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지금도 나와 일대일로만 씨름하시나?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4-25)
유튜브에서 천하장사 이만기와 신예 씨름꾼 강호동이 맞붙어 보기 좋게 강호동이 승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 씨름에서 18세 나이의 강호동은 힘이 좋고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상황 판단 능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결국 이만기를 제치고 결승에 올라 44회 전국장사씨름대회 우승으로 백두장사가 되었다. 이만기가 강호동을 나이 어린 신출내기라고 해서 봐줬을 리는 없다. 강호동은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실력만으로 겨루어 승리를 거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간의 씨름에서는 어떨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창 32:25)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과 씨름해서 질 리가 없는 분인데, 왜 이런 어색한 표현이 등장할까. 하나님이 사람과 씨름을 했다는 것 자체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한 술 더 떠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창 32:28)고 말씀해주신다.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 진귀한 씨름이 벌어진 장소는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있는 얍복강 나루터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의 축복을 빼앗은 후 외숙부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20년 동안 일했다. 거기서 처자와 재물을 많이 얻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의 보복이 두려워 가족과 재물을 먼저 보내놓고 강 건너편에 홀로 남았다. 바로 그때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벌이신다. 이 씨름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문자 그대로 씨름이라고 보는 게 문맥에 더 맞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야곱과 씨름하셨고, 야곱은 이 씨름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하나님 앞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대표이고,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다. 야곱에게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난 일은 다 모든 사람, 특히 모든 신자 각자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예표한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벌인 이 씨름도 모든 세대의 각 신자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 사건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놀라운 사건들 중 하나다. 이 사건의 역사성을 의심한 이들이 여러 반론을 제기했다. 천사가 꿈에 나타났다는 현몽설, 야곱이 무아지경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씨름이 이뤄졌다는 환상설, 야곱 자신의 영혼 속에서 이뤄진 씨름이라고 보는 영적 투쟁설,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신화설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 씨름 사건의 역사성은 내용과 문맥 자체가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얍복’이라는 강 이름도 히브리어 이름 야곱과 ‘씨름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 ‘야바크’와 연관시켜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 데서 자연스럽게 입증된다. 이 사건으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은 실제로 다리를 절었다. 이 때문에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는”(창 32:32) 관습이 생겼다. 이 음식 규정은 모세 오경에는 없지만 탈무드에는 ‘신성한 율법’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대의 호세아 선지자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야곱의 씨름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그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호 12:3-4)라는 표현으로 야곱과 씨름한 존재가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할 때나 시내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고 다가올 때 그들에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이 여호와의 사자 예수님이셨다.
이 사건의 객관적인 역사성이 분명하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모든 신자 각자와 씨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지금도 야곱처럼 하나님 외의 자기 소유에 집착하던 삶의 허망함을 깨닫고 암울하고 두려운 밤에 홀로 남겨진 이들에게 하나님은 일대일로 씨름을 걸어오신다. 인생의 중요한 시험과 문제들은 결국 다 홀로 경험하고 홀로 답을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간증은 참고사항으로 도움이 되지만, 나 역시 그 간증대로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체험하지 않으면 끝내 내 것이 되진 않는다. 영적인 진리의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관계에서 풀어내야 한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이 과정의 필수 코스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넓적다리에 걸어 서로 잡고 몸 전체의 근육과 갖가지 기술을 고루 사용해 상대를 땅에 넘어뜨리는 경기다. 서양의 레슬링, 일본의 스모, 몽골이나 터키의 씨름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씨름과 비슷한 경기가 존재한다. 영어로 ‘wrestle’로 번역된 ‘씨름하다’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껴안듯이 꽉 붙들고 늘어지다’, ‘단단히 달라붙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씨름의 일상적인 의미는 ‘무엇을 이루려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일’ 또는 ‘어떤 대상을 극복하거나 일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거나 끈기 있게 달라붙음’이다.
모든 신자 각자에게 홀로 있는 시간은 하나님과 독대하여 교제하는 시간이지 단순히 고독을 즐기는 시간이 아니다. 찬양과 기도,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를 더 깊이,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때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바로 씨름이다. 하나님만을 구하고 바라보려면 나를 사랑하고 세상에 의지하려는 나의 온갖 육신적인 이기심과 치열한 샅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때 이 씨름의 상대역인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완고한 육신적인 모습을 직면하게 하시는 대역이기도 하다.
“기도를 시작하고 5분만 지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거나 “하나님만 높이는 찬양을 드릴 때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묵상의 시간에도 내 생각과 염려가 많다”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하나님만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일은 처절한 씨름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무지 씨름하려 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고민도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런 씨름도 없이 그냥 쉽게 자연적인 상태에서, 육신적인 본성 그대로 하나님을 만나거나 기도와 찬양이 열리거나 주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방도는 없다.
하나님만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야곱처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간구하는 필사적인 태도 없이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이전에 하나님 외의 다른 소유에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홀로 이 씨름에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졌다”고 말씀해주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건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게임의 룰을 통해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 누려야 할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할 때의 그 이김과 비슷하다. 실은 더 힘이 센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는 거지만 부모가 보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서 자식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 지금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인 복을 받는 믿음과 순종의 법도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
육신적인 힘의 중추라고 할 만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기까지(창 32:25) 자기 부인의 십자가 제자도에 충실하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교활하고 욕심 많은 자를 의미하는 ‘야곱’이라는 육신의 옛 이름을 토해내며(창 32:27) 진실하게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럴 때 실제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시면서 하나님과만 겨루었는데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해주신다(창 32:28). 지금도 각자의 ‘브니엘’(창 32:30)에서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먼저 온전히 구하는 영적 씨름에서 승리할 때 일상에서 이웃사랑의 영역에서도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야곱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경험한 이 씨름 사건은 모든 세대의 각 신자들 또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육신을 신뢰하는 모습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준다.
스포츠 중에서 특히 씨름은 복식이 없고 단식뿐이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와 일대일로 직접 샅바를 메고 씨름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사한가.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 맞잡고 힘을 겨루는 씨름처럼 하나님께서는 내 체급과 힘과 기량에 맞춰주시면서 씨름해주신다. 기도와 찬양, 말씀이 좀 부족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때로 오랫동안 기다려주신다. 나에게 필요할 때마다 모종의 여지를 주시려고 때로 밀리거나 당겨주시기도 하고,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기 싸움’의 무모함을 자각하게 하시려고 한동안 가만히 계셔주시기도 한다. 이 모든 상호소통의 역동적인 씨름의 여정은 기꺼이 몸을 낮추시고 연약한 죄인인 나에게까지 자신을 맞춰주신 여호와의 사자 예수님의 성육신의 불가사의한 신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2년 4월호 바이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