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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시작, 발을 빼는 용기
❍ 시 120:1-7
• 인사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전을 찾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전보다 더 강하여지는 은총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온라인으로 예배하시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도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단계적 신앙회복
십여 년 전에 저는 ‘도대체 교인들을 예배당으로 이끄는 마음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분들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몹시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저 보고 싶어서 오신 것은 아닌 것 같고…’
제가 감히 미루어 추측하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기에’ 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인생의 수많은 질고 가운데 피할 길을 찾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찾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영적 습관을 따라 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며, 누구 눈치 보며 오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기 위하여 오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찌 오셨던 간에 오늘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마음을 모아 간구한다면 주께서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시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cf. 시 73:28),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4:8).
현재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은 11월부터는 단계적 일상회복(with Corona)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시행지침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 원칙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단계적으로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일상의 회복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죠. 조만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위드코로나(with Corona)의 지침들이 조심스럽게 제기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교회 또한 지난 21개월간 흐트러진 마음들을 다시 조이고, 일상에 영적 긴장감을 부여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일상, 예배가 무너진 신앙은 정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2주간 주일예배는 물론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시편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함께 묵상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의 전을 찾았던 그 처음 마음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 사회적으로는 단계적 일상회복의 시기에 교회적으로는 단계적 신앙회복, 예배회복의 시기로 만들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위드코로나(with Corona)를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위드갓(with God), 즉 임마누엘의 시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만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로서 저는 앞으로 2주간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을 권면 드립니다. 주일은 물론 매일 새벽 하나님의 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힘들더라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부터 이미 역사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과거의 시인들의 노래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불러야할 노래이고,,, 2주간의 단계적 신앙회복 훈련을 통하여 이 시편을 함께 묵상하며 노래할 때에 ‘이전보다 더 강하여지는 복’이 임하리라 믿습니다. 모쪼록 힘을 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어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온 땅을 회복시키는 에스겔의 환상(겔 47장)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 되고, 내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하나씩 차근차근 묵상해나갑니다. 이 책의 원제는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인데, 저자는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만이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해 주며, 이는 과거에나 오늘이나 언제나 그래 왔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쉽게 채널을 돌리는 현대인의 감각적 성향은 계속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종교는 이런 현대인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이벤트성 행사나 흥미위주의 소재들을 개발해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이런 흥미꺼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을 이어갈 때에 가능해진답니다.
유진 피터슨이 찾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의 기독교전통은 제자도와 순례자의 길입니다. 그는 시편에 나오는 성전을 올라가는 노래가 그런 순례자의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며 그 말씀들을 소개합니다. 저는 그의 말에 상당부분 동의하고, 그의 안내와 또 저의 주석을 달아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여러분에게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그의 책에서 제가 감동받은 문구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기념비가 아니라 발자욱이다. 기념비에는 ‘적어도 난 이만큼은 해 냈노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발자욱은 ‘다음 걸음을 뗄 때까지 잠시 여기 머물다 가노라’라고 말한다.”
저는 이런 그의 말이 참 좋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성전을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요, 정복한 자의 승전가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여정 자체가 노래가 되고, 그 여정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자기 고백이겠죠. 저는 이 노래들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전을 찾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나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며, 그 충만한 기쁨으로 여러분의 노래를 이 예배당에서 부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From: 우리는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가?
그럼 그 첫 번째 여정으로 시편 120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20편은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순례 길을 나서는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거짓과 악의가 판치는 세상, 그런 곳에서 익사할 것 같은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무엇을 들어도, 누구를 만나도 좀처럼 믿지 못하겠는 불신의 사회요, 숨 쉬는 매 순간이 위협이 되는 세상살이에 신물도 납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철저하게 비위 상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거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전을 향한 발걸음을 떼어놓게 됩니다. 성전을 향한 첫걸음은 이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120편은 바로 그런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1절입니다.
“내가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시인은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그 세상에서 발을 빼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먼저 2절을 보면,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때문에 당하는 생명의 위협을 말합니다(2절). 그가 사는 세상은 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이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속여서라도 자신의 이익과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탐욕 아닐까요? 시인은 그런 세상에 질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변론와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과 어울리면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해진다고 말합니다(딤전 6:4-5). 거짓말하는 자들 틈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저 다툴 뿐이죠. 시인은 그런 세상에 질렸습니다.
이어서 4절을 보면, 시인은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 숯불의 고통을 당합니다(4절). 그냥 화살도 아픈데, 장사가 쏘는 날카로운 화살은 얼마나 깊이 박히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화살을 쏘아댑니다. 게다가 로뎀나무의 숯불을 잘 꺼지지도 않는 화력이 강력한 숯불을 의미하는데, 그 숯불이 살을 지지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시인은 자신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 세상이 싫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6~7절에서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과 싸우려는 자들과의 불화를 말합니다(6-7절) 매 순간 싸우자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불쾌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여도 다 싸움꺼리가 되는 세상에서 시인은 몸과 마음이 피곤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시인이 처한 세상의 현실이자, 고통의 이유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흉악하고 더러운 세상, 즉 거짓을 말하고, 상처를 주며, 싸우자고 덤비는 세상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이유이고, 거기서부터 그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 회개, 돌아서는 결단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시인의 기도는 그저 앉아서 드리는 기도에 멈추지 않고, 불의한 세상에서 자신의 발을 빼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이런 세상이 더럽다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발을 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순례의 시작입니다. 다같이 5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여기서 메섹은 무역상인데,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자가 아니라 사람까지 사고팝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파렴치한이죠. 또한 게달은 이스마엘의 두 번째 아들로 하나님을 모르고 야만족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며 약탈하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탐욕스럽고 거친 세상에서 지친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여기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머무는 것이 자신에게 화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곳이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님을 확실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런 자리에서 발을 빼는 것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회개는 어떤 감정적인 느낌이나 격정적인 마음을 넘어서 삶을 돌이키는 결단입니다. 아울러 내가 나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경영할 수 있고 내가 가진 능력이나 배경을 스스로 쟁취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판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회개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이 내가 머물 곳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순례의 길에 오르는 결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잃어버렸던 인생의 본래 방향을 되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성전으로 향한 발걸음이라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 하나님의 명령과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살후 3:6).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들이고, 우리가 애써 지킨 믿음의 도를 흐트러뜨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떠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 합니다.
여러분, 순례는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일단 떠나야 시작됩니다. 순례의 시작은 거짓되고 불의한 자리를 털어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자리들을 정리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도 과감하게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이고 살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멘’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먹고 살 걱정에 불의한 자리를 쉽사리 정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떠라나고 하십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믿고 자리를 터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위를 환기하기 위하여 옛 이야기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읍이 나옵니다. 아마도 오늘 시인이 말한 것과 거의 흡사한 동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읍을 심판하시고자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리시는데,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롯의 식구들에게 미리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소돔성을 떠나는 그 순간, 그 성읍의 화려함과 안락함이 아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발을 빼야하고 돌아서야하는 땅에 미련을 두는 것은 화근이 됩니다. 오늘 시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메섹과 게달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사실 세상에 자리를 깐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악의 현실입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거기에 물들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런 악의 자리에서 결국 발을 빼야 합니다. 발을 빼는 용기가 필요하죠.
시인 구상은 <신령한 소유>라는 시에서 험악한 세상에서 발을 빼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사 나는 탕아(蕩兒)가 아버지 품에
되돌아온 심회(心懷)로
세상만물을 바라본다.
탕자는 제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머문 곳은 결국 돼지들이 먹은 주엄 열매는 먹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털고 아버지의 품에 돌아옵니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세상 만물을 바라보니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죠.
우리가 불의한 세상에서 발을 빼고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인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주실 요량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적 순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 때마다 순례를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집착하는 그 자리를 떠날 기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에서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각자의 삶을 자리를 떠나 성전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별됨이고, 거룩함입니다. 그 떠남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신령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구상 시인이 말하는 세상은 그렇게 달리 보는 세상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예배당으로 나오는 발걸음 자체가 거룩한 여정이고, 하나님은 그 여정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실 것이라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길던 짧던, 번거롭든 편안하든, 그 길이 복된 이유는 먼저 우리를 어지럽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정리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성전에 나아오는 길은 잠시나마 내가 머물던 세상에서 발을 빼라는 것이고, 다시 그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할지를 신령한 눈으로 돌아보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처음 드는 마음은 걱정입니다. ‘이제 무얼 먹고 살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는 때는 수확의 시절입니다. 얼마나 바쁘고 할 일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순례를 나서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인생이고,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주셔야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동안은 내 힘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아등바등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주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살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것이 또한 회개이고, 순례의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더 이삭 메섹과 게달,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 그런 방식을 정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은총으로 이어지는 순례를 시작하게 됩니다.
순례는 결코 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서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 일진데, 한 발짝은 세상의 방식에 한 발짝은 성전에 걸치는 이중적인 생활에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시편 19편을 보면, 정직한 자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열기를 피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거짓되고 이중적인 삶이 거할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는 그런 세상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허물을 벗어나 오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직한 인생을 꿈꿉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이 가장 감동적인데, 제가 읽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우리가 이 땅을 살아도 이런 고백을 드리며 산다면, 우리는 이미 순례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을 묵상까지 열납하시고, 은혜로 갚으실 것입니다. 모쪼록 그런 영적 순례를 시작하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한 방향의 길을 걸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오늘부터 15일간 시편에 기록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합니다. 주일에는 주일설교문을 올려드리고, 평일에는 새벽묵상자료를 올려드립니다. 말씀을 거듭 묵상하면서 순례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은총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