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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이승훈
질곡 속에서 피어나는 불씨
일천 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
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가 머무느냐
황성산(荒城山)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만 높았네
- 함석헌 ‘남강(南岡)’에서
1930년 5월 3일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독립운동가 안재홍이 축사를 맡았다. “일천 년 전에 우리 역사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멸망입니다.…” 그 무너져 버린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민족의 첫 번째 과제이며, 그에 몸과 마음을 바쳐 애쓴 것이 남강의 정신이요 사업임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막는 바람에 말을 맺지 못한다. 이어서 이승훈이 답사를 하려고 연단에 올랐다. 학교 뜰을 가득 메운 제자들, 내빈들, 신문기자들은 물론 그의 반대자들과 일본 경찰들까지도 숨죽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뜻밖에도 짧게 한마디만 남기고 내려갔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시키셨을 뿐입니다.”
1905년 이승훈이 큰돈을 건 쇠가죽 장사에서 재기가 어려울 만큼 망해 버리지 않았더라면 역사 속에 그만큼 훈훈하고 향기로운 이름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인가. 사람이 탈바꿈하는 데는 그에 필요한 여건과 자극, 아픔의 고통이 심신에 뼈저린 자국을 남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태어났다. 본명은 인환(寅煥), 보통 쓰는 이름은 승훈, 어려서는 승일이었다. 집안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아버지 이석주는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도무지 일하려 들지 않았다. 무능력한 남편 대신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해야 했던 그의 어머니는 이승훈을 낳은 지 겨우 여덟 달 만에 영양실조와 산후더침이 겹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여읜 이승훈은 할머니가 얻어다 주는 동냥젖으로 겨우겨우 자랐다. 여섯 살 되던 해에는 정주읍에서 동쪽인 납청정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승훈의 아버지는 유기노점을 벌였지만 별반 신통치 못했다. 할머니는 이승훈을 데리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남의 집 품을 팔거나 밭을 매러 다녔다. 그즈음 이승훈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만두어야 했다. 뒤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아가 된 이승훈과 형 이승무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 무렵 유기상인 임권일은 유기 제조공장을 여럿 운영하는 이름난 부자였다. 그는 열한 살 이승훈을 거두어 자기 상점의 사환 일을 맡겼다. 어린 승훈은 요령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미리 해놓을 정도였다. 유기들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경리장부와 상업문서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등 유기 제조공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배워 나갔다. 책을 빌려 가며 글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임권일은 이승훈의 인품이 무척 마음에 들어 외상으로 물건을 놓은 집에 수금하는 일도 맡겼다.
이승훈은 다음 세 가지 신조를 실천했다. 첫째, 바로 걷는 것. 둘째, 어디에 기대지 않고 바르게 앉는 것. 셋째, 어떤 물건이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 뒷날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전진’이라는 뜻으로 ‘나음나음나감’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리고 자기 동상을 서 있는 자세로 만들지 말고 걸어가는 자세로 만들라고 했다. 이것은 곧 쉬지 않고 자기 인생을 꿋꿋이 나아가는 것을 뜻했다. 이승훈이 열두 살 때 영변 아무개에게 수금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수십 리를 걸어 영변에 닿았으나 그 아무개는 온갖 핑계로 미루다가 해거름에서야 다음 장날에 오라며 내쫓았다. 할 수 없이 수십 리를 되돌아오는 도중에 아는 노인을 만났다. 평지원 가까이 닿자 노인이 말했다.
“얘야, 우리 저기 평지원 거북마을에 사는 김진사댁에서 하룻저녁 신세 좀 지자꾸나. 배고프고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걷겠다. 너도 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느냐.”
“그럼 혼자 들어가 쉬었다 가세요. 저는 그냥 가렵니다.”
이승훈은 남에게 까닭 없이 기대고 싶지 않았다. 둘은 옥신각신하며 김진사댁 앞까지 왔다. 밖이 소란하자 김 진사가 내다보았다. 김 진사는 까닭을 듣고 기꺼이 둘을 집에 들이려 했으나 이승훈은 끝내 거절했다.
“진사님,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는 제 볼일로 장사 다니는 사람이니 그런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이승훈은 이처럼 독립심이 강했다. 어린 이승훈에게 감탄한 김 진사는 뒷날 자기 둘째아들 김자열을 오산학교에 보내 글을 배우도록 했고 그 김자열은 바로 이승훈의 사위가 되었다
이승훈은 장사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그가 열다섯 살 때 하루는 황해도 안악의 아무개가 와서 놋그릇 수천 냥어치를 주문하고는 값 일부를 치르고 나머지는 그릇을 가져간 뒤 보내겠다고 했다. 주인은 허락했으나 이승훈이 한두 푼도 아닌데 믿을 수 없다며 말렸다. 그제야 주인도 깨닫고 이승훈을 딸려 보냈다.
안악 해창에 닿아 손님이 마소를 가지러 간 사이 이승훈은 짐을 모두 창고에 들였다. 그리고 얼마 뒤 마소를 끌고 돌아온 손님에게 값을 치르기 전에는 물건을 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린 이승훈을 얕잡아본 그는 으르고 달랬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뒷날 알고 보니 그는 처음부터 속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 소년 장사꾼이 그곳에서 몇 달을 머물며 마침내 한 푼 손해 없이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임권일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근면성과 성실성이 알려져 사위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승훈은 1878년 이도제의 딸 경선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어서 그는 푼푼이 저축한 돈 30냥을 들고 독립했다.
그는 임권일에게서 외상으로 숟가락 한 짐을 얻어 유기행상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평안도 지방은 이미 유기 장수들이 샅샅이 돌아다닌 뒤였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상인의 물건은 잘 사주지 않았다. 한동안 평안도 일대를 돌던 이승훈은 이듬해 새로운 시장을 찾아 황해도로 나갔다.
그곳에서는 품질 좋은 유기를 보자 여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승훈은 얼굴이 반반하고 말씨도 싹싹한 데다 값도 헐하게 내주어 인기가 많았다. 이승훈은 유기를 외상으로 깔아 가을에 쌀로 거두어들였다. 한편 재령평야에서 생산되는 목화를 몽땅 사들여 평양이나 정주로 돌아가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행상으로 제법 돈을 번 이승훈은 스물세 살 되던 해 행상을 그만두고 정착하기로 한다. 마침 옛 주인 임권일은 그 무렵 부자들이 으레 그랬듯이 큰돈을 갖다 바치고 박천군수가 되었다. 그는 장사에서 손을 놓기로 하고 공장과 상점을 대신 운영해 달라고 이승훈에게 부탁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덥석 받아들였을 테지만 이승훈은 달랐다.
“늘 남의 장사만 해서 되겠습니까? 저도 제 장사를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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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정주 오산학교
이승훈도 이제는 유기공장을 직접 차려 행상을 그만두고 더 큰 장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밑천으로 큰돈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돈을 빌리고자 그는 평안도의 큰 부자인 철산 오희순을 찾아갔다. 오희순 집 사랑에는 이미 돈을 빌리려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녁에 오희순이 나오더니 자기 선조 묘소에 석물(비석)을 세운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큰일을 했노라고 자랑했다. 사람들은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극구 칭송했다. 거기다 오희순은 무능한 삼촌이 자꾸만 손을 벌리니 이렇게 돈 많은 것도 고민이라며 농담 삼아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데다 처음 찾아온 이승훈이 나섰다. “조상님 묘소에 석물을 해놓은 게 무슨 후손의 자랑거리입니까? 게다가 여러 사람 앞에서 집안 어른 이야기를 그렇게 밝히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간 오희순은 돈 좀 빌려보려는 사람들에게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만 들어왔던 터였다. 그런데 흉허물 없이 다니는 행객도 아니요, 또 나이도 한참 어린 젊은이가 당돌하게 말꼬리를 잡는 게 아닌가.
“고얀 놈, 저렇게 입바른 소리 잘해서 어떻게 장사꾼 노릇을 해. 구렁이 담 넘듯 한 자락은 이리, 한 자락은 저리 걸치고 눈치껏 돈 빌려다 이문만 챙기면 될 것이지, 여기가 무슨 공자 왈 맹자 왈 강론하는 곳인가? 젊은 놈이 되바라지고 배꼽 튀어나온 소리를 하는구나!” 오희순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안사랑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오희순이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불렀다. “밤새 곰곰 생각해 보니 자네 말이 옳으이. 자네가 생각한 대로 꿋꿋이 말해 준 것이 내 허물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구먼.”
그러고선 이승훈에게 필요한 만큼의 돈을 선뜻 내주었다. 이승훈은 그 돈으로 유기공장을 세우고 점포를 넓혀 큰 장사를 벌이며 민족사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 무렵의 공장 일꾼들은 모두 일자무식 천민이었다. 그들은 저축은커녕 밤새 술과 노름으로 돈을 날린 뒤 다시 일하러 공장에 나오는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도 의욕도 없었다.
이승훈은 그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공장 경영 방법을 개선해 나갔다. 공장 시설을 위생적으로 고쳐 노동환경과 근로조건을 개선했으며,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고 일꾼들의 교양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을 북돋아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평양과 인천에도 지점을 냈다. 마침내 그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무역상이 되어 돈거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통해 어음을 놓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이승훈은 큰 위기를 맞는다. 그는 난을 피해 덕천 산골로 들어가 옥수수로 연명하면서 2년을 지내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납청정으로 돌아왔다. 길거리는 황폐했으며 상점과 공장은 모두 부서져 버렸다. 일본군에 패하여 달아나던 청나라 병사들이 유기제품을 죄다 쓸어가는 바람에 남은 게 없었다.
서른 살 이승훈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휩쓸려 보내고 재기불능 폐허 위에 서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상점에도 가보았으나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산더미 같은 빚뿐이었다. 오희순의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천한 장사꾼일수록, 남의 돈을 돌려다가 영업을 하는 장사꾼일수록 신용이 있어야 한다. 부정직한 행동을 하다가는 마침내 파멸을 부른다. 사람은 죽을 때 죽을망정 당당해야 한다.’
이렇게 결심한 이승훈은 상점이며 공장을 세밀히 조사해 남은 제품을 일일이 써놓고, 그동안 오희순에게서 빌려온 자본의 손해액과 이자를 계산하여 총 부채가 얼마인지 적은 뒤 철산 오희순 집을 찾아갔다. 오희순 또한 난리통에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사방에 깔아 놓았던 돈과 재물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큰일이었다.
세상 인심을 자탄하던 참에 생각지도 않던 이승훈이 찾아온 것이다. 이승훈은 소매 속에서 장기(부기책)를 내놓았다. 오희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사계문서로 깨끗이 기록했는데 공차(公差)가 얼마, 입(入)이 얼마, 상이 얼마, 계(計)가 얼마라고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장기 하나하나를 훑어나가다가 탁 덮어버렸다. 그리고 한참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 돈을 가져다가 장사하던 사람이 수십 명이 넘는데 이번 난리 뒤 모두 숨어버리고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거든. 그런데 자네는 날 다시 찾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이렇게 장기까지 낱낱이 뽑아왔으니 장사하는 사람은 이래야 쓰는 법이야.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신의를 지켜야 해. 그러지 않으면 큰돈을 모을 수 없어.”
오희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연상에 놓여 있는 벼루를 끌어당겨 붓에다 듬뿍 먹을 찍더니 이승훈이 가지고 간 장기 위에다가 열십자로 가위표를 죽죽 긋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이것은 지난 일이니 다시 볼 것 없네.”
이승훈이 깜짝 놀라 말리려 했으나 오희순의 결심은 굳었다. “다시 장사를 시작하려면 자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려워 말고 필요한 대로 와서 말하게. 내가 돈을 힘닿는 데까지 돌려줌세.”
오희순의 돈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었던 덕분에 이승훈은 매우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다. 납청정 유기공업을 독점한 이승훈은 또다시 판매 지점망을 확장해 평양에 점포를 내고, 개항기 뒤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진남포에도 점포를 세웠다. 청일전쟁 뒤 7년여 만에 그는 70만냥을 움직이는 거상이 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과 인천을 드나들며 석유와 양약의 총대리점을 맡았다. 그즈음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석유가 급작스레 퍼지면서 연료혁명이 일어났다. 또 그 무렵 학질이 크게 돌았는데 독일상사 세창양행에서 수입해 들여온 금계랍(金鷄蠟·말라리아 치료제) 또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여기다 그는 지물·도자기·건축재료·면포·일용잡화 등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들이는 무역상사로서 서북 일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인천~서울 간 운송사업도 손에 쥐고 있었다.
평양에서 서울로 또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돈을 보낼 일이 있는 세력가들은 모두 이승훈을 통했다. 평안감사 민영휘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때 민영휘의 세도는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런 그가 현금을 평양에서 이승훈에게 주면 이승훈은 어음 한 장만 써주어 그 어음이 서울에 가면 이승훈이 지정한 상사나 점포에서 쓰인 액수대로 돈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뒤 이승훈은 돈을 바치고 수릉(水陵) 참봉 관직을 샀는데, 이것은 그에게서 두고두고 큰돈을 뜯어내기 위한 세력가들의 강압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참봉직에 오를 무렵 평안감사로 부임한 민영철은 평양에 서궁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돈을 긁어모으려 했다.
그는 양반 예우를 받을 수 있다고 속이며 ‘향대부첩(鄕大夫帖)’을 팔았는데, 이승훈은 그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해 마침내 폐지시켰다. 또 평양 시내 애련당(愛蓮堂)을 헐어 첩의 집을 지어주려다가 이승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참봉 이승훈은 평안감사도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승훈은 벼슬에 오르자 오산 용동에다 터를 잡고, 흩어져 사는 여주 이씨네 가난한 집안 사람들을 데려다 큰 마을을 이루어 살게 했다. 그들에게 땅을 주어 농사짓게 하면서, 겨울에는 행상하는 법을 가르쳐 생계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바로 이 용동에 있는 이승훈의 여주 이씨 마을이 뒷날 오산학교를 세우게 된 곳이다.
사업이 커갈수록 한 시대와 나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때문에 그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력, 외국 상품에 침탈당하는 국내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각 지방 지주나 상인들이 돈을 모아 외국 세력에 맞서 상권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일어나려던 그 당시 형편을 생각하면 실로 앞을 내다본 식견이 아닐 수 없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