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1>
응답받는 기도, 응답하는 기도 - 기도자가 누구인지가 핵심이다.
✍ 함께 읽을 말씀 : 열왕기하 13장 19절
가끔 성도들이 던지는 질문에 목회자들을 쩔쩔맬 수밖에 없다. 이유는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주어졌다고 하자.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받나요?”
여기에 대해서 목회자는 성경의 여러 기도 사례들을 열거하며 대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응답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의 권세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는 경우가 있었음을 성경의 권위를 빌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의 최선이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 성경에서 응답받은 기도의 경우를 보면, 거기에서 도출된 응답의 원리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렇게 하면 응답된다는 일반적인 원리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관계의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온다. 기도응답은 비결이 아니라 관계이다. 이것이 언약에 담긴 속뜻이다.
예를 들어 남의 자식이 훌륭하다고 유산을 남겨주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유산은 내 자식이 부모의 맘에 들었을 때에 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입장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여기서 명확한 입장이 정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언약을 분명히 한 사람)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든 자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의 원칙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맘에 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응답의 요령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맘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묵상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맘에 들까?
먼저 고난 주간에 공감할 만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굉장히 신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과정에서 생략된 중요한 단계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먼저 묻고,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한 후에 해결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질문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서 자기 질문만 이어가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정중하지도 않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아람의 위협 속에 자신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급하게 달려온다. 엘리사는 그런 왕의 모습을 불쌍하게 여겨 아람군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요아스는 성의 없게 반응한다. 왜? 지금 그는 자기 용무가 더 급했고,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해놓으신 모든 조치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그런 왕을 책망하며 말한다. 당신이 보인 성의(세번의 경우)만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아스가 보인 성의가 문제였고, 더 나아가 요아스가 핵심이다. 아무리 그 중간에 엘리사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구하는 자, 즉 요아스 그 사람의 믿음만큼 응대하신 것이다. 기도자가 어떠한 자인가가 그 응답의 유무를 가르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어떠한 성의를 갖고 대답하는지 그 응답하는 방식에 따라서 응답받는 기도의 유무와 응답의 분량이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