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회복을 위한 두이레 특별새벽기도회)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순례의 길 / 겸손(131편)
❍말씀 : 시편 131편 1-3절
❍찬송 : “겸손히 주를 섬길 때”(찬송가 212장)
❍기도 : 임준표 집사
존 베일리는 말하기를 “겸손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며, 교만은 자아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일체의 시도는 교만이며, 교만은 하나님 없이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반면에 성경에 등장하는 겸손이란 단어는 정반대의 뜻을 지녔습니다. 겸손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나우(ונצ)로 ‘고난으로 말미암아 꺾였다’ 혹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온유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겸손할까요? 고난의 현장에서 내가 주도하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인정하고 의뢰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교만과 손절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무기력해지고, 초라해 지고, 아무도 자기 인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불신 때문입니다.
시편 131편의 시인은 이런 교만을 자기 인생에서 도려냅니다. 가지치기입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만 맺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라고 고백합니다. 농부가 가지치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절제가 내일의 풍성함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농부 되시는 하나님도 이런 가지치기를 하신다고 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본문 1절에서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은 원래 인간에게 허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낼 때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은 채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고 싶은 사람이 이 단어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무너집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자(교만함으로)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욥의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 셀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립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욥의 인생에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겸손이고,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지키는 마지노선입니다. 천지분간이 안 되는 사람이 그 선을 넘나듭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계절을 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철이 든다는 것은 바로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젖 뗀 아이’라는 말은 젖을 먹기 위하여 그 품에 안긴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안함을 알고 찾아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품에 자기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하나님 품에서 그 인생을 계획하고 경영하는 자입니다. 순례자의 몫은 하나님처럼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교만함이 아니요, 젖 달라고 떼쓰는 젖먹이도 아니며, 겸손히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은총으로 삶을 채워가는 사람입니다. 순례자는 천지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가지치기하고, 여호와를 바라며 하루의 삶을 채워나갈 때에 하늘의 평강은 물론 지극한 복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모쪼록 순례의 길에서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겸손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