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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영상 11분 50초 부분에서 영상송출 문제로 영상이 3분간 끊겼습니다.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설교 원고를 올려드립니다.
거듭 영상 송출에 문제가 생긴 점을 사과드립니다.
다시 언약이다.
❍사 43:1-7
• 인사
우리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저는 성경에서 이보다 더 일관되고 분명한 약속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죠.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의 고난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영적 관문입니다(고후 1:9). 우리가 고난의 현장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그렇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에 그런 마음으로 참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회복의 이유
이사야서에 담긴 복음을 4주째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3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포로 신분으로 사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서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8・15해방과 같은 메시지입니다. 내일이 광복 77주년이지 않습니까? 식민지 시대에 억압과 굴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해방의 사건을 일으키시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먼저 그 이야기를 해보죠. 이사야 43장을 보면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는 구절이 이렇습니다.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다”
43장 3절, 11절, 15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반복해서 나오면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로 이 구절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이유입니다. 이게 얼핏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데, 그게 이스라엘의 해방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 싶은 것이죠. 사람에 따라서 다소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면서도 어렵기에 조금 설명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상의 상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상당 부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상식은 누군가 큰일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이 뭔가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엇을 잘했는지 인과관계를 추적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찾습니다. 행여 사람이 무엇인가 잘해서 복을 받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분량입니다. 그보다 큰 몫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세계에서 사람이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시 73:28) 아멘?
예를 들어서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회복시키겠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시는데, 사실 이스라엘은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포로시기에 그들이 금식하며 회개하지도 않았고, 눈에 띄는 영적인 변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폐해진 사람들 속에서 불법과 타락이 더 기승을 부렸고, 살아남기 위하여 신앙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이유는 하나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사람의 지위가 회복되는 것은 임명권자에게 달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복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들은 죄인이고, 그 죄의 값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3장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세속의 논법이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도말(塗抹)하시면서까지 그 자격을 다시 부여해주십니다. 심지어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도말이라는 말이 어려운데, 흙으로 발라서 그 낙인을 없애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풍습에 따르면,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 문에 ‘이 사람은 나에게 얼마의 빚을 지었다’고 공고를 붙였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더 빚을 내주는 사고를 막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채무자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공고문이 계속 붙어 있겠죠. 그러다가 이를 불쌍히 여긴 친족들이나 혹은 이웃들이 그 위에 이런 공고를 붙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빚은 내가 언제까지 갚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람을 채무자가 아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다시 평가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 공고문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네 허물을 도말하겠다. 그리고 나는 네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은혜는 바로 그 죄인, 채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그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내리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나를 위하여’라는 구절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너무 은혜롭습니다. 25절과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예레미야 31장 34절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일시적인 형집행정지가 아니라 완전한 사면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말이죠.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의 악행을 사하시고, 그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을 25절에서는 “나 곧 나”라고 칭하신 하나님이신데, 이게 바로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 속에 머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하여 은혜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지위가 회복되고, 은총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임명권자이신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죠.
이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은 자꾸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처럼 자기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고, 무엇은 해야 은혜를 받는지를 찾다 보면 우리의 신앙은 미로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밀접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언약 안에서 우리의 빚을 탕담해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다시 언약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약’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오늘 본문이 훤히 이해될 것이고 또 성경에 흐르는 맥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언약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인간 사이에 관계가 계약이나 약속으로 맺어진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양쪽 당사자의 지위와 그 관계를 맺게하는 신뢰 즉 믿음입니다.
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은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계속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방식입니다. 이 언약에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신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 목자, 아버지, 왕, 산성, 피난처, 창조주라고 말하는 모든 고백이 다 언약의 내용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자녀, 양 등이라 고백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렇게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죠. ‘목자와 양’으로 ‘왕과 백성’으로 ‘아버지와 자녀’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이 깨지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지우거나, 그 관계를 부정할 때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려는 모든 시도가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지우려는 숱한 시도가 바로 타락이고 죄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이 차지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이 했다고 우기는 모든 행위도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실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지우려는 역사였고, 그때에 작동하는 사탄의 역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교묘하게 분리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굳이 왜 이 언약 이야기를 다시 꺼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킬 때에 바로 이 언약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기에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회복은 언약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본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1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스라엘을 지으신 이라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게 언약의 논법이죠. 그 언약 안에서 구원, 구속이라는 은총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재정립할 때에 회복과 구원의 은총이 허락됩니다.
그래서 1절을 읽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누구시라고 했는지, 또 우리는 하나님께 누구인지를 잘 묵상하게되면 그것만으로도 큰 은혜가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너는 내 것이라.
3절로 넘어가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거룩한 이라, 구원자라 칭하십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너희는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하는 백성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또한 언약의 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바라보며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하는 자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는 또 누구인가를 명시합니다. 결국 이런 언약이 다시 확고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사방에서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5-7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먼저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멘?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이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창조주라, 구원자라 불러도 좋고,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피난처, 나의 목자, 나의 능력이자 힘이라 고백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은 바로 그 언약의 고백을 타고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롬 10:13)는 말씀의 뜻도 같은 맥락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능력을 행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약의 고백에서 시작해서 구원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했지만, 성경은 옛 언약인 구약과 새언약인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라는 하나의 명령으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말하지만, 성경의 원래 이름은 바로 언약입니다.
• 언약의 핵심은 동행이다.
그렇다면 그 언약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본문 2절에 나옵니다. 다같이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혹은 불 가운데로 지날 때는 모두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고난 중에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죠.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물과 불의 위협을 없애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에 우리와 동행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해결하도록 동행하십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당장의 고난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면한 고난 해결보다 근본적인 동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언약은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은총을 덧입고 주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 방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고난 가운데 동행하시어 고난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않도록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구나.” 그래서 예배하고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이사야 4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찬송을 원하신다고 합니다. 무턱대고 찬송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그 경험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편에서는 ‘새노래’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귀찮고 괴로운 존재로 상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관계를 귀찮게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은총에서 멀어진 이유이고, 오늘 우리의 신앙이 밋밋해진 이유입니다.
최근 새벽마다 창세기를 묵상하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 안에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들림을 받았던 에녹, 그리고 방주를 지었던 노아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람들을 묘사할 때에 모두 같은 표현을 씁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2, 24, 6:9)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은 바로 그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결국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됩니다. 에녹은 하늘로 들림을 받았고,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았으며, 심판을 면제받게 됩니다.
그럼 이런 은혜는 그들에게 국한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바로 동행이고,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것 자체가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라 고백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불 가운데를 지날 때에도, 물 가운데를 지날 때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신앙인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도 제목은 임마누엘이 되면 최상입니다. 바로 그 언약으로부터 고난을 이길만한 은총이 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즉, 동행하면) 너희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되고(요 15:5),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도 이루게 되며(요 15:7),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8). 아멘?
주님은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가지가 되는 언약이 공고해질 때에(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이 깃들게 됩니다. 열매가 많고, 기도에 응답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완전한 경지에 올라서게 됩니다. 이게 언약이고, 이게 동행이고, 이게 우리가 열매맺는 인생이 되는 첩경이고, 이게 신앙의 전부입니다.
사실 요즘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음이 심란합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경제가 어렵고, 바이러스는 창궐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고난이고, 풀어야 할 인생의 숙제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 언약의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8복은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예서께서 여덟 번이나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가난해서, 핍박을 받는 등의 이유로 주의 임재, 주의 동행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총과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런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물이든, 불이든, 사망이든 무엇이든 간에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오히려 더 큰 은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어 그 은총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