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수, '이 땅에서 꼭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가?'
철 지난 담론인데, 우연히 한 책을 보다 내 눈에 들어왔다. 십수년 전 기독교계 논쟁, ‘고지론’과 ‘저지론’ 이야기다. 그때 논쟁이 제법 치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별 관심이 없어서 쟁점을 상세히는 모른다. 대충 이해하기로, ‘고지론(高地論)’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 명예의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저지론(低地論)은 고지론이란 위장된 욕망일 뿐, 세상의 변화를 위해 그리스도가 취한 방식, 즉 고통받는 사람들이 머무는 낮은 곳에 임하는 방식을 따라 우리도 고통이 머무는 곳, 누구도 가길 싫어하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나는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길이다. 하나는 취하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리는 길이다. 물론 그 동기가 변화에 촛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같다.
사실 고지론은 자칫 분별이 어려울 수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이 권력과 부와 명예가 따르기도 하니, 저 자리를 추구하는 마음의 경계가 모호하기 마련이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명분이요 사실상 욕망의 자리일 수 있다. 나는 그런 위장된 욕망으로서 고지론 편에 선 이들을 제법 보았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SKY 대학을 가서 고시를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지체가 높거나 아무튼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사회에 영향 끼치기도 좋고 복음을 전파하기도 좋다는 거다. 교회에서 그런 기회를 장려하고, 기회를 얻은 자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분위기. 그게, 나는 혐오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로만 향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현실 속에서는 이상한 구조가 된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힘없는 약자의 위치에만 머물러야 하고, 변화에 관심이 없는 이들만 죄다 권력의 자리에 머무는 형태니까. 한국에선 오랜 동안 익숙한 구도였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보편 타당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선한 약자들은 외치고 악한 강자는 귀 막고 있다가 나중에 그 소리를 수용함으로 세상이 달라지는 방식, 평범한 민중과 그들 곁 대변자들이 악한 권력자들과 싸워 평화와 정의를 쟁취해내는 그림, 후진 독재국가의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이나 링컨, 윌버포스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예외적인 존재로 밀쳐두는 수밖에.
이 문제는 고지론과 저지론을 ‘장소’적 개념으로 볼 때 빚어진 부작용이다. 고지론과 저지론의 ‘지(地)’를 특정한 직업과 직책으로 보면 그렇게 길을 잃게 된다. 직업이 아니라 태도(attitude, mindset)의 문제로 이 개념을 접근해야 길이 명확해진다. 즉, 태도로 본다면, ‘저지론’이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의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 문제를 해결하는 삶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요, 고지론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의 자리를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둘이 싸울 일이 없다.
태도로서의 고지론이 추천하는 모델적 인물은, 힘이 없어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을 보고 저들을 위해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사람, 평화시장의 전태일에게 조영래가 그런 존재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살겠다는 마음으로 의료인의 길을 가는 사람, 장기려 같은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배움의 기쁨을 주기 위해 선생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 손기정의 양정고보 스승이자 민족운동가 김교신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저지론의 자세로 의사, 변호사, 정치인, 교수 같은 자리, 그것이 고지(高地)라고 한다면, 고지를 취할 수 있다. 그게 제대로 된 고지론이고, 그럴 때 고지론과 저지론은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과정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힘쓰다가 변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물기 보다 더 높은 위치까지 가야 한다, 그러려면 준비해야 하고 이력을 관리해야 하고 한눈 팔면 안 된다고 긴장한다. 그러면서 일상의 작은 것들을 다루는 자세가 뒤틀어진다. 그게 문제다.
난, 선생의 경험이 대부분이었으니, 그 이야기를 한다면, 교장도 권력이라면 권력이다. 하여, '고지'라 할만 하다. 우리 때 남교사들은 공립학교 선생된 후 30대 초중반부터 승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에서이겠다. 그 꼴을 보고 구역질을 느낀 이들은 ‘나는 아이들 곁에서 평생 평교사로 남아 살겠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중에 그 욕망이 아니라 학교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선의 때문에 승진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곤란한 것이 무엇인가? 그 승진의 트랙이 학교와 아이들을 변화시킨다는 마음의 중심을 그대로 두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살리려고 교장의 길을 준비하는 것인데, 그 승진의 과정은 그 마음을 포기하라고 압박한다. 상급자의 평가에 민감해라, 점수 포인트를 따라, 이런 저런 요구와 시선을 의식해야 이력 관리가 되는 것이다. 그 시선에 익숙해지면, 애통해 하는 마음, 끓는 마음이 점차 사라진다. 아이들을 위한 모험적 시도가 부담스럽고, 그런 존재가 나를 위협할까 경계한다. 제도의 잘못이기는 하나, 굴복하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종교계도 그런가 보다. 이와 관련해, 알린스키는 그의 명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말했다.
“주교가 되고 싶은 사제는 아첨과 정치적 술수로 자신이 출세를 도모하면서, ‘주교가 되고 나면 나의 직책을 기독교 개혁을 위해 사용할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실업가는 ‘일단 백만 달러를 모은 후에 진짜 인생을 살 거야’라고 변명한다. 불행히도 사람은 주교직이나 백만장자에 이르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다시 ‘추기경이 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렇게 되고 나면 더욱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52쪽 중에서)
그러니까 ‘저지론’의 태도를 갖고 고지로 올라갈 수 있겠으나, 그 과정에서 저지론의 태도가 꺾이고 개혁의 빛이 바래지는 것이 문제다. 고통 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고통을 잊게 된다는 거다. 실제로, 주변의 좋았던 분들이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후 사람 망가졌다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더러 주변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원래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다고들 하고, 어떤 이는 나중에 달라졌다고 말한다. 케바케겠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고지를 향하는 이들은 후자의 변심을 조심해야 한다.
대체, 변심은 무엇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더 많은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 여기서 내 주변의 고통에 무관심한 때문이다. 여기서 저들의 울음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집중력이 떨어져 위로 올라 갈 수 없다는 염려 때문이다. 또한 윗사람에게 내 모습이 불온하게 보여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래서 속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다. 울어도 듣지 않으려 하고, 아파해도 싸매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에서 들끓는 것이 있는데 어찌 감출 수 있으랴. 저기 우는 사람들을 향한 슬픔이 있는데, 어찌 그 곁에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은 겉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하여, 감추다 보면, 없어진다. 애통하는 마음을 누르니 엷어지는 것이고, 행동하지 않으니, 나중에 큰 기회를 얻고도 침묵한다.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러니, 고지로 올라가고자 하는 이들은 올라가라. 다만, 고지로 가려는 그대의 진심을 끝까지 지키라. 준비하는 과정의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그대를 평가하는 권력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여기서 우는 사람 곁에 서 있으라. 장차 높은 데서 위로하려면 지금 낮은 데서도 위로해야 한다. 높은 데서 대변하려면 지금 여기서도 변호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의 슬픔에 응답하지 않는데, 더 높은 자리에 오른 10년- 20년 후 응답할 도리는 없으니까.
이에 대해 항변할 것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서 슬픔에 응답하면 기회가 없어질지 모른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그대를 고지로 호출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여기에 머물게 할 것이다. 그런들 뭐가 문제인가. 전능자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대의 불평을 들이댈 일이 무엇인가?
고지론, 저지론 다 좋다. 다만, 변심한 상태로 고지를 오르는 것, 고지에 올라 변심하는 것만 조심하라. 그게 최악이다. 그런 상태로 고지에 오르면, 어느 순간부터 약자들을 울릴 또 다른 악이 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약자를 위해 애써 고지를 준비하던 그대가.
-송인수 교육의 봄 대표 페이스북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