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나?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짐승이나 얼음이 난데없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나무로 변하기도 하고 또 나무나 집 안의 물건들이 불쑥 말을 건네기도 한다. 디즈니 애니매이션에 곧잘 등장하는 기적의 장면들이다. 신화나 전설, 동화에 등장하는 기적 사건들의 분위기도 이와 비슷하다. 일정한 틀이나 필연적인 개연성 같은 게 딱히 없어도 된다. 주인공을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거나 그냥 신기한 장면을 연출해 보이려는 데서도 쉽게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은 다르다.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이 특정한 계기로 일어나는 자연적 현상이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처럼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든 모두가 기독교 신앙의 전체 구조와 의미심장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기적 사건들마다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드러내며, 이는 그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두고두고 중요한 영적 교훈을 남긴다.
이스라엘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주전 9세기 중반 당시 아람의 군대장관이면서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이야기(왕하 5:1-14) 역시 마찬가지다. 기적은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런 영적 원리를 잘 보여주는 나아만의 기적 이야기에서 지금도 신자들이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세 가지 영적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 평소에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나병을 치유받으려고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게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에서 데려온 어린 여종이 그에게 엘리사를 소개해준 덕분이었다. 보통 외국에 잡혀가 여종으로 일할 경우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주인을 원망하거나 안 좋게 여기기가 쉽다. 그러나 이 여종은 나아만 장군의 불치병이 낫기를 스스로 바라는 마음에서 애정 어린 제안을 해준다. 나아만이 평소에 작은 여종들까지 아끼는 선량한 주인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는 혜택이었다.
나아만이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증거는 이 여종뿐만 아니라 다른 종들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나아만 장군이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가려 하자 또 다른 그의 종들이 그에게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라는 충언을 해준다(왕하 5:13). 당시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종들이 주인을 부를 때 흔히 쓰는 말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호칭은 나아만의 종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던 특별한 친밀감과 존경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붙여주시는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기본에 충실할 때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기도의 응답 또한 우리가 평소에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주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평소에 이런 일상 속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성실한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
둘째, 내 자아가 주의 말씀 앞에서 부인될 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나아만은 당시 아람의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엄청난 지위에 걸맞는 많은 돈과 의복을 챙겨 엘리사를 찾아왔다(왕하 5:5). 그러나 엘리사는 그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대대적으로 맞이하는 대신 그냥 집 안에 앉아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왕하 5:10)는 말씀만 전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편에서 어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엘리사의 무심한 듯한 태도는 나아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내 생각에는”(왕하 5:11)이란 강한 표현까지 동원하며 엘리사가 자신의 손을 그의 나병의 부위 위에 흔들어 고쳐줄 거라 기대했다고 불평한다. 이런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 유행하던 주술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아만은 엘리사 역시 자신이 주위에서 상식적으로 흔히 보아오던 주술적인 방법으로 고쳐줄 줄 알았다.
또한 당시 다메섹의 강들은 아주 맑고 깨끗한 강이었던 반면에 요단강은 진흙색을 띠며 서서히 흐르는 혼탁한 강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강물로 몸을 씻을 바에야 자기 나라의 강들이 더 좋다고 말한 것 역시 상식적으로도 그럴 만한 태도였다. 그러나 늘 익숙해오던 상식과도 같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완고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 힘든 고난이나 문제가 생길 때 무엇보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로 묻거나 상의하지도 않고, 성경말씀을 통해 어떤 지시를 내리시는지 묵상하며 시간을 두고 살피지도 않는다. 그냥 평소에 상식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해져온 경험이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부인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럴 경우에도 내 삶의 문제들이 당장은 해결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영적인 삶은 이룰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작은 일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의 종들이 나서 그에게 단순한 순종을 요구한다. “선지자가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왕하 5:13)라는 말로 작은 일처럼 보여도 딴 생각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충성스럽게 따르라고 조언한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뭔가 거창하거나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내기 어려운 큰 일이 아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다(눅 16:10).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 우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에 대한 순종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고 하찮게 보이지만 다른 모든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순종이 바로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 명령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시간과 마음의 우선순위만 제대로 정하면 누구나 다 순종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이 작은 일에 불순종하면 더 크고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렇게 작은 일에 순종해야겠다는 결단이 서고 나면 그 다음 단계로 이제 그 작은 일에 끝까지 온전하게 순종해야 한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명령을 따르는 중에 만약 여섯 번까지 씻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걸 보고 거기서 멈춰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나아만의 인생에 계획하신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끝내 경험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다. 히브리어로 ‘일곱’은 ‘완전하다’, ‘만족시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사바’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한 실제로 레위기에 보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일곱 번 뿌려 정하다고 선포하라는 명령이 있다(레 14:7).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근거를 둔 명령에 따라 작은 일처럼 보이는 일에 끝까지 온전하게 순종해야만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매일 기도와 말씀묵상의 삶에 정말 개미처럼 부지런히 순종해왔지만, 여전히 별 다른 열매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마침내 탁월한 영적 진보를 이룰 뿐만 아니라 나의 고질적인 연약함도 주의 능력으로 치유받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나아만이 경험한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은 당시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참되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였다.
C. S. 루이스는 기적을 ‘자연에 대한 초자연적 힘의 간섭’이라고 정의한 자신의 책 <기적>에서 “자연주의적이기만 하고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상식적이기만 한 기독교는 기독교의 고유한 요소를 모조리 제거한 기독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상식적인 내 생각에만 머물러 가까운 이웃과 좋은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하고 작은 일에 끝까지 순종하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 또한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영적 원리는 어쩌면 하나님나라만의 상식인지 모른다.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19년 8월호 바이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