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이 교회의 공식적인 활동으로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부흥이 교회의 공식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위클리프나 얀 후스 같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해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비공식적으로 활동했고, 공적인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방에 있던 이 수도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역사상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그에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모범에 따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교도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분파로 이루어진 감리교의 이야기도 익히 알 것입니다. 200년 전, 감리교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형제와 윗필드 같은 이들은 국교도였습니다. 그러나 국교회 안에서 새 일을 시작하지 않고 진 밖에(출 33:7) ‘홀리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따로 모였습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인원이 사적으로 모인 것입니다. 한동안은 그런 모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느낌에 이끌린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뿐입니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모임이었으며, 이를테면 진 밖에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칼뱅주의 감리교와 아르미니우스 감리교 모두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초기 역사를 보아도 그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이처럼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그렇다면 새 교단을 만들라는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것은 이 가르침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 일은 공적인 것이 되고 하나의 운동이 되며 조직과 연결되게 되는데, 그것은 제가 말하려는 바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실 때, 부흥의 길을 예비하실 때, 항상 이 같은 방식을 쓰시는 듯하다는 겁니다. 그는 이를테면 따로 불러낸 자들에게 부담을 주시며, 그 부담을 의식한 자들은 조용히, 알려지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모임을 갖기 시작합니다.
역사상 모든 부흥에 이와 똑같은 요소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나 한 사람 골라서 살펴보십시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들의 우선되는 관심이 교회의 상태가 아닌 자기 영혼의 상태에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200년 전 옥스퍼드에서 시작된 작은 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홀리 클럽’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웨슬리 형제와 윗필드,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다른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렇다. 교회는 여전히 교회다. 그러나 너무나 보잘것없어져버렸으며 죄에 물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아주 안이한 태도로 하나님의 계명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부를 대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거룩에 헌신해야 하며 스스로 정결해져야 한다.”
그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약간은 율법주의적이 되어 버린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여하튼 그들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생각하며 그 규칙과 규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함께 성경을 연구해야 하며 함께 기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질서 있게(methodically) 해야 한다.” 그래서 감리교도(Methodist)라고 불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일해 오셨습니다. 한 개인이나 다수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내려 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의 영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구별이 불가피해집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아, 당신은 교회를 분열시킬 작정입니까?” 분열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중 누구라도 다루기 시작하실 때 이런 구별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별되어 나온 사람들은 과시하지 않으며, ‘내가 너보다 거룩하다’는 바리새인의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상태로 인해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그 즉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느끼고 이를테면 진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진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물리적으로 진을 벗어났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리입니다.
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지금처럼 심각한 부도덕과 불경건과 불신앙이 판치는 시대, 악이 소리를 높일 뿐 아니라 교만하게 자랑까지 하는 시대, 악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있는 이때에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한층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평범한 기독교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참된 생명과 삶,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 말고는 이 상황에 대처할 길이 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들이 느낀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부흥>(복 있는 사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