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정치에 대해 하나님 나라가 중시해야 할 가치는?
좌우파보다 상하파
요즘 아내에게 요리를 배우는데, 두부는 좌우로만 아니라 상하로도 자른다. 기독교인도 사회에서는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파나 우파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파나 하파로만 나뉠 것 같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공의냐, 세상이 여론에 따라 옳다 하는 공의냐는 구분해야 하니까.
내 마음의 대통령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내가 정말 ‘내 마음의 대통령’이라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정도면 괜찮다 싶은 경우도 끝이 안 좋아 흔쾌히 동의가 안 된다. 유무명을 떠나 어떤 사람이든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주님만이 정말 내 마음의 왕이셔야 해서일지도.
적이라도 되는 듯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8:36)는 주의 말씀을 믿는 신자들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신자들이 마치 서로의 적이라도 되는 듯 분개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일꾼들끼리 세상 나라 일로 서로 싸우면 세상 나라로 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힘쓰는 꼴이 된다.
충성의 우선순위가 일치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정치적 입장은 다양했다. 정치적으로는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만 해도 서로 얼마든 적대적으로 대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충성의 우선순위가 분명했기에 의견이 달라도 공존할 수 있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편에만 있다면 그다음 차이는 모두 부수적이다.
극우의 방식
사회가 전반적으로 좌경화되어가면서 성경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중시하는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을 요건을 갖추고 있다. 보수적인 성경적 가치를 지키는 걸로 배척을 받는다면 견딜 만한데, 그 가치를 폭력적, 선동적, 반윤리적 방식으로 제시하면 극우로 오해받는다.
교회의 역할
교회는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하고 그 복음을 살아냄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 공동체다. 교회는 전투적인 구호로 정치적 선동을 일삼거나, 세상에 나가 정치적 사안을 실행하는 곳이 아니다. 위정자들이 하나님 나라 공의를 그르칠 경우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거나, 타락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기꺼이 환대하고 치유해주는 역할이 핵심적이다.
정당한 불복
일제 치하에 독립운동했던 기독교인들은 정교분리와 무관하게 정당한 정치적 행위를 했다. 신사참배를 국민의례의 하나라 여겨 거기에 주요 교단이 굴복할 때 단호히 일본 정권에 불복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적 가치가 훼손된다고 여겨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경우는 정교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정교분리의 타이밍
교회가 정계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없어 중립적이어도 되는 때에도 단지 목회자의 선호에 따라 교회 이름으로 특정 정당을 정치적으로 편드는 건 반대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에 위배되는 일이 정계에서 벌어질 때 그 부당성을 성경적 시각으로 지적하고 바르게 일깨우는 건 정당하다.
공공의 선
교회는 각 신자의 일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고, 교회 자체가 현실 정치나 현안에 너무 밀착해서 생명력 있는 고유의 초월성을 약화시키거나 하지 않는 게 좋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공의에 맞지 않는 문제에는 교회의 이해관계를 떠나 필요할 때마다 공공의 선을 위한 목소리는 합당하게 낼 수 있어야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세상을 올바로 섬길 수 있다.
뱀처럼 지혜롭게
목회자든 성도든 개인적으로는 광장에서나 일상에서 자기 의사를 따라 자유롭게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가 함께 한 자리에 모이는 교회 안에서는 공동체의 어법에 맞게 개인의 입장을 안 드러내는 게 지혜롭다. 복음이 아닌 차선의 일로 최선의 가치를 훼손시켜 지체들을 실족시키거나, 심하면 교회를 떠나게 만들 수도 있어서다.
성숙한 시민의식
진보와 보수의 색채나 기조가 뚜렷한 미국교회 강단에서는 목회자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자기 소신을 말하되 성경적 맥락 안에서 적합한 교훈을 전한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런 문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성숙한 시민의식 정도는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이 사안에서도 성경적인 답을 찾는 이들의 교회 이탈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신앙 양심의 언어로
목회자가 강단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꼭 언급해야 할 경우에는 성경적 가치관 안에서 정치적 용어가 아닌 신앙 양심의 언어로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 이 문제에 오해가 생기면 결국 복음전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수 있다.
기도의 밑거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기도나 예배가 눈에 띄는 지식이나 행위보다 더 약해 보이고 겉으로 당장 드러나는 변화나 능력 같은 게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계속 드려온 많은 개교회들의 헌신과 희생 또한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소중한 밑거름이다.
날마다 지혜롭게
지금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좀 더 넓고 유연하게 가질 필요도 있다. 선거철에만 반짝 관심을 가졌다가 평소에는 무관심한 채로 방치하면 정치인들이 제 맘대로 일할 자유를 주는 셈이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면, 신자들 역시 일상에까지 기독교적 가치가 구현되도록 날마다 지혜롭게 정치적이어야 한다.
온전한 복음
피 묻은 십자가 구원의 복음과 그 복음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 나라 신앙은 둘 다 필요하다. 전자는 보수, 후자는 진보 교회가 강조하는데, 모든 교회는 권력을 남용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자기 유익을 취하려는 세속 정치판과는 정반대의 내용과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편에 서야 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는
예수님은 여러 면에서 보수와 진보를 다 포괄하셨다. 정통 교리를 지키고 죄를 멀리하는 삶으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강조하셨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으로는 때로 소유를 다 팔아 헌신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신자라면 각자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는 언제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인은 그때그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의 특정 이념을 지지하거나 특정의 정치적 입장을 취할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그나마 자유민주주의가 최선의 차선적인 이념이라고 믿지만, 신자의 안전은 사람들이 만든 그 이념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주의 복음 안에 있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다.
참된 자유
교회는 세상의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 평등이나 자유, 진보나 보수의 가치를 다 강조할 수 있다. 물론 두 쪽 다 장단점이 있어 이념 우상화에 빠지는 건 금물이지만,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지키면서도 세상의 과학과 철학, 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때그때의 시대정신을 파악해야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바른 태도 없이는
신자들에게는 어떤 주장 자체보다 그 주장을 전할 때의 태도가 더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 태도 없이는 싸움에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군가와 의견이 많이 달라도 그 사람 자체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진리와 사랑은 늘 함께 있어야 짝이 맞다.
사탄의 농간
특정 가치를 대변하는 공인인 특정 정치인의 언사가 내 가치관과 안 맞으면 그의 가치관을 경계하고 분별할 뿐 그를 미워할 건 없다. 특히 신자들이 그와 그의 추종자들까지 미워하는 맘을 가지면 사탄의 농간에 그대로 넘어간다. 사탄이 애쓸 것도 없이 신자들이 스스로 두 손 들고 적진에 투항하는 격이다.
관용의 정신
“관용은 신념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념을 갖되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팀 켈러의 말이다. 조국사태 이후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두 쪽으로 갈라치기했지만, 신자들만이라도 ‘나만 옳다’는 독단보다 상대편의 생각도 듣고 배우고 성장하려는 겸손과 관용의 정신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되
지금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은 지도자들이 있다. 무엇이든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2-3)는 주의 말씀이 지금도 유효하다. 어떤 지도자 한 사람이 밉다고 해서 그가 옳게 말하는 성경적인 교훈까지 미워하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 나라 부흥의 원리
좌우파 진영에 속한 신자들은 다 자기 진영의 내용과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좌우파 진영의 장점을 다 아우른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면 좌우파 진영 논리를 초월한 새로운 역사로 마지막 때에 큰 부흥을 주실 수도 있다.
진짜 주인공
세상의 주인공은 정치인들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쟁쟁한 부자 기업가들도 아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일상의 영토에서 그분의 통치권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조금씩이라도 더 넓혀가는 바로 그 하루하루가 세상의 진짜 주인공으로 사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내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정의하는 그 순간에 이미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이다. 광대무변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지적 레이다에 다 잡힐 만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삐지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교만한 게 다 어이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이해한다면 맨날 나를 더 믿고 산다.
-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25년 4월호 '다시 쓰는 키워드 단상 변증' 연재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