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서 온전히 그 일을 하는가?’
하나님은 늘 지금 여기에 계신다. 이는 영적 삶의 아주 단순한 명제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종종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빠져 있든지, 아니면 앞일을 걱정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관건은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가?
당신이 여기에 있는 만큼만 뭔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금 오후 3시니까 끝나면 거기로 가야지. 내일은 그것을 해야지.’ 이런 생각뿐이라면 뭐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당신은 여기에 있지 않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만큼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다.
우리가 온전히 여기에 있다면, 장내에 에너지가 넘쳐나서 저 지붕이 뚫릴 것이다. 당신과 내가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고 전적으로 여기에만 있다면, 그 기운에 이 건물이 송두리째 날아갈 것이다. 정말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대개 당신과 나는 사방에 흩어져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만큼만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을 다시 빚으신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나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최대한 온전히 이 자리에 있는가?’이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고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라르쉬의 큰 강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식사 시간이다.
요지는 식탁에 둘러앉는 시간이 곧 우리가 서로 공동체를 실천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때만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다. 촛불이나 꽃이나 노래나 기도를 곁들일 수도 있고, 또 급할 것도 없다. 어쨌든 우리는 배만 채우고 다시 일하러 가려고 먹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로서 함께 먹는다. 같은 음식을 나누며 몸의 양식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 양분까지 얻는다.
당신에게 이런 시간이 없다면 여기 공동체로서 늘 되새겨볼 좋은 질문이 있다. ‘지금도 우리는 제대로 함께 먹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식사는 패스트푸드 식당과 비슷해졌는가?’
식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 가정이나 공동체를 알 수 있다. 어떤 곳은 평화롭고 화기애애해서 내가 환대받는 기분이다. 그러나 저마다 텔레비전만 보거나 전화를 받으러 불쑥 자리를 뜬다면, 사실은 아무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그 자리에 있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전화 통화나 라디오 청취나 텔레비전 시청 등 딴짓을 하면 안 된다.
식사 시간은 신성한 시간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게 가능한 가정이 극히 드물며, 따라서 이게 당연한 모습도 아니다. 나만 하더라도 어제 여기로 오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왔다.
“내 입맛대로 먹는다”라는 광고 문구가 있다. 우리 문화를 상징하는 표현인데, 그 말대로라면 아무도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순간에 주목할 수도 없고, 함께 먹는 시간을 경축할 수도 없다.
식사 때만 아니라 대화 중에도 상대방과 함께 있으라. 이 또한 신성한 순간이건만, 그렇게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함께 있는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5분도 좋고 30분도 좋다. 늘 관건은 얼마나 오래 있느냐가 아니라 온전히 그 자리에 있느냐다.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문병을 가서 “죄송하지만 10분밖에 머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참 고약한 일이다. 하지만 10분밖에 없는 그 시간 동안 전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다면 그건 괜찮다.
10분 동안 지켜보며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 그러면 당신이 떠나고 났을 때 상대방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방문해 정말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떠나서도 그는 내게 마음을 보냅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으로 내 곁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또는 몇 시간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온전히 그곳에 현존하느냐다. 그 순간 당신은 상대방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아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저는 여기에 당신과 함께 있으려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며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다 되면 저는 가도 되겠지요.” 그 순간 상대에게 온전히 현존한다면, 당신은 떠날 때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상대방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다. 마트에 가야 한다면 거기에 주목하면 된다. 그때는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다음에 채플에 있어야 한다면 거기에 주목하면 된다. 그다음에 집에 가면 된다.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현재의 일에 힘쓰는 것이다.
라르쉬의 소중한 영성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신성하다는 것이다. 빨래나 설거지를 할 때도 하나님은 당신 곁에 계신다. 공동체에는 그냥 바쁘게 일하는 사람과 주님의 종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둘의 차이는 일의 종류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서’ 온전히 그 일을 하는 데 있다.
당신도 나도 물건을 사러 나간다. 당신도 나도 빨래한다. 그때도 하나님 앞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허드렛일로 그칠 것인가? 그 차이다. ‘날마다’가 중요하다. 바로 거기 매일의 평범한 삶에, 라르쉬의 숨겨진 삶에 하나님이 아주 생생히 현존하실 수 있다. 이 또한 훈련이다. 진정한 훈련이다.
-헨리 나우웬, <헨리 나우웬의 공동체>(두란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