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회복을 위한 두이레 특별새벽기도회)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순례의 길 / 섬김(123편)
❍말씀 : 시편 123편 1-4절
❍찬송 : “겸손히 주를 섬길 때”(찬송가 212장)
❍기도 : 유향옥 권사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성도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변의 상황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구거나 좌절하지 않고, ‘위가 항상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행 7:55).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묵상할 지점은 스데반은 지금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 순간 하늘을 보며, ‘내 위기를 수습할 방도’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며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며 찬송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의 능력을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이는 곧 ‘순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관한 질문으로 치환(置換)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유진 피터슨은 이 지점에서 순례의 길이 ‘온전한 섬김’을 이루는 성숙의 길이라 지적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필요할 때에 하늘의 지원을 요청하는 민원창구가 아니라, 오롯이 하늘의 주를 올려다보는 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고달픈 인생 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왜’라는 질문이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도우시는지에 대한 그 궁극적인 질문을 빠뜨리면, 하늘을 동원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탕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섬김이 없는 신앙은 아버지의 것(하늘의 능력)을 팔아 내 기쁨(향락)을 사는 자는 탕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순례의 길(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섬김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하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도우실 것입니다. 결국 섬김의 길을 잃지 않은 자가 은총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순례자가 지닌 가장 위력적인 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세 번에 걸쳐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청합니다(2-3절).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순례의 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마땅한 기대이고, 이루어질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하늘의 보좌와 순례자의 길이 맞닿은 것이고, 그렇게 하늘과 맞닿은 교통로에서 우리의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은혜는 땅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순례자의 시선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원래 예배의 어원이 ‘복무하다’(דבע-아보다, λειτουρϒία) 혹은 ‘그 발 아래 엎드린다’(החשׁ-샤하, προσκυνέω)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의 말씀과 손짓에 민첩하게 복무하는 것입니다(2절). 순례자는 그런 섬김의 도를 제대로 받드는 것이며, 그의 섬김이 온전할수록 그에게 임하는 은혜가 막힘없이 흐르게 됩니다. 순례는 예속(隷屬)의 땅을 밟아가며 걷는 것이지만, 결국 하늘 보좌에 잇대어진 길이기에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넘칠지라도(4절) 우리는 하늘의 은혜를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모쪼록 그 순례 길에서 하늘의 평안과 형통을 충분히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