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지도대로 해운대역 2번 출구에서 해운정사를 찾아 올라간다. 빽빽한 도심 사이로 또 인간만의 영역이 생기는 공사 현장을 건너보며 답답증이 밀려왔지만 무심히 가다듬으려 애쓴다. 우리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확장의 본성을 냉철하게 성찰하기에는 이미 지구가 존폐 기로에서 뜨겁다.
경사 낮은 비탈을 올라 일주문 앞에 섰는데, 지나온 길이 무색하게 드높은 계단이 하늘로 이어지고 있다. ‘108’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 싶어 하나, 둘, 세어 보지만 곧 잊는다. 사찰 경계에 있는 듯한 주택가 빈 터 군데군데에서 하얀 꽃들이 수북하게 이채로운 자태를 뽐낸다. 쉬나무들이다.
눈을 부라리며 귀를 연다. 꿀을 찾아 윙윙거리는 벌들이 보고 싶어서다. 기꺼운 상봉을 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방법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는 거다. 머뭇거리는 사이도 잠시 계단 끝 원통보전이 보이는 경내로 들어가 버렸고, 아래로 가는 샛길 담장 위로 쉬나무가 흐린 날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다.
쉬나무는 운향과 낙엽 활엽 소교목으로 낮은 산지 및 마을에 자생하고 있다. 이 나무의 학명이 Euodia daniellii인데, Euodia는 eu(좋다)와 odia(향기)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식물 분류학으로도 학명으로도 향기가 좋다는 건데, 꽃 무더기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도 나를 망각시킬 만한 꽃향내가 끼쳐오지 않는다. 그럼 쉬나무는 누구를 위해 뜨거운 여름 모든 에너지를 향기 만들기에 쏟는다는 걸까? 꿀벌이다. 양봉가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밀원식물인 아까시나무를 영어권에서 bee tree(벌 나무)라고 한다. 그런데 쉬나무는 bee tree를 넘어 bee-bee tree라고 불린다. 이는 우리보다 서양에서 쉬나무의 밀원 가치를 더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고 뿌리는 듯 뿌리지 않는 듯 약한 비라도 내려서 그런지 꿀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래도 꽃이 터질 대로 터지는 시기라면 귀가 따가워야 하는데, 혹, 이 지역도 과학이 다 밝히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꿀벌들의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전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 70%가 꿀벌을 포함한 곤충의 수분활동에 의존해 생산됩니다”라면서 “만약 지구상의 모든 벌이 사라져 이 농작물을 중국 쓰촨성 마을의 농부들처럼 인공 수정을 하게 된다면, 모든 식자재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자연의 식물을 원예품종으로 만든 것을 넘어 꿀벌의 역할까지 대체해야 하는 파국적 상황이 우리가 행하는 농약 살포 등을 포함한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재앙은 우리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어두운 현실이 되고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부재한 생명체들에게 던져지는 연민이 고스란히 무거운 짐으로 다가와 독경 소리 들려오는 해운정사를 돌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헤아려본다.
해운정사 홈페이지를 보면, “경허-혜월-운봉 선사로부터 내려온 이마 위의 일구[向上一路]를 투과하여 불조의 정맥을 이어받으신 향곡(香谷)선사(1912~1978)께서는 40여 년 전, 1967년 진제 큰스님께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을 부촉하시면서 ‘네 대(代)에 선풍(禪風)이 크게 흥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라는 소개글이 있는데, 이어지는 글을 보면 “이후 큰스님께서는 모든 인류와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임제(臨濟)의 법맥을 이을 법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인연터를 찾아 전국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시다가 마침내 해운대 장수산에 이르시어, 태백산맥이 굽이쳐 내려와 장중한 기운이 맺힌 것을 보시고는, 산의 모습이 장려(壯麗)하고 진중(珍重)하여 ‘수행자들의 최상의 공부터로구나!’ 간파하시고 이곳에 1971년에 터를 잡아 창건하시게 되었습니다”라는 역사가 나와 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진제 스님은 해운정사에서 모든 분들이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라는 화두를 깨달아 모든 분들이 부처님이 되고 도인이 되기를 희망하는데, 쉬나무와 벌의 공진화 관계를 참구하다 불광미디어에 실린 진제 스님의 2022년 신년 법어가 마음 깊숙이 와 닿는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자세를 바꾸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나와 더불어 남이 존재하고,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며 인간과 더불어 자연이 공존하는 만유동일체(萬有同一體)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것 같다. 우리 인간이 참나를 찾아 해탈의 경지에서 극락의 순간을 느끼려면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일심으로 가야 할 자연을 오로지 우리만을 위해 변형시켜 간다면 언젠가 꿀벌 실종을 대신할 인간 실종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꿀벌의 군집 붕괴 현상이 인간 세계에도 닥쳐올 것이며, 아, 그때는 그냥 우리도 무(無)가 되는 것인가?
가파른 계단 아래 해탈문 지붕 위로 쉬나무 꽃잎 하나 살며시 내려앉는 상상으로 참나 화두 붙잡고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간다. 해운대 파도가 철썩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