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경험한 일곱 해 흉년, 지금은 어떻게 대비할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대인 본토 귀환이 늘어나는 이유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창 41:25).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사실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할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매년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이스라엘 본토로 이주(알리야)했다. 아직도 14만 여 명의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한다. 그러나 최근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면전으로 이들의 알리야가 더 빨리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 사태로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미국 유대인들의 수도 평소보다 4배 정도나 더 많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이런 추세는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때의 이스라엘 회복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마지막때에 이스라엘을 이전 땅에 한 국가로 회복시키신다(겔 38:8). 또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겔 39:28).
고대로부터 중동의 이스라엘 땅에 살던 유대인들이 오늘날처럼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아서였다. 마지막때에 그들이 고토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그들이 재림하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방랑) 시대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자 그리스도(메시아)로 전파되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사도 바울도 교회 시대를 통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했다(롬 11:25-26). 예수님 또한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경에 로마의 침공으로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송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분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3:38-39).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 모든 말씀들로 볼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들에 자극받아 현재 전 세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가고 있는 추세는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워지고 있다는 중대한 징조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창세기 37장 이후부터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해준 일로(창 40:5-23) 훗날 애굽의 바로 왕이 꾼 꿈을 해몽해주게 된 사건이 결정적인 배경이다. 당시 바로는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먼저 나오더니 나중에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에게 잡아먹히는 꿈,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을 연달아 꾸었다(창 41:1-8).
이 꿈에 등장하는 암소와 이삭은 당시의 먹거리 산업인 목축업과 농업을 상징한다. 요셉은 살진 일곱 암소와 충실한 일곱 이삭은 7년 풍년으로, 파리한 일곱 암소와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은 7년 흉년으로 해석했다(창 41:25-31). 그리고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세워 7년 풍년 동안에 그 소출의 5분의 1을 비축해 흉년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창 41:32-36).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창 41:25). 요셉이 전한 말을 듣고 바로는 그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창 41:38)으로 여겨 애굽의 총리로 임명했다. 요셉은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해 7년 흉년 동안에 애굽뿐만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 특히 가나안땅에 살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창 41:46-42:7).
7년 환난의 때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광경은 실로 미래 역사의 예고편을 보는 듯 의미심장하다. 마지막때에 7년 동안 이어질 ‘야곱의 환난의 때’(렘 30:7)에 요셉이 상징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려고 본토로 돌아가는 현재의 전 세계적인 유대인 알리야 운동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생애를 여러모로 가장 근접하게 예표해주는 인물이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은 20에 팔려간 것처럼(창 37:28) 예수님도 동족 유대인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은 30에 팔려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요셉이 가족을 구원하려고 애굽에 먼저 노예로 팔려간 것 역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예표한다. 요셉이 하나님께 받은 꿈은 형들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비전이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동일한 구원의 경륜을 제시했지만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았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예수님처럼 요셉도 바로 앞에 설 때 삼십 세였다(창 41:46). 요셉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중에 한 사람은 복직되고 한 사람은 죽은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좌우편 강도들의 운명도 비슷했다(눅 23:39-43).
이렇게 요셉이 메시아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창세기 41장에 기록된 7년 풍년과 7년 흉년 또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와 연관지어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 7년 풍년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예언된 이방인들 중심의 일곱 교회 시대를 말하고, 7년 흉년은 그 교회 시대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남겨질 한 이레(단 9:27) 곧 7년 동안의 큰 환난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복음주의 진영 일각의 유력한 해석이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의 유형에 대해 직접 예언하신 말씀이 나온다. 초대 교회 시대와 그 이후 로마 황제들 치하에서 핍박받던 카타콤 교회 시대,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조금씩 혼합주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교회 시대를 포함, 중세 암흑기, 종교개혁기, 대부흥기, 그리고 마지막 때의 교회 모습에 이르기까지 교회사 전체를 일곱 교회의 유형으로 개괄해놓고 있다.
교회들의 유형에 대한 이 특별한 예언은 우선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인 AD 95년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던 일곱 개 지역교회의 특징을 담았다. 그리고 그 유형이 교회사에서는 시간 순에 따라 일곱 교회 시대로 나타났으며, 각 교회 시대에 이 일곱 지역교회의 특징을 담은 교회 유형들이 동시에 공존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도 첫사랑은 잃어버린 채 교리 수호에 열심인 에베소교회, 로마의 카타콤 지하교회처럼 핍박받는 서머나교회, 승리한 후 비진리와 타협한 버가모교회, 종교적 선행은 많지만 우상숭배하는 두아디라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 작은 능력을 갖고도 신실하게 말씀을 지키는 빌라델비아교회, 겉은 화려하나 속은 미지근하고 빈약한 라오디게아교회의 유형들이 각 지역마다 동시에 공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곱 교회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유대인들의 영적 회복을 위한 7년 환난기가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 준비 단계로 현재 일어나는 전쟁이나 기근, 지진, 전염병(눅 21:9-10) 등의 문제들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본토로 이주하는 움직임이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지금의 교회도 요셉처럼 풍년의 때에 흉년의 때를 충실하게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큰 풍년을 이루듯 두루 퍼져 있는 때다. 이런 때에 마냥 그 풍년 같아 보이는 환경 자체의 분위기에 취해 있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풍년의 때에 마치 흉년의 때를 살아가는 것처럼 영적 긴장감을 갖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고전 7:29-30).
어떤 것에서든 적어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물질이나 시간, 에너지나 은사의 5분의 1만큼이라도(창 41:34) 절제하고 헌신해서 마지막때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각자의 삶도 그저 기도를 응답받아 현재 이 땅에서 최대한 풍년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요셉처럼 흉년 당한 이웃들을 구원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 물론 마지막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영적으로 회복되도록 돕는 일 또한 그 못지않게 마지막때의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큰 복이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2년 5월호 바이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