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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들 노는 일요일에 교회 나오라 하나?
-<성수주일>(김남준/익투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복음은 제자가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까지 포괄할 만큼 전인적이다. 주일예배에 성공하고도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주중 삶의 예배에 실패한다면 복음적인 삶이 아니다. 주일성수의 정신은 율법적인 종교 유지가 아니라 거룩한 예배자의 삶에 중요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여가 즐기기’는 쉽게 포기 못할 중대한 삶의 가치다. 과거에는 생계를 해결하고 자기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 발달의 혜택으로 개인의 여가 시간이 늘어난 만큼 여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삶의 질은 곧 여가 시간을 얼마나 의미 있게 확보하느냐로 좌우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많다.
그래서 요즘 비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에서 중시하는 이른바 ‘성수주일’은 만만찮은 전도의 걸림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까지는 좋은데 굳이 쉬는 날을 내주면서까지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야 하느냐를 문제 삼는 비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난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라거나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꼭 교회 나가야 돼?”라는 반박이 실제로 많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삶에 찾아드는 제약 중 가장 가시적인 올무가 교회 출석인 셈이다. 이런 분위기는 기존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갈수록 더 옅어져간다.
결국 이 문제는 성수주일이 건강하고도 균형 잡힌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이 책은 지금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성수주일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두고 쓰였다. 자연스럽게 비신자들에게도 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신자는 교회공동체에 정기적으로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제시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저자는 우선 이 책에서 현재 지역교회들에서 주일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성향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한다. 성경과 신학의 기준보다 현실적인 삶의 상황을 우선하는 편의적 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예배로 보고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치우친 일원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을 강조하며 주일성수를 그르치게 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해 전투적 자세를 취하는 치우친 이원론,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번영신학의 공식에 충실한 경험적 축복주의다(pp.15-29).
이런 오해들은 모두 주일성수에 대한 건전한 신학적 이해가 결여된 결과다. 그래서 이 책에는 주일성수와 관련된 대표적인 두 가지 논쟁점, 곧 현재의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의 역사적 정당성과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갖는 신학적 연속성에 대한 논의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초대교회가 안식일보다 안식 후 첫날을 지키는 일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일성수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부활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주일성수에 대해 가장 올바른 전통을 세웠다고 평가되는 청교도들도 역사적으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된 것에 대해 로마의 태양신 숭배 관습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신학적 사실, 그리고 공교회의 역사적 결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p.38).
신약 시대의 주일이 안식일의 성질과 능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주일과 안식일의 신학적 불연속성을 강조해 안식일 제도 폐지론을 따랐다. 그러나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핫지 같은 신학자들은 대체로 칼빈의 신학을 물려받으면서도 두 날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해 안식일 제도 영속론을 따랐다(p.39).
물론 루터 역시 안식일 제도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확신했지만 그것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의식적 전통에 대한 것이지 안식일이 지니는 고유의 영속적인 의미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구약의 안식일 제도 안에서 드러나는 노동으로부터의 육체적인 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의무, 영원한 안식을 바라본 모상으로서의 지상적 안식일 개념의 신학적 또는 자연법적 계승 같은 것의 중요성을 인정했다(p.41).
칼빈 역시 안식일의 종말론적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주일제도는 거룩한 방식의 삶의 온전한 실천, 세상살이에 대한 사랑과 욕망으로부터의 쉼, 하나님께 대한 자기 봉헌의 실천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p.131).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에게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상관없이, 한 주간 중 주일을 따로 떼어놓고 육체와 정신이 6일 동안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나님만을 앙망함으로써 육체의 쉼과 영혼의 안식을 얻게 하는 날이었다(p.124).
이에 비해 청교도들은 주일성수가 종파적 이슈가 아니라 자연법적 질서 안에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항구적인 법칙이라고 믿었다(p.52). 하나님께서 구약의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노동에서 쉬도록 명령하신 데에는 온 인류에 대한 자연법적 질서에 대한 신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고, 안식일에 담긴 인류 복지와 행복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배려는 신약시대의 주일에도 계승되어야 한다고 보았다(p.124).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약의 교회가 옛 창조를 기념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동일하게 새 창조를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p.57).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마땅히 언약관계에 충실할 의무가 있다고 본 청교도들의 언약신학적 입장 또한 주일 엄수주의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p.91).
주일 엄수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아디아포라
종교개혁자들이 안식일 폐기론적인 입장을 취한 이유는 당시 로마 가톨릭이 중세의 미신적 전통을 따라 수많은 성일과 절기를 정해놓고 이 날들을 준수하는 것이 행위의 공로로써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들보다 주일 엄수주의에 더 집착했던 청교도들에게는 당시의 시대적 환경이 특별히 더 큰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영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 속에서 하루에 16시간씩 쉬는 날 없이 일했던 당시 노동자들의 복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p.61), 무엇보다 청교도들에 대한 제임스 1세의 정치적 핍박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1617년, 제임스 1세는 ‘스포츠 선언’이라는 칙령을 공표했는데, 이 선언은 교인들이 주일 오후에 각종 스포츠나 오락을 취미로 행하는 것을 종교적인 이유로 금지시킨 교회의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피를 흘리는 가학성 스포츠가 아닌 한 교인들이 주일예배를 마친 후 놀이나 스포츠를 얼마든지 즐겨도 된다고 규정했는데, 여기에는 악기 연주, 댄싱, 뜀뛰기 등이 포함되며 후일에는 술잔치, 가면무도회 등까지 확대 허용되었다(p.72). 이는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과 불경건한 평신도들에게 교회의 거룩한 질서에 합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p.74).
이러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주일성수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시 청교도들에게는 신앙을 포기하고 정치 권력에 영합하는 거의 배교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겪으며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주일성수에 대한 언급이 많다(p.76).
저자는 당시 주일에 허용된 스포츠나 놀이들은 오늘날 중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의 건강을 증진하고 심신을 휴식하게 해주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는 견해를 밝힌다. 그것들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백성들이 화투나 음주, 놀음에 빠져 살았던 것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병폐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폐해였다고 보았다(p.79). 이로써 당시 스포츠나 놀이를 주일에 금지시켰던 청교도적 전통이 지금도 그대로 경직되게 적용될 필요성은 약하다고 볼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것은 칼빈이 주일성수와 관련된 문제의 상당 부분을 아디아포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히 규정된 바 없고 종교적으로도 어떤 행동을 규제할 보편타당한 근거가 없는 비교적 대수롭지 않은 것들,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로 도덕적으로도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作爲)와 부작위(不作爲)가 허용되는 것, 따라서 각자 자신의 양심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항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 견해와 맞물린다. 이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주일성수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교리적, 실천적 융통성을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냐, ‘교외’냐?
자유주의적 방종과 율법적 바리새주의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찾는 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성주주일의 현실적 대안이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확신이 부족하다고 반성하면서 주일의 성경적이고도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목회자의 정리된 지식과 판단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목회적 재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진단한다(p.144). 우선 시급한 대안으로는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되살려 교단적인 합의 가운데 우리 시대에 맞는 성수주일에 대한 실천적인 신앙 고백을 작성해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p.155).
결론적으로 저자는 주일성수를 강조할 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만이 아니라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와 관계된 특권과 축복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p.160). 필자는 저자의 이러한 제안에서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꼭 교회 나가야 하나?”라는 물음을 좀더 좁혀 “왜 하필 다들 노는 일요일에 교회 나오라 하나?”라고 묻는 비신자들에게 전해줄 대답을 얻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목도한 창조주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 주간의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안식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시작했지만, 타락으로 인해 이 안식이 깨졌다.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구원해주심으로 진정한 안식 또한 회복시켜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주일이다.
구약시대의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는 대신 원리적으로는 기독교인들도 이 주일을 창조주(출 20:11)와 구원자(신 5:15)가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날로 삼는 것이 신앙에 유익하다. 무엇보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안식을 연습하는 복된 행위에 속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주일은 일주일의 모든 날이 주의 날이며, 그 모든 날의 일상 가운데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매주의 첫 날에 특별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공식적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날만큼은 주중에 먹고 살기 위해 염려하며 일하던 사이클을 잠시 멈추고 예배를 통해 오히려 쉼을 누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로써 주일은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고백하는 날이 된다.
신자들이 장차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천국에서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가운데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그 영원한 안식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모든 날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임재를 맛보는 예배 가운데 일상의 일들 또한 함께 감당하는 온전한 예배자의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현재 지상에서는 신자들이 주중에도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며 맡겨진 하루하루의 일을 감당하는 삶으로 그 영원한 안식을 표현하고 연습한다. 주일에 공식적으로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는 바로 그러한 안식의 은혜를 매번 새롭게 함께 경험하고 선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람은 몸이 쉰다고 해서 마음마저 잘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찬양하고 이웃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서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때 오히려 영혼의 쉼을 누릴 수 있다. 말씀을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등을 해소할 수 있고, 삶의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가치에 대해 거듭 재확인하면서 매번 신선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을 수 있다.
‘교회’가 아닌 ‘교외’에서라도 현대인들은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보길 간절히 원한다. 온갖 종류의 여가를 통해 모든 현대인들이 그토록 찾아 누리길 원하는 영혼의 쉼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는 대답이 바로 기독교의 성수주일에 담겨 있다는 진리가 더욱더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할 때다.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주일성수는 어떤 점에서 신앙생활의 핵심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꼭 다들 쉬는 일요일에 교회까지 나가야 하나?”라고 묻는 이들에게 주일성수의 타당성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
2.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주일성수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부활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신자가 일상에서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성경적인 주일성수의 정신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안식>(아브라함 헤셸, 복 있는 사람)
기계적이고도 형식적인 주일성수 이전에 안식일 영성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구약의 안식일 율법에 담긴 심오한 정신을 일깨워주는 유대교 신학자의 책. 정기적으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중지하고 안식함으로, 나를 있게 하고 우주를 있게 하신 분의 숨결에 나를 맡기고 인생과 우주와 생명에 대한 바른 시각을 회복하는 것을 참된 안식일 영성이라고 보았다.
“자유를 위해 떼어 놓은 한 주의 한 날, 곧잘 파괴의 무기로 둔갑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는 날, 자신을 돌아보는 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 형식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날, 기술 문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는 날, 돈을 쓰지 않는 날, 이익을 얻고자 동료 인간 및 자연 세력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만큼 인간의 진보에 큰 희망을 주는 제도가 있는가?”(p.81).
<진실로 회심했는가>(켄트 필폿, 규장)
진정한 회심과 거짓 회심을 분별하여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회심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참된 회심 여부를 점검할 체크 리스트와 참된 회심의 열매를 제시하고, 거짓 회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참된 회심을 경험하는 데 필요한 과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성경적 근거와 실제 사례들을 통해 상세하게 안내한 책.
“거짓 회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삶의 위기들은 거짓 회심을 낳을 수 있다. 도덕적 삶을 회심으로 착각한다. 영적 체험을 회심으로 착각한다. 종교 단체나 교파에 소속된 것이 곧 회심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인 것을 회심한 것으로 착각한다. 특정 단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회심은 아니다. 영접 기도가 회심은 아니다. 많은 교회와 교파는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영접으로의 초대’를 전통적 방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면 회심을 ‘쉽고 편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p. 135, 153).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