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회복을 위한 특별기도회)
5. 기도의 불을 끄지 말라!(빌 4:6-7/사망의 그늘에 앉아)
∙묵상을 위한 이야기 : <아궁이>
추운 겨울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시골 마음 사람들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땠습니다. 그런데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야 하고, 작고 연약한 가지에 붙은 불이 장작에 옮겨 붙도록 쉴 새 없이 부채질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굵은 장작에 불을 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장작과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불붙은 성냥을 던지듯 기도한다고 되지는 않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해 불을 붙여야죠. 마치 한나가 술 취한 것으로 보일정도로 간절하게 매달렸듯이, 또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날이 새도록 씨름하던 손을 놓지 않았듯이 기도의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능력의 종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사환을 일곱 번이나 보낼 때까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검질긴 과정에 결국 하나님의 불이 임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이러할 진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엎드리고 또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찬송이 나오기까지…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가기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마게도냐로 건너갈 것을 권합니다. 바울은 그후에 마게도냐로 건너가기를 힘씁니다(행 16:10). 그렇게 해서 건너간 곳이 마게도냐 땅 빌립보입니다. 거기서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것도 죽기 직전까지 맞았습니다. 게다가 그 발에 차꼬를 채웁니다. 여기서 차꼬라는 것은 단순한 발찌 같은 것이 아니라, 양 다리를 찢듯이 벌려 놓고 쇠사슬을 팽팽하게 채워놓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그 시간에도 고통을 주겠다는 심산입니다. 만약 그들이 연약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렇게 항의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이러시려고 빌립보에 가라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 때에도 기도의 불을 끄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히려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에 양발에 차꼬를 채워 넓게 벌어진 채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이 어떠한지 말입니다. 바울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바울을 그냥 두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그 발에 매인 차꼬를 풀어주십니다. 그 뒤의 일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테니 생략하겠지만 그런 지경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바울을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열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힘겨운 상황에서 기도의 불을 꺼뜨리지 않은 바울을 기뻐하셨습니다.
후일 바울은 자신이 박해들 받던 바로 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때에 빌립보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려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냐고 항의할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깊은 기도입니다. 고난 중에도 염려대신 기도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함으로 아뢰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 후에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저는 오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바울과 같아서 고난 중에도 염려대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넘어서 이 땅을 흔들며 임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어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평강으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