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영의 회복적 생활교육 이야기 65
사랑과 정의가 입 맞출 때.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시편 85:10
정의가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정의
교직 초임시절, 가출, 무단결석으로 방황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었습니다. 부모의 이혼, 부모와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맡겨진 친척집에서의 차별과 갈등 등등… 사춘기인 중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겁고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미선이(중1)도 그런 아이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미선이는 아빠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와 여러 날 동안 빈 빌딩이나 화장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당시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동료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고충을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선이를 우연히 동네 시장통에서 만났습니다. 아이는 옷 짐이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있었고, 온 몸에서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함께 시장을 보고 집으로 와서 몸을 씻게 하고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아이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서 하룻밤 재웠습니다. 그러다 중2때 미선이는 우리 반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초기엔 학교를 잘 다니는 듯했지만 다시 가출이 시작되었습니다. 발생한 모든 일들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혼내기보다는, 달래고 얼러서 학교에 오게 하거나 집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갈수록 교사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오히려 자신이 집을 나가면 자신을 찾아 헤매는 담임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와의 관계에 지쳐만 갔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는 다른 학교로 떠났습니다.
안타까움으로 아이의 잘못을 호되게 야단치지 못했던 교사의 마음과 달리, 방황하는 아이들은 가출과 무단결석으로 자신의 청소년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초임시기를 거치면서 아이들에 대한 나의 마음도 딱딱해져 갔습니다.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랑의 매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평소에 얌전하고 말수가 적었던 민경(중2)이가 무단결석을 했습니다. 갑작스런 돌출행동에 놀랐습니다. 민경이 어머니와 상담을 하면서 그 동안에 가정 안에서 있었던 민경이와의 불화와 민경이의 거친 말과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민경이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아이가 돌아오면 단호하게 훈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무단결석과 가출 뒤에 돌아온 아이를 붙잡고 “무단결석과 가출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며…, 학생신분으로…, 어떻게…, 청소년시기에는…….” 긴 훈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가출과 무단결석을 했는지, 가출하는 동안에 어디를 돌아 다녔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평소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인내 있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아이의 태도에 교사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해도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의 마음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고쳐주어야겠다’는 결심과, “잘못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의 분노와 정의감이 아이에게 매를 들게 했고, 나의 매가 무서워 아이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가출과 무단결석 내내, 당시 아이돌 가수 공연을 관람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동안 아이는 부모의 이혼위기로 불안했고, 결국 부모이혼이 확정되면서 엄마와의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폭언과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아이는 이야기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진심을 듣는 순간, 매를 든 내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졌습니다. 아이는 그 이후로 마음의 문을 더욱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위협과 위력으로 억지로 열게 하면서 또다시 상처를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나의 무리한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지만 교사 체면상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내게 두고두고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안타까움으로 그저 아이의 마음만 달래보려 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교사인 나는 지쳐만 갔고, ‘잘해주면 오히려 버릇만 나빠진다.’는 통념에 동의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불신과 경직된 마음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무단결석과 가출은 옳지 못하다는 정의감으로 잘못된 행동 이면에 있는 아이의 고통과 외로움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고통‧외로움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회적 잣대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도 ‘사랑이 없는 정의’도 모두 우리 삶을 해치고 맙니다. 시편의 기자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시편85)”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정의가 없는 사랑’을 돌아보면, 사랑이라고 하면서 솔직하게는 갈등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갈등을 덮으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은 말로 끝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 훼손된 진실을 마주대하며 갈등을 직면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사랑이 없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 안에 사랑 없이 함부로 정의라고 말하면서 매를 휘둘렀던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의로움으로 정의감에 차서 행동하면 사랑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정의도 훼손시키고 맙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가 되지 않기 위해, 잘못하고 실수한 아이를 훈육할 때 내 안에 사랑이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겠습니다. “신의 자비가 없다면 진리를 외치지 말라(마틴 슐레스케).”는 조언이 떠오릅니다.
훈육의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훈육자의 내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밭의 일꾼이 주인에게 밭에 뿌려진 가라지를 발견하고 가라지를 제거할지 묻습니다. 밭의 주인은 일꾼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면서 추수 때까지 두라고 합니다.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주인은 일꾼의 손에 섣부른 낫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좋은 것도 파괴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악한 자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잘못과 실수를 대할 때, 섣부르게 단정 짓고 판단하기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를 훈육할 때 진심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훈육자인 나 자신입니다. 훈육자인 나의 내면에 사랑이 있는지, 훈육자인 내가 정의를 분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는 어느 것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이며, 훈육의 과정에서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까지 뽑아버리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는가?
나는 정의를 분별하고 있는가?
섣부르게 판단다고 단정 짓지 않는가?
내게 질문을 던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