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없다면 신자의 믿음은 늘 추상적이며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없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대하 30:26)
“어차피 기쁨은 일을 요한다니, 기쁨을 업무나 직장생활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직장 일을 할 때와 똑같은 에너지와 헌신으로 기쁨을 (그리스도인 성품의 다른 면들과 함께) 추구하면 어떨까?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출근할 기분이 아니어도 출근한다. 월급을 받고 싶다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하지만 행복에는 아무도 보수를 주지 않으니 우리는 수시로 병가를 낸다. 싫든 좋든 ‘행복 회사’에 그냥 출근해 일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갈수록 풍성하고 복된 삶을 보수로 받으리라는 걸 알기에 말이다.”
<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꿈꾸는 인생, 2019년)라는 책에서 저자 마이크 메이슨이 던지는 흥미로운 제안이다. 물리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기쁨과 같은 영적 자질을 때마다 얻어 누리는 일에는 게으름을 당연시하는 듯한 신자들의 일면을 통렬하게 풍자한 셈이다.
신자의 가장 큰 특성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나 ‘사랑’을 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쁨’을 가장 먼저 들고 싶다. 기쁨이 없는 믿음, 기쁨 없는 사랑이 진짜일까. 누군가가 정말 기독교의 복음을 안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할 영적인 특성은 기쁨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쁨 없이 풍성한 믿음의 삶이 가능하리라고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애초에 신자에게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서 온다. 구원 이후에는 그 구원의 감격과 신앙의 초심을 잘 지켜가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통해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데서 지속된다. 이 진리를 인상적으로 잘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 한 컷이 역대하 30장 26절에 담겨 있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주전 715년 경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으로 재임할 당시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던 이유는 솔로몬 시대 이후 2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함께 한 자리에서 유월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자발적으로 7일을 더 연장해서 지킬 정도였다(대하 30:23). 물론 이렇게 큰 기쁨이 넘치는 기념비적인 유월절을 지키기까지는 여러 난관도 있었다. 그 과정과 결과가 어떠했는지에서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영적인 선결 요건들을 짚어볼 수 있다.
첫째,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성결해지는 데서 회복된다. 남유다의 보발군들이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지키려는 유월절에 초대하면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대하 30:6). 이 말에 조롱하고 비웃은 이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대하 30:11) 뉘우쳐 예루살렘에 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히스기야의 중보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치유를 경험하고(대하 30:18-20) 유월절을 지켰다.
누구에게나 참된 기쁨의 시작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를 통해서만 경험된다. 죄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화목의 과정에 죄인이 올바로 반응할 때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만 용서된다. 그때 죄책감이나 자기 죄를 남 탓으로 돌리는 원망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둘째, 기쁨은 신앙 공동체가 믿음과 순종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올려 드릴 때 회복된다.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성전 성결 사업과 재봉헌식에 이어 과감하게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유월절 화목 제사의 자리에 초대했고, 미처 제사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못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월이 아닌 둘째 달로 유월절 준수일을 한 달 늦추었다(대하 30:2-3). 제사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성결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올렸고(대하 30:15-20), 한 주 더 늘어난 유월절을 지키려고 왕과 방백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흔쾌히 내어놓는 나눔의 헌신도 드려졌다(대하 30:23-24).
기쁨은 이렇게 이웃과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대로 순종하고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되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기쁨은 개인적으로 신자의 특징인 동시에 단체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쁨은 개인적인 데 머물지 않고 이기적일 수도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건강할 때만 올바로 누릴 수 있어서다.
셋째, 기쁨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통해 노예생활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기쁨의 절기였다. 유월절에는 어린 양의 희생제가 드려지고, 그다음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무교절을 지킨다. 유월절이라는 명칭에 7일 간의 무교절이 포함되어 두 절기는 보통 동일시되는데, 희생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면 거룩한 삶을 의미하는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 관계가 지속될 때 기쁨 또한 지속되기 때문이다.
히스기야 왕 당시에 온 이스라엘이 한마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첫사랑, 신앙의 초심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북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우상숭배의 근거지로 사용된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는 거룩한 삶의 실천이 이어질 수 있었다(대하 31:1).
기쁘지도 않은데 억지로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보면 기뻐할 수 없지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보면 언제든 기뻐할 수 있다. 내가 처한 환경의 어떠함으로 기쁨을 누리려 한다면 평생토록 기쁨을 내가 원하는 만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임재 안에 영원한 속죄와 용서와 화목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은 그 구원의 혜택 안에 내 일상의 모든 힘겨운 상황들을 변함없이 항상 초월할 만큼 한결같은 하나님나라의 능력이 있다고 고백하는 내 믿음의 표현이다.
오늘날 기쁨을 믿지 않는, 아니 믿지 않기로 굳게 작정한 듯한 신자들이 너무 많다. 상황에 따라 기계적, 반사적으로만 반응하며 살거나, 그때그때 특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도무지 기뻐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주님의 엄청난 구원의 기쁜 소식은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 그 은혜로 약속된 확실한 기쁨보다 환경에 좌우되는 자신들의 불행을 상식인 양 더 확고하게 믿는다. 기쁨은 어쩌다 우연스럽게 찾아오지만, 불행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내 삶을 지배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사는 것 같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는 명령은 신자들이 순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 아니다. 이 명령이 실제 일상 속에서 문자 그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 선물로 받은 우리의 믿음은 늘상 추상적일 뿐이다. 실제 삶속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없다.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은 무슨 대단한 일을 수행하는 게 아니다. 매일 매순간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께 내 삶을 전적으로 의탁하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제자로 사는 것이다. 이 일에 각자의 육신적 기질과 이기적인 소욕이 강하게 저항하며 제멋대로 살고 싶어하는 바람에 늘상 까다롭고 힘든 길이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이 길만 제대로 뚫리면 다른 길도 다 뚫린다. 기쁨을 지키면 다 지키고, 기쁨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다. 기쁨을 지키는 싸움보다 더 가치 있는 싸움도 없다. 그것은 각자의 유월절과 같은 구원의 감격, 주님께 향한 첫사랑, 신앙의 초심을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끝까지 지켜내려는 싸움과도 같다.
영원한 정죄에서 건짐받았다는 그 구원의 감격이 늘 살아 있다면, 삶의 크고 작은 온갖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로 결단하고 모든 상황에서 계속 의식적으로 기쁨을 선택하는 날마다의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주님은 내가 하고자 하면 도우시지만, 여전히 할 마음이 없으면 여전히 도우실 수가 없다. 내 자유의지의 선택을 존중하셔야 인격적이실 수 있어서다.
사탄과 맨날 싸우기만 하는 삶과 주의 인도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으로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는 삶은 다르다. 나를 구원해주신 주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신자는 일상에서도 주의 임재에 마음의 초점을 단단히 고정해두고 살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기쁨은 무슨 거창한 일을 이루는 데서 얻어지지 않는다. 매일의 작고 꾸준한 선택을 통해 기쁨이 온전한 삶의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구원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의 성전 된 내 안에 날마다 유월절을 지킬 때 누릴 수 있는 그 ‘큰 기쁨’을 늘 놓치지 않는 충성스런 일상의 헌신이야말로 가장 실제적이고도 성숙한 믿음의 승리다.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1년 6월호 바이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