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루카우스 언나이우스 세네카(BC4? ~65)
1장. 화는 왜 인간에게 불필요한가?
■ 화는 인간을 검의 끝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화는 인간을 날카로운 검의 끝으로 뛰어들게 만들고 스스로 파멸할지언정 끝까지 복수를 감행하도록 만든다.
몇몇 현자들은 화를 순간적인 고아기라 결론내리기도 했다. 누구든 화가 났을 때는 자제력을 잃게 되며 예의범절도 잊고 인간적인 유대까지 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순간 눈과 귀가 멀어 이성의 충고를 외면하며 올바른 것과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처럼 엄청난 파멸을 자초한다.
■ 인간 외의 생명체들은 화에 좌우되지 않는다.
야생동물과 다양한 생명체들은 화라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화는 이성의 적이지만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야생동물도 충동과 분노, 잔인함, 전투적인 기세를 보이고 몇몇 쾌락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기 통제가 힘들지만 사치하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화 자체가 없다. 용서하는 법을 모르듯 화내는 법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동물들은 돌발적인 행동을 하다가도 순식간에 정반대의 태도로 돌아선다.
■ 화라는 감정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
인간은 본래 상호 간에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 태어났고, 화는 서로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 태어났다. 인간은 협동을 원하고 화는 불화를 즐긴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 하지만 화는 해를 끼치고자 한다. 인간은 낯선 사람조차 도우려고 하지만 화는 가장 소중한 친구까지 공격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는 타인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서 스스로 구렁텅이로 뛰어든다. 이렇듯 잔인하고 파괴적인 악덕을 가장 뛰어나고 정제된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무지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는답시고 무턱대고 화를 내선 안 된다.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사회규범을 해치는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설득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다소 혹독한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여전히 조언과 질책의 수준에 그쳐야 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적당한 처벌을 받도록 한다.
■ 화는 절재하기 힘들므로 애초에 떨쳐내야 한다.
벼랑으로 뛰어내린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없다. 일단 몸이 허공에 뜨면 멈출 수도 속도를 줄일 수도 없을 테니까. 성급하게 몸을 거꾸로 내던지는 순간부터 더는 돌이킬 수도 없고 후회할 여지도 없어지며, 결국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만다.
■ 화라는 적은 최전방에서 맞서 물리쳐야 한다.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부터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초기에 싹을 잘라내는 것이다. 일단 화라는 감정이 우리를 장악하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번 격정이 사로잡은 마음에는 이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그 격렬한 감정에 내어주면 그 후부터는 좋건 싫건 격정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감정과 이성은 분명히 구별되거나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심적으로 좋은 상태냐 아니냐에 따라서 둘 중 한쪽에 가깝게 변화하는 것이다.
■ 화가 난 이상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
■ 화는 그 자체로 제멋대로이고 통제가 불가능하다.
■ 우리의 마음이 격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격렬한 충동들을 좌우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 어떤 경우에도 화라는 감정은 불필요하다.
■ 간혹 효과가 있었다고 화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
■ 화가 용기를 복돋워 주는 조력자라고 착각하지 말자.
가장 많이 화를 내는 사람들은 주로 갖 난 아기, 노인,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들이다. 본래 심약한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잦은 법이다.
■ 악한 자에게 화를 내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되돌아보자.
그리스의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말했다. “선한 자가 악한 자를 보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이 착한 사람일수록 화를 낼 일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침착하고 격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도 미움을 품지 않는다.
■ 죄지은 자를 처벌하되 화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죄지은 사람을 벌주면서 화를 내는 것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 심사숙고한 끝에 그들의 죄를 처벌한다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바로잡는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최고의 재판관은 결코 죄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법은 단지 죄악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지 화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선한 자가 사악한 죄악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사악한 자들의 성공을 보고 배 아파하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이렇게 말했다. 제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상처가 아문 후에 흉터가 남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자도 소소한 격정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종국에는 그 격정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 화는 순간의 감정에 따라 변덕스러운 판결을 내린다.
우리는 대외적인 무기가 필요치 않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이성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화는 때때로 동정심 때문에 무너져 내린다. 화는 강ㄹ겨한 의지가 없으며 공기주머니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격렬하게 시작된다. 강과 늪지대에서 시작되어 점차 땅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처럼 그 시작은 격렬하나 오래 유지되기는 힘들다. 화는 시작부터 강력하게 돌진하지만 이내 잠잠해지고 누그러지게 마련이다.
화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때는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멈춘다.
■ 화난 사람이 정의의 검을 쥐면 최악의 결과를 부른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은 다양한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타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싫어한다. 진실 자체가 본인의 의지에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면 크게 분노한다.
이성은 그와 정반대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되면 묵묵히 모든 것을 처단해버린다.
이성은 절대로 이를 악다물거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거나 재판관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판결을 내릴 때는 더욱 차분하고 침착하고 평온한 태도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테이블을 내려치고 음료가 담긴 잔을 집어 던지고 굵은 기둥에 몸을 들이받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허벅지와 가슴팍을 주먹으로 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당장 화풀이할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화를 자신에게 푸는 것은 얼마나 난폭한 짓인가?
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합당한 처벌을 가한다. 가끔은 죄인을 적발하고 나서 그냥 풀어주기도 한다.
누군가 사악한 행동을 했지만 그 스스로에게도 주위 사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을 경우에도 처벌을 유예한다. 어떤 경우에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자보다 훨씬 큰 죄를 지은 자에게 오히려 관대한 벌을 내리기도 한다.
2장. 화라는 감정의 실체를 알자
■ 화는 관대함이 아닌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화라는 감정이 인간의 관대함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있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화는 관대함이 아닌 지나친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화에는 든든한 밑바탕이 없다.
항상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화라는 나약한 감정을 비집고 그 내면으로 침체되어 불행한 일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병에 찌들어 상처로 온몸이 덮인 사람들이 어디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 화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된 복잡한 감정이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화라는 감정이 신중한 선택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충동으로 인한 것인지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행동이 진정한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인지,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이 그러하듯 아무 자각 없이 이루어지는지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일반적인 견해는 화는 그 자체로 야기되지 않으며 마음의 동요가 있어야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뭔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인지하고 난 후 그 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도 부당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면 반드시 복수를 해야 마땅하다는 2가지 명제까지 더해진다. 그렇다면 마음의 동요 없이 그저 충동만으로 화가 야기되기는 힘들 것이다.
충동은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화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된 복잡한 감정이다. 어떤 부당한 일을 겪으면 먼저 그 위협에 분개하고 다음으로 부당한 일이라 규탄하는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그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인간의 온갖 감정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거라면 그건 제어 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문제다.
화라는 감정은 우리 마음이 자발적으로 wdj상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격언들로 어느 정도 경감시킬 수 있다.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흥분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화라고 보기 힘들다. 이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동요이며 격정이 아니라 그저 격정으로 접어드는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
■ 화는 이성을 뛰어넘어 저 멀리까지 돌진한다]
격정이란 눈앞에 벌어지는 특정한 장면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감정을 촉발시킬 수 있도록 자신을 놓아주고 그 감정에 따를 때 발생하는 것이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욕정을 느끼고 깊은 한숨을 쉬고 순간 눈빛이 번득이는 것 같은 일시적 반응들을 격정이라고 본다면, 그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자동반사적인 신체의 변화일 뿐이다.
화라는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정해진 틀을 뚫고 나가려는 강한 반동과 같다. 이는 마음의 동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성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복수를 하거나 처벌을 감행할 수 없다.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는데 이성이나 다른 이유로 복수를 접고 마음이 안정되었다면 그건 화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이성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마음의 동요를 느꼈던 것뿐이다. 화라는 감정은 이성을 뛰어넘어 저 멀리까지 나아가려고 하는 맹렬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생각 때문에 일시적으로 마음이 동요하고 복잡하다면 그건 화가 아니다. 화는 그 일시적 동요 이후에 벌어지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며, 그저 생각에 그치지 않고 복수를 결심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화는 개인적 선택에서 시작되어 결연한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두려움은 회피하려는 마음을 낳고, 화는 돌진하려는 마음을 가져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격정은 어떻게 시작되고 뜨거운 기세를 더하는가.
초기에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불거지며 격정이 시작되기 전 준비 e나계로 들어서고 위협적인 신호가 시작된다. 그 다음 난 부당한 일을 겪었으니까 복수를 하는 것이 나의 당연한 의무다, 혹은 그 사람은 죄를 지었으니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찾으려는 복합적인 감정들로 이어진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서 이성을 잃으며 당위성 여부와 상관없이 복수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첫 번째 e나계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마음의 동요는 이성으로도 막을 수 없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는 불가피한 신체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하품을 하면 나도 모르게 따라서 하품이 나고, 누군가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려고 하면 저절로 눈을 깜빡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이어져서 마음이 동요하고 자발적으로 행동에 옮기게 되는 단계에서는 이성으로 제어가 가능하다.
■ 잔혹함은 화가 아니라 그보다 더 끔찍한 불치병이다.
포악함이란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어 그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해를 입히는 것과 다르다. 그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수만 있다면 스스로 피해를 당하는 것마저도 감수할 수 있는 감정이다. 포악한 사람들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을 위해서 타인을 채찍으로 때리고 칼로 난도질 한다.
포악함이라는 악덕은 화에서 시작되어 점차 그 한계를 넘어서 지나친 탐욕에 젖어 자비심마저 잊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잔혹함은 화가 아니라 그보다 더 끔찍한 불치병이라고 보아야 한다.
■ 슬픔은 화의 벗이며, 모든 분노는 슬픔으로 끝맺는다.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통해 느끼는 기쁨은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타인의 과오로 쉽게 화를 느낀다면 그건 옹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는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보다 하나 나을 것이 없고 대부분 그보다 나쁘다.
만약 현명한 자가 죄를 지은 자를 보고 화를 내야 한다면 죄질이 클수록 더 화가 날 것이고 화를 내는 빈도도 잦아질 것이다. 그러다보면 현자는 그저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 인간의 죄악에 대해 현자들이 일일이 화를 낼 순 없다.
만약 현자가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한다면 절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온 사방이 악덕과 죄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현자들이 일일이 화를 낸다면 그들은 분노로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 긴 호흡을 유지하며 끈질긴 악덕과 맞서라.
그냥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과오를 저지르는 개개인에게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온갖 과오들을 이해하고 인류 전체를 가슴에 품고 용서하려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의 사상가 데모크리토스는 언제 어디서나 웃는 얼굴을 보였다고 한다. 아무리 심각한 일에 골몰한 사람을 보더라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화가 끼어들 틈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를 웃게 하거나 울게 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 화는 그저 끔찍한 것일 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화라는 감정이 누군가 위협을 느낄 만큼 강력하다면 타인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이유로 증오심을 유발할 것이다. 무시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화의 강도가 낮다면 경멸을 받거나 잠시 조롱거리가 되는 게 고작이다. 그 정도 차이라면 별 의미도 없이 과도하게 분노하는 것만큼 바보 짓이 어디 있겠는가?
남에게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은 야수에게나 좋은 무기가 된다.
화는 그저 끔찍한 것일 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흉측한 가면을 쓰고 나서면 아이들이 무서워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 공포는 처음 공포를 자아낸 자에게 반드시 되돌아오고 스스로 평온의 경지에 있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듯, 두려움을 무기로 강해진 것들은 그 스스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사자들조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사납기로 소문난 맹수들도 시커먼 그림자, 이상한 소음과 냄새 때문에 경기를 한다. 타인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공포를 자아낸다.
■ 그 어떠한 격정도 화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않다.
■ 화만큼 격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격정도 없다.
다른 격정들은 잠시 미루어 둘 수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 치유가 가능하지만, 화는 능동적이고 자멸적인 폭력성을 지니고 있어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다.
화는 시작과 동시에 최고조로 올라가서 끝없이 거침없이 나아간다. 다른 악덕들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에 그치지만 화는 우리 마음을 송두리째 낚아챈다. 특히 자제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고통을 준다.
화는 정해진 목표만을 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해진 목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들을 모조리 공격한다. ~~화는 우리 마음을 완전히 뒺비어 버린다.
■ 화가 광적인 성향을 띠고 있음을 잘 깨닫자.
■ 화라는 감정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 한다.
■ 화는 그 어떤 격정보다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3장. 화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
■ 제멋대로인 화라는 감정도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
병에 걸려 아프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없듯이 화를 내면서 선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인간의 정신력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당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익숙해 질 수 있으며, 제아무리 강력하고 제멋대로인 격정이라도 규율을 통해서 길들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이성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그대로 따른다.
어떤 사람은 절대 웃지 않는 법을 익혔고, 어떤 사람은 질주에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음료를 딱 끊기도 한다. 오랜 훈련을 통해서 짧은 수면을 취하고도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고된 작업을 해내는 사람도 있다.
■ 마음에서 화라는 악덕을 먼저 지워내야 한다.
화라는 감정이 유용하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그런 사악한 격정을 감싸려고 할 이유는 없다.
화라는 감정을 완전히 지우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악함은 충분히 치유가 가능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선을 원하기 때문에 굳은 결심을 가지고 생활하면 하늘도 우리를 도울 것이다.
■ 절대 화라는 감정에게 곁을 내어줘서는 안된다.
모욕적인 한마디를 참지 못해 멀리 추방당하는 자들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말을 묵묵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화라는 감정에 지나치게 휩쓸려 몸과 마음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 손으로 목에 칼을 들이민 꼴이 되어버린다.
■ 화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씩씩하게 대처하라.
현명한 사람은 중도를 유지해야 한다. 강력한 힘이 필요할 때는 화의 동무을 구하지 말고 씩씩하게 대처해야 한다.
■ 화내지 말고 진실을 알 때까지 적당한 시간을 가져라.
화는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잘못된 믿음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맏은 상처가 너무 확연해 눈에 띄더라도 절대 분노하지 말라. 때로는 잘못된 믿음이 진실인 양 위장하고 있기도 하니까. 진실을 알 때까지 적당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모략을 일삼는 목소리에 쉽게 귀를 기울이지 말라.
죄를 캐묻고 처벌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지만 한 번 처벌을 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를 보라, 그는 매우 용기 있는 자였다. 그의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필리포스가 독살을 하려 들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경고 섞인 편지를 읽고도, 친구가 내민 술잔을 서슴없이 들이켰다. 그만큼 오랜 벗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귀에 들리는 이야기를 쉽게 믿어선 안 된다.
불신을 품고 의심을 하는 것보다 그냥 속는 편이 나을 때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귀를 닫을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의심과 불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의심과 불신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일단 의심이 고개를 들면 이를 뒷받침할 증거들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의심했던 일이 아무 근거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스스로 반성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 사소한 일이나 문제 때문에 쉽사리 화내지 말자.
일꾼이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물을 마시려는데 너무 뜨겁다거나 소파가 엉망이라거나 음식이 제멋대로 널려 있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로 화를 내는 것은 광기와 다를 바 없다. 산들바람만 불어도 몸을 파르르 떠는 사람은 불쌍하지만 건강에 문제가 잇는 사람이다. 새하얀 옷을 보고 눈이 부시다고 말한다면 시력에 문제가 잇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일하는 모습만 봐도 온몸이 욱신가리는 사람은 유흥에 찌들어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언젠가 시바리스의 시민이었던 민디리데스는 눈앞에서 삽질을 하고 곡괭이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며, 자기 앞에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강아지가 다리에 매달린다고, 일꾼이 실수로 열쇠를 흘렸다고 해서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평소 참을성이 없고 과도한 호사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쉽사리 화를 느낀다. 하지만 이성을 굳게 단련시키면 매우 강력한 타격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쉬이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 애꿎은 물건을 향해 화풀이를 하지 말라.
우리는 화를 내도 만만한 상대이거나 다시 자신한테 복수를 할 수 없는 상대만 골라서 화를 낸다. 다시 복수를 할 수 없는 상대 중에는 책과 같은 무생물도 포한된다.
■ 스스로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 그것부터 반성하자.
■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착각에서 화는 시작된다.
온갖 세상사를 자로 재듯이 공정하게 재판한다면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분노는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믿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서 처벌을 받거나 질책을 받았을 때는 곧바로 반감부터 품는다.
■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화를 늦추어라.
화를 치유하는 최고의 방법은 잠시 늦추는 것이다. 악행을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 화를 늦추어라.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잠시만 늦추면 화도 점차 잦아든다. 한 번에 화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화를 제거하다 보면 어느새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말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고 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것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남에게 전해들은 말은 쉽게 믿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를 속일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그 자신도 속아서 말을 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거짓 핑계를 대기 위해 남에게 죄를 덮어씌운다.
■ 남의 도덕성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본능부터 고려하자.
우리가 공정하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악인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놀랄 필요가 있을까? 적이 우리를 다치게 하고 친구와 말싸움을 하고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고 하인이 실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파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수장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변명은 그 점은 예상치 못했다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이 인간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배신하고 배은망덕하고 탐욕을 부리고 무례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도덕성을 평가하기 전에 인간의 본능적인 면부터 고려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사건이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라. 배를 조종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만하여 돛을 활짝 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언제든 밧줄을 짧게 당겨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최고의 복수는 복수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선의에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악의에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복수하고 앙가품을 하는 것은 아무리 정당한 상황이라도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 마음에 상처를 얻게 마련이다.
■ 복수를 하더라도 화라는 감정은 배제하라.
■ 누군가 내게 화를 낸다면 오히려 친절함으로 대하라.
동일한 직책의 사람과 다투면 사이가 벌어지고 윗사람과 싸우는 건 바보짓이며 아랫사람과 싸우는 것은 한심한 짓이다.
연약한 생물들은 건드리기만 해도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기분 나쁜 감정을 과거의 추억으로 상쇄하라.
누군가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면 오히려 친절함으로 대해야 한다. 말싸움은 한쪽에서 먼저 양보를 하면 곧바로 끝난다. 싸움에는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 화를 내며 싸움을 시작했더라도 먼저 물러서는 자가 승리하게 된다.
■ 일단 화를 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알자.
멈춰야 할 때 멈추고, 정해진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정해진 곳으로 가며, 뛰다가 언제든 갈을 수 있을 정도의 민첩성만 갖추면 충분하다.
■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화가 나 있는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 고결한 영혼은 악행에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조용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화에 휘둘리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 화를 억누르는 전략은 각자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 너무 과중하거나 중요한 일에 휘둘리지 말자.
■ 너무 소소하거나 과중한 일을 맡지 말자.
■ 화라는 감정을 최대한 가슴 깊숙이 숨겨두어라.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면 억지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수를 줄였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든 화를 억누르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다.
4장. 화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법
■ 화를 자극하는 것들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자.
■ 화를 자극할 만한 사람들과 아예 어울리지 말자.
우리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이를 견뎌낼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까이 어울리는 사람들끼리는 성격도 닮아가기 마련이다.
■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논쟁을 멈추어야 한다.
■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아야 쉽사리 상처받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 목이마른 사람, 그리고 불만에 가득 찬 사람도 싸울 거리를 찾아 헤맨다.
■ 내가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 모욕을 받았다고 여기지 말고 그의 농담으로 치부하라.
가장 좋은 방법은 가끔은 못 들은 척도 하고 그냥 웃어넘기기도 하고 아니면 용서하고 마는 것이다. 화를 참기 위한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그저 농담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제일 좋다.
■ 나를 화나게 만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화가 제 발로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스스로 화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절대로 화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 아무리 화가 우리 발목을 잡아도 거칠게 뿌리칠 줄 알아야 한다.
■ 화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시 멈추는 것이다.
■ 그의 변명을 그저 믿어주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자.
■ 그 어떠한 타격에도 미동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더 큰 벌은 없다.
■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건 오직 용서뿐이다.
■ 상대의 사악함에 친절함으로 맞서야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식어가는 분노에 다시 불을 지펴보려고 애써도 제풀에 지쳐 사라질 것이다.
■ 불같이 화를 내야만 정당성을 인정 받는게 아니다.
칭찬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증오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측은지심을 가져야 마땅한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그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 화의 시작점이 하찮은 일이었음을 깨닫자.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낸다. 수소는 붉은색을 보고 흥분하고 코브라는 그림자만 봐도 고개를 쳐들며, 곰과 사자는 펄럭이는 천 조각에 흥분한다. 거칠고 야만적인 본성을 타고 난 생명체들은 소소한 것들에 자극을 받는다.
■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자.
타인이 가진 것에만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절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 하찮은 문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 되자.
■ 웃어넘기면 될 소소한 일 때문에 눈물을 쏟지 말자.
■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탐욕을 억누르자.
■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자.
■ 화를 내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고 소중하다.
■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보내자.
■ 손해를 입거나 경멸을 당해도 휘둘리지 말고 인내하라.
[Review]
예전 사람들에겐 화를 표현하지 못하고 참아서 걸리는 ‘화병’이 문제였다면, 현대인들에겐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분노 조절 장애’가 더 큰 문제이다. 흔히 ‘내면의 불꽃’이라고 불리는 화는 모든 자제력, 도덕과 상식을 삼켜버리고 상대와 쌓아 올린 유대감을 돌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지듯 파멸을 자초한다.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아주 오래된 고전이지만 분노의 메커니즘을 뇌 과학적으로 다루는 요즘 나오는 책들과는 달리, 단순 이성의 힘만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분노는 표출하기보다는 삭이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결론이다. 이 책에 예시된 독수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고 그만큼 날지 못하는 독수리가 자신의 깃털로 분노의 화살을 삼아서 하나씩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독수리는 그나마 조금 날던 것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본문>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1장: 화는 왜 인간에게 불필요한가?
2장: 화라는 감정의 실체를 알자
3장: 화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
4장: 화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마다 짧은 주제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살면서 지난날을 회상할 때 분노로 인한 실수가 가장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분노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부다. 최근 MRI를 이용한 뇌 연구가 발전하면서, 참을 수 없는 화를 통제할 수 있는 생물학적 브레이크가 뇌의 ‘전전두엽‘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분노 성향은 선천적일지라도 이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은 후천적 습관이며, 분노 조절 기법을 배우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알아냈다.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격정을 통해서 보면, 마치 안개를 통하여 보는 물체와 같이 잘못들이 우리에게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고 말하며 분노를 조절하려면 잔혹하게 자기를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성서에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저자인 세네카(BC 4년 추정 ~ 65년)는 어린 네로 황제(37~68)의 가정교사를 시작으로 54년 황제로 등극하자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로 말년에 이르러 그가 친모를 살해하는 폭정이 극으로 치닫게 되자 네로의 곁을 떠나 있다가 65년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모함으로 황제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그의 두 형제와 조카들까지 죽음을 맞았다. 세네카의 형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을 심문하던 ‘갈리오’ 총독으로 알려져 있다.
Go My BookRe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