.
정리
‘경험’이 중요하지만 ‘공감’이 먼저입니다.
사회사업가에게는 ‘공감’도 기술입니다. 훈련하여 공감하는 마음을 만듭니다.
‘공감’이 중요하지만 ‘인격적으로 만나려는 자세’가 먼저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만나자.” 즉, 당사자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날 뿐입니다.
그 구체적 행위가 작은 일도 당사자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기입니다.
인격적 만남 뒤에 따라오는 게 공감일 겁니다.
공감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경험이 있을 때 이해가 되니, 직접 경험이 없다면 간접 경험을 쌓습니다.
간접 경험의 실제가 (사례)학습입니다.
첫댓글 “이미 그 아픔을 경험하고 또 극복까지 했다면
오히려 아픔 속에 있는 당사자의 상황을 별 것 아니라 여길 수 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저도 늘 이 마음을 경계하려 합니다.
아이를 만날 때 특히 그렇습니다.
내가 이미 지나온 나이라는 이유로
알려고 들고 ‘이럴거야’ 넘겨짚습니다.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이가 한 경험을 나는 못했다,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미성숙한 존재다.’
공감 안되더라도, 공감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청하라 하셨던 김세진 선생님 강의도 기억납니다.
계속 의식하고, 지속적으로 당사자를 만나고 연습하는 게 최선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