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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회사업가가 더 잘 도울 수 있을까요?>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https://cafe.daum.net/coolwelfare/RpOF/59
사회사업에서 ‘성의정심’이란 무언가요?
‘공감’은 기술
‘당사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회사업가가 더 잘 도울 수 있을까요?’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공감’이 일어나야 실천이 순조롭다는 전제 아래 서술했습니다.
경험이 있어야 이해와 공감이 더 잘 이뤄지고, 그래야 당사자를 오해와 편견 없이 도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경험이 없으면 학습하여 간접 경험이라도 쌓자는 겁니다. ‘공감’을 실천의 바탕에 두었습니다.
‘도구화된 공감’을 생각합니다.
사회사업가는 ‘실천 기술로써 공감’을 갖춥니다. 폴 볼룸 교수는 <공감의 배신Against Empathy>(시공사, 2019)에서
‘공감’에는 관심, 동정, 친절, 사랑, 도덕이란 뜻 외에 ‘타인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란 의미도 있다고 했습니다.
공감 또한 지능의 한 형태로 선한 일에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악한 일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감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즉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 행위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라면 나는 공감에 반대하지 않는다.
사회지능은 다른 종류의 지능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행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인지적 공감’을 마치 선을 행하는 원동력처럼 과대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의 욕망과 동기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은 성공한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며,
잔학 행위와 착취에 이용되기도 한다.
<공감의 배신>(폴 볼룸, 시공사, 2019)
좋은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선이 될 수 있지만,
악한 사람이 공감 지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타인을 해치고 이용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공감’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도구로서 공감은 마치 칼처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 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이합니다.
영화 <위와치유 Caught in the Net>(바르보라 찰루포바 감독 + 비트 클루사크 감독, 체코, 2020).
미성년자 디지털 성범죄의 위험과 실상을 알리기 위해
성인 여자 배우 세 명이 12살로 설정한 페이크 계정을 만들었습니다.
계정 개설과 동시에 전 세계 남성이 접촉해왔습니다.
임시 개정 개설 열흘 동안 수천 명의 남성이 12살 아이(실제로는 성인 배우)에게 나체사진을 요구하고 협박했습니다.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을 시도했습니다.
이 가운데 ‘도구화한 공감’으로 배우들의 마음을 실제로 움직인 이가 있었습니다.
‘도구화한 공감’이란 바로 이런 ‘인지적 공감’을 뜻합니다.
또는, ‘공감’이 우리 마음에 들어서는 순간 사회사업가다운 마땅한 실천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기울어져 바른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공감’ 때문에 다른 상황을 살피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사업가로서 ‘공감’에 앞서 먼저 살필 바탕이 있습니다.
공감했다고 해서 사회사업가답게 잘 도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공감했고 이해했으나 중심이 없다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회사업가가 이상을 상실한 채 진정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방적으로 도와버리면, 뜻밖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의정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험과 공감에 앞서 성의정심으로 만날 뿐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그저 사회사업가답게 대할 뿐입니다.
사는 곳이 어디이든, 성격이 어떠하든, 같은 경험 여부를 떠나 당사자를 인격적 존재로 여깁니다.
그래서 작은 일도 당사자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당신 삶이요 당신 일이게 합니다.
상대가 장애인이나 노인이나 아이일지라도, 눈높이가 다르고 처지가 다를지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만나 의논합니다.
만남 가운데 전문가 노릇 하며 당사자를 함부로 대하기를 경계합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만나 진정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사회사업가의 진정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는 ‘진정’을 참되고 애틋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당사자를 향한 진정이란 당사자를 향한 참되고 애틋한 마음입니다.
당사자를 참되고 애틋하게 만납니다.
그 ‘참됨’이란 무엇일까요?
사회사업가로서 당사자를 향한 참되고 애틋한 마음의 구체적 실체가 궁금합니다.
당사자를 대할 때 사회사업가 쪽 강점으로 일방적으로 돕더라도 그 마음이 참되기만 하면 진정하게 일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정성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상을 분명하게 하고 이를 향하여 이루어가려는 ‘진정한 마음’이라야 사회사업가답게 이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잘했다’ 할 수 있습니다.
「복지소학」에서 ‘성의정심’을 찾아 읽었습니다.
1) 誠意성의
誠意성의는 格物致知격물치지한 대로 도우려는 뜻을 정성스럽게 함이니
곧 사람이 사람답게 복지를 이루고 누리며 사회가 사람 사는 사회답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2) 正心정심
正心정심은 誠意성의로써 마음을 붙들어 마땅히 두어야 할 자리에 두는 겁니다.
① 格物致知격물치지한 대로 사람다움 사회다움을 좇아 誠意성의하면
당사자와 같거나 당사자보다 낮은 자리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당사자 위에 서지 않고 오히려 낮은 데 처하여 섬기려는 마음 자세,
당사자를 복지의 주체로 존중하여 받들려는 마음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② 格物致知격물치지한 대로 사람다움 사회다움을 좇아 誠意성의하면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에 마음 두게 됩니다.
‘복지사업’의 時勢시세나 名利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자세를 견지하게 됩니다.
「복지소학」 (2017.7)
誠意성의는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말입니다.
‘格物격물’하여 ‘致知치지’한대로 알게 된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겁니다.
격물, 사람과 사회(物)의 그 ‘다움(格)’을 탐구합니다.
치지, 그렇게 알게 된 바가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입*니다.
이렇게 ‘격물치지 하여 알게 된 바대로 도우려는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게 성의입니다.
*사람다움 :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사회다움 : 사회는 약자도 살 만해야 하고 약자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誠意성의,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을 생각하여 도우려는 뜻’을 정성스럽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
사람을 도울 때 자기 삶에 주인으로 살려는 뜻을 정성스럽게 합니다.
正心정심, 마음을 마땅히 두어야 할 곳에 둡니다.
격물하여 치지하였고, 그래서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을 좇아 성의하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사회사업가가 마음을 마땅히 두어야 할 곳에 두는 게 정심입니다.
정심은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을 생각하여 도우려는 그 마음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애씀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 사회사업가가 사람을 도울 때
‘자기 삶에 주인대로 살게 하는 뜻’과 ‘복지를 이루는 데 당사자가 주인 노릇하게 하려는 뜻’을 정성스럽게 합니다.
이럴 때 사회사업가의 마음이 절로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향하는 자리는 당사자보다 높은 곳이 아닙니다.
당사자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낮은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당사자의 삶과 지역사회 사람살이에 마음을 둡니다.
이것이 정심입니다.
성의로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마음이 당사자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러니 성의로써 마음을 단단히 있어야 할 곳에 붙잡아 놓습니다.
*‘정심’하면 ‘공감’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감’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습니다. 당사자를 성의정심으로 도울 뿐입니다.
현장 상황을 짐작하면, 이렇게 하면 자연스레 ‘공감’이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의정심의 자연스런 결과로 공감을 생각하지 않고 ‘공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폴 볼룸 교수의 말처럼 ‘공감’ 또한 당사자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 정도로 쓰일까 조심합니다.
이렇게 격물치지 성의정심하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乞言걸언하게 됩니다.
걸언(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기)은 성의정심의 표현입니다. 걸언은 성의정심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방법입니다.
“걸언은 誠意正心성의정심의 필연적 외형입니다.
格物致知격물치지한 대로 誠意正心성의정심하면 당사자와 지역사회에 걸언하게 되는 겁니다.
이 걸언이 몸에 배게 함이 사회사업 修身수신입니다.
乞言걸언, 安而行之안이행지! 걸언이 편안해져서 자연스럽게 걸언하게 되도록 갈고 닦는 겁니다.”
<복지소학> (2022년 5월)
걸언이 몸에 배게 함이 사회사업 修身수신입니다.
당사자를 사람답게 도우려고,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우려는 극진한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난 게 걸언입니다.
성의정심 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행위가 걸언입니다.
수신은 성의정심에서 나오는 사회사업의 形형 곧 걸언을 체득하는 수련입니다. 걸언이 편안해지도록 수련하는 게 수신입니다.
格物致知격물치지 誠意正心성의정심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
‘수신’하여 자연스레 ‘걸언’하게 됨으로써, ‘제가’하고 ‘치국’하여 ‘평천하’를 이룹니다.
齊家제가 : 당사자와 지역사회를 거드는 ‘복지관(기관)’이 이상을 분명히 하고 바른 뜻을 갖추게 됩니다.
治國치국 : 지역사회에서 지역주민이 복지를 이루고 더불어 살게 거듭니다. 이웃이 있고 인정이 흐르는 ‘지역사회’를 만듭니다.
平天下평천하 : 약자도 살 만한 사회, 약자와 더불어 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당사자와 공유하는 경험이 어떠하든 사회사업가답게 만납니다.
당사자를 인격적 존재로 보고 작은 일도 ‘성의정심’ 하여 묻고 의논하고 부탁할 뿐입니다.
성의정심 하면 절로 잘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학습’으로 향하게 합니다.
실력을 쌓아야 잘 도울 수 있다는 깨달음은 성의정심 뒤에 따라옵니다.
이렇게 일하는 가운데 이해와 공감도 일어날 겁니다.
끝내 당사자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어도,
성의정심으로 사회사업가답게 거들었다면 바르게 실천했다 할 수 있습니다.
마땅함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다시 현장에서 일하면서 약자를 만난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김구슬 님’을 돕게 되었습니다.
사회사업가로 당사자를 만나는 기본자세는, 김구슬 님을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실체는 작은 일도 김구슬 님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합니다.
이해와 공감 여부를 떠나, 시종일관 이 자세로, 초지일관 성의정심으로 만날 뿐입니다.
김구슬 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겠습니다.
그 아픔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겁니다.
이는 사회사업가로서 귀한 자산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관련한 글과 논문과 사례를 찾아보겠습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 여부를 떠나,
김구슬 님을 잘 돕기 위한 문헌연구는 사회사업가의 마땅한 준비입니다.
학습의 총량이 실천의 질을 좌우합니다.
이해는 공감을 불러옵니다.
인격적으로 도우려는 분명한 기준이 있으니 공감을 기술처럼 사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해도 넘겨짚거나 다 안다는 듯한 태도를 경계하겠습니다.
조언할 일이 있더라도 상황을 살피고 때를 헤아리겠습니다.
모든 과정을 성의정심하려 애쓰겠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김구슬 님이 자기 삶을 살며 이루고 누리게 거들겠습니다.
첫댓글 선생님. 저번 모임 때 나눠주신 성의정심 설명이 너무 유익하고 와닿았어요! 그런데 다시한번 이 글을 봐도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알듯말듯...ㅜㅜ 확~~ 개념이 잡히지않는것 같아요. 뜻이 너무 좋은것 같아 정말 잘 이해해보고 싶어요
기회되면 또 설명부탁드려도 될까요?
사회사업가로서 저만의 목표? 길잡이같은 슬로건..? 구체적으로 세워보고싶은 욕심이 나는 요즘입니다
채혜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좋지요.
화상으로 만나요.
날 정해 다시 나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