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극복하는 참된 미사 봉헌
한건 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국내는 물론 전세계가 위험에 처해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8개월이 지나가는데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세가 꺾이질 않습니다. 일상의 영역이 축소되고, 사회 전체가 혼동되고 불안은 증폭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신앙활동이 제한되면서, 교회도 위축돼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신앙생활을 떠올려 봅니다.
지난 2월 정부가 감염병 위기 경보를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높임에 따라 모든 교구에서 미사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교회 창설 이래 교회의 방침으로 신자의 미사 참례를 금지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지금은 미사 참례가 방역지침의 준수에 따라 허용은 되었지만,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초기의 교회 지도자들은 책을 보고, 자체적으로 지역에서 덕망이 있고 열성적인 사람을 사제를 임명하여 성사는 물론 미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잘못된 성사집행이었지만, 그만큼 신자들이 성사 및 미사의 필요성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 첫 미사는 복자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한 뒤인 1795년 4월 5일 성 토요일에 최인길 마티아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이후 주문모 신부는 6년 동안 비밀리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아쉽게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복자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하신 후 이 땅에는 34년 동안 사제가 없었기에 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박해가 조금 약해지자, 신자들은 성사 및 미사를 그리워하며, 1811년(신미년)에 교황님께 사제를 보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희들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바치는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실정이옵니다. 저희들의 소망은 너무도 간절하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나 이루어질 수 있으오리까? 저희들의 눈물과 탄식과 슬픔은 눈여겨 볼 가치도 없겠지만, 그래도 교황님께서는 끝없이 그리고 한없이 자비로우시므로, 저희는 그저 예수님의 공로와 교황님의 덕만 바라보며 이렇게 마음을 다하여 슬피 울부짖는 것이옵니다.”
이후에도 신자들은 정하상과 유진길 등을 중국으로 밀사로 보내면서 성직자 영입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신자들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에 여항덕 신부, 그리고 1836년 모방 신부님이 입국하고, 1838년 앵베르 주교님이 입국하면서 다시금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비밀리에 교우촌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상황을 앵베르 주교님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서 큰 위험에 빠져 있다, 매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신공을 드리기 위해 집의 사람들을 일으킨다, 세 시 반부터는 교무 일을 보고 지망자가 있으면 세례성사를 주고 견진성사를 주고 있다, 그 다음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고 감사의 신공을 올린다, 성체를 영한 교우는 해가 뜨기 전 서둘러 돌아간다. 낮에도 같은 수의 교우가 고해성사를 보러 하나씩 남모르게 찾아와서 다음날 아침 성체를 영하고 가버린다. 나는 같은 집에 2일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 동이 뜨기 전에 다른 집으로 가야한다.” 이렇게 1년에 한 번 모신 성체는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미사는 봉헌됐습니다. 일제의 압박으로 공식 기도를 일본어로 바쳐야 할 때도 있었지만, 미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6ㆍ25전쟁 때도 사제들은 신자들을 피난 보내고 홀로 미사를 봉헌하며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에 납치되고 순교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종이신 필립 페렝 신부는 “교회를 위해서 보좌 신부님은 피난 보냈지만, 나는 안 가지. 나는 천안의 폴리 신부, 당진의 코르데스 신부 등 신부님들과 모두 순교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고국을 떠날 때 부모님들과 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왜 가나? 천주께 감사해야지.”(81위 시복 자료집 제2집 107-108)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제들의 순교에 대한 열망을 본 신자들은 피난지에서의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내기 위해 성당을 찾아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신자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 특히 미사에 참례할 수 없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진 것처럼 공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후손으로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이 시련을 통해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영성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사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만, 우리 삶의 참된 양식인 ‘주님의 몸’, 곧 미사에서 주어지는 성체를 모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해 왔습니까? 우리 신앙 선조들은 1년에 한 번 정도 모시는 주님의 몸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며 가장 소중하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미사를 볼 수 있는 풍족한 상황이기에, 그저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서 주님의 몸을 모시지 않았습니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미사의 소중함과 성사생활의 기쁨을 깨닫는 은총의 시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