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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은총, 하나님이 일하신다.
❍ 시 127:1-5
• 인사
거룩한 주일 하나님을 찾아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하며, 순례의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시‧공간을 바벨론 포로 시절로 옮겨놓는 것과 같습니다. 포로기에 불가피하게 성전을 찾지 못한 백성들이 마침내 모든 굴레를 벗고 시온에 올랐던 것처럼, 그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제한되었던 예배당 문을 이제야 활짝 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저는 시편에 나오는 모든 순례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새벽마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하며,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 영적 가치들을 더듬어 짚어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예배당 문뿐만 아니라 하늘의 문을 열고 환대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과거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러 성전에 나오라’는 명령을 따라, 다음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여 모든 교우들에게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배당에 나올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거리두기의 결박도 이제 풀어지고, 우리를 안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강하게 역사하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예배당의 회복과 더불어 여러분의 믿음도 이전보다 더 강하여지는 은총으로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 한 복판의 위험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7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5편 중 한 복판에 있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한 복판에는 격랑이 일기 시작하고, 모든 부조리와 불협화음과 혼란과 의심이 총망라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지루한 여정이 반복되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나싶어 길을 잃기 딱 좋은 지점입니다. 전문용어로 ‘본전 생각난다.’고 하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은 식어가고, 내가 하는 수고에 대한 적절한 보상심리가 자꾸 커지는 곳입니다. 한 복판은 길을 잃기 딱 좋은 지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엘룰은 인류의 문명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부각되는 중대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수단화 되었고, 더 이상 목적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게 일상에 지친 모든 이들이 경계해야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이 진행될수록 그 목적은 희미해지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까만 골몰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는 처음에 사랑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그 사랑은 희미해지고, 이 결혼이 내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자꾸 커집니다. 거기가 바로 결혼이 수단이 되는 지점입니다. 직장생활도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내린 책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가 있고, 매사에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립니다(계 2:4).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넘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돌이켜 처음 행위와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십니다(계 2:5). 그래서 우리는 이 순례의 한 복판에서 중간점검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지점이 우리 믿음의 중심을 깊이 박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복판에서 믿음의 말뚝을 깊이 박아놓지 않으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일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먼저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또한 이후에는 어디를 지나야가야 할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일주일간의 순례에서 우리는 회개, 섭리, 예배, 섬김, 도움, 안전, 기쁨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지금 거기에 대해서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에서 우리가 걸은 걸음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그 순례 길에서 행복, 인내, 소망, 겸손, 순종, 공동체의 은총을 또한 만날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 은총의 길에서 끝까지 ‘완주하시는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은혜의 근원: 하나님이 일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은 바로 그 순례의 한 복판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사는지, 그 ‘은혜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제 소개만 들어도 오늘 본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시겠죠?
바다로 흐르는 모든 강물에도 시원(始原)이 있듯이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하늘의 은혜에도 그 근원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대전제’입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가 시온에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바라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시온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충분히 적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여기서 우리는 매우 익숙한 구절을 만납니다. ‘헛되며, 헛되도다’
이것은 솔로몬의 전도서에 중심 구절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한 마디로 ‘인생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 허무해진다.’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게 복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그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거하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주인 노릇을 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권태롭고 위험합니다. 세상을 다 차지한 것 같은데, 결국 아무 것도 차지한 것이 없다는 말이 바로 헛되다는 말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기진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솔로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조물주의 몰빵이요, 금수저 중에 금수저다.” 말이 좀 격하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재물이면 재물, 심지어 부인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능력도 출중하여 7년간 성전을 짓고, 자기 왕궁을 위하여 13년의 건축을 진행했습니다. 그만큼 능력과 재물이 풍족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언젠가부터 그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느낍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죠.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늘 아래의 일을 연구하고 살피게 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3000개의 격언과 1005곡의 노래를 지은 지식과 지혜)을 총동원하여도 하나님의 신비를 따라하거나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또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역사에도 이런 헛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율법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하고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다 부서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일 이 과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b)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해서 그리스도만 못하다는 말이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 앞에 겸손해졌다는 뜻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와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지금 네가 그토록 수고하며, 경계하며 지키는 것, 또한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만 하겠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순례 길에서 낙오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일 VS 사람의 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람의 일’에 대하여 좀 구별하여 정리할 필요가 생깁니다. 일이란 모든 이의 삶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대하는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 태도에 따라서 신앙과 불신앙이 갈리기도 한다.
먼저 일에 관하여 성경은 극단적인 두 형태를 경계합니다. 첫째로 바벨탑을 쌓았던 것처럼 교만과 허영에 찬 수고와 둘째로 데살로니가에서 번져 나갔던 극단적인 경건주의(하나님이 하시니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가 바로 그것이죠. 하나님 없는 일(교만)과 하나님은 일하시는데 홀로 노는 게으름이 다 문제입니다.
127편에 나오는 일에 관한 지침의 대전제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이어진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부분을 제쳐놓고,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것처럼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괄호치는 불신앙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했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요 5:17/안식일논쟁 중).
결국 사람의 일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경륜을 따라 수고하는 청지기로서의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하나님이 일하시지) 아니하시면”이라는 전제를 깔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비하여 분명한 한계를 짓게 되는데, 생명이나 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마치 인간의 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교만입니다(동산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이 명심해야 할 주의사항도 여기에서 선명해지는데, 내가 순례하고 있다는 것(내가 지금 이렇게 거룩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순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시는 하나님께 방점을 두고 순례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게 순례의 핵심요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일을 수행하고도, 불신앙의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 하나님을 믿는 자가 평화로운 안식을 얻는다.
우리의 묵상이 여기에 이르면, 그 다음 구절부터는 이해가 쉽습니다. 이어지는 2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우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울 정도로 수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집을 세우기 위함이요, 또한 그 집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고가 하나님 없는 수고라면, 그 수고는 염려이고, 걱정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수고하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의 수고가 이런 어두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믿고 행하는 수고와 하나님 없이 그 수고만 의지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를 짚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 나라 대한민국은 근면 성실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은 근면하고 성실한 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어느 정도로 근면하냐 하면,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37개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이 많기로 2등입니다. (참고로 1등은 멕시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근면한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37개 국가 중에서 35위이고, 조사에 응한 세계 149개국 중에서는 62위입니다. 요약하면 대한민국은 바쁘게 수고하는데,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세계 경제 순위 10위에 오를 만큼 성공했는데, 그 마음에 근심과 불안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직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현 주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지금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불안해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일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일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의 극단적인 경건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하나님 없는 삶을 기획하고, 내가 하는 수고와 일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헛된 마음으로 일하는 게 불신앙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성공을 부른다는 허황된 신화를 쫓으며 거기에 우리 인생의 승부를 걸지 말고,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고 일하신다는 대전제 아래 우리의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내일 일을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전제 아래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풀도 입히고 먹이신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내일은 내일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2절의 후반부의 말씀이 완벽하게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b)
저는 우리 교회 어르신들에게 “푹 자는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늦잠을 자거든 ‘오늘 큰 복이 임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잠은 우리의 모든 것을 멈추는 시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고안하셨습니다. 기계는 멈췄다가 재가동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멈추었다가 다시 가게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원리는 인간의 모든 것을 멈추게 하시는 안식의 시간을 정하시고, 그 밤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요,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한 시간 덜 자고, 한 시간 덜 쉬는 것이 우리의 성공을 부른다는 생각 자체가 땅에 매이는 삶입니다. 쉴 때 쉬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고 평안히 자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 잘 때에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 내 손을 벗어난 기업과 자랑
마지막으로 3절~5절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다가 3절부터 갑자기 자식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하다가 느닷없이 자식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마도 자식 양육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해준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잘되는 자식을 보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내 손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식을 향한 소망을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시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말이고, 지금까지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식들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용어는 여호와의 기업, 여호와의 상급이라는 말입니다.
자식은 내 수고로 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통제 아래 있지도 않고, 때때로 부모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들을 친히 키우시고 기업으로 상급으로 삼으신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르면, 모든 기업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이어집니다.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상업을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식이 기업이 되고, 상급이 되어서 부모에게 돌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랍니다.
여러분들 중에 자식 덕보고 사는 분들 있습니까? 그것은 민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거꾸로 부모를 잘 공양하는 자식들 있습니까? 그러면 복된 일을 하고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은 우리의 터전에 여호와의 기업이 우뚝 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상급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 자식들이 있으면,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5절). 어떤 경우에도 담대하게 말하고,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왜? 내게는 여호와의 기업이요 상급이 자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든든하죠.
원래 자녀 이야기는 부모의 생각을 참 복잡하게 만듭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그를 위하여 수고하지만 그 결과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 수고가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자식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세워서 우리에게 다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식은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책임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 왔을 때부터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 아래 작은 소임을 감당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수고는 어디에 기반하고 있습니까? 부디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믿음을 일하시기 바라며, 내 손길이 미치지 않는 밤에도 하나님 믿고 평안하게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업과 상급으로 함께 하실 것이며,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