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자주 생각을 하고
제 자신에게 묻곤 하는 것 중에
아직도 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화두가 되었습니다.
‘겸손’입니다.
진정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겸손과 비굴의 차이는 무엇인가?
겸손과 자존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겸손한 것인가?
겸손이라는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 이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왜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되는 것이고
남을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쉽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잠시 고금의 성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는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라도
예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만큼 이익이 되는 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겸손의 최고봉으로 꼽은 사람은
춘추시대 초나라의 명재상 ‘손숙오’ 라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누가 손숙오에게
“관직에 오래 있으면 선비들이 질투하고,
봉록이 많아지면 백성들이 원망하며,
벼슬이 높아지면 군왕이 미워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대인은 관직에 오른 지 오래됐을 뿐 아니라
봉록도 많고 자리도 높습니다.
세 가지를 모두 갖췄으나
초나라 임금과 선비, 백성 중 대인을 미워하는 자가 없습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손숙오의 대답은
“나는 지금 초나라 재상 자리를 세 번째 하고 있지만
더욱 겸손하려 노력하네.
봉록이 높아질 때마다 더 많이 베풀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더 예의 바르게 행동했네.
내가 초나라 선비와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네.” 라 했다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오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겸손을 모르는 자는 필히 남을 해롭게 하고,
그가 지도층이라면
그건 곧 오만한 판단이나
사적인 결정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게 되어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주역』에도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오만(滿)을 일그러뜨려 겸손한 자를 보태 주고,
땅의 도는 오만을 변화시켜 겸손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은 오만을 해치고 겸손한 자를 복 주고,
사람은 오만을 싫어하고 겸손한 자를 좋아한다.”
스스로 꽉 찼다고 여기는 오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경구입니다.
주역의 64괘 중에 겸괘(謙卦) 하나만이 유일하게
여섯 효사(爻辭)가 모두 길한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유교(儒敎)의 이상사회인 대동의 사회를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우선 동인괘(同人卦)의 화합,
다음으로 대유괘(大有卦)의 풍요,
그리고 겸괘(謙卦)의 겸손입니다.
풍요함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이 겸손이며,
교만은 풍요함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글이 제게 명쾌한 답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자기가 복 받고자 하는 것이고,
남들로부터 칭송을 얻고자 하는 뜻과 다르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기 만족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겸손하고자 하면 얕잡아 보고,
오만하면 외면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또 겸손하고자 하면 비굴해 보여 움츠러들기 쉽고,
자신을 지키고자 자존심을 세우려 하면
오만해지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명예나 명분을 지키고자 오만을 자존으로 가장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만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겸손한 사람도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바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혹 겸손한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비굴함으로 비쳐질 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겸손을 말하고
많은 이들이 겸손을 행하며,
모두가 칭송하고 본을 삼고자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적시지는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진정한 겸손은 내가 없어야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과연 자기라는 에고가 없이 존재로 남아 있을 수가 있을까?
자기로 가득한 사람이 겸손하다 하더라도
이는 비굴이거나 겸손을 가장한 오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가식적이기 쉽고,
겸손은 변하기 쉬운 것이 됩니다.
이것과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 또 하나는
시선과 관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일 쉬운 일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일은 자기를 아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눈과 관심은 늘 밖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남을 의식하며 살아왔습니다.
겸손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해 있기에 진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남을 먼저 판단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겸손하기 보다는 자존을 앞세우는 것이 더 쉬운 것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잣대는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자신의 명분은 타인을 저울질하는 눈금이 되었습니다.
결국 겸손이라는 문제도
시선과 관점이 밖을 향해 있다면
이는 비굴이거나 교만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입니다.
겸손은
철저히 자기 안으로 들어와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하고
이를 넘어 내 안에 내가 없는 겸손이라야
흔들림 없는 겸손일 수 있습니다.
판단하는 겸손이거나 밖을 향해 있는 겸손은
모두가 거품에 불과한 허울이나 다름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다가옵니다.
“겸손은 결코 외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 앞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거나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참으로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밖을 향해 있던 시선과 관점을 안으로 돌려
자기를 바라보고
그 안에 사랑이 가득 할 때
겸손은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나로 가득 채워져 있던 나를 비우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때만이
겸손은 모두의 가슴을 적셔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