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양심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자주 머뭇거린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선택하고도 자연스러우리만큼 타락한,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고 편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이라면, 아니 주님의 사람이라면, “주님! 어찌할까요?”라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주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양심의 법 앞에서 몸부림치듯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양심을 거부하고 거슬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며 심히 통곡해야 한다. 정직하게 옳은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대부분 양심을 팔아먹었다. 양심보다는 이익과 편리와 영달(榮達)을 선택한다. 주님보다는 사람을 더 무서워하고, 진실보다는 체면이나 겉치레에 더 익숙하다. 그리고는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서...’ 또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쉽게 치부해 버리거나 ‘아직 몰라서 그래’ ‘아직 순진해서 그래’ ‘세상은 순진한 것은 안 통해’ ‘세상을 사는 게 다 그런거야’ 등등...양심과 진실은 이제 케케묵은 고물처럼 취급당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건 아니다. 주님의 법은 너무나 소중하다. 양심은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양심의 법은 항상 우리의 행동보다 앞서야 하며,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분명한 판단이며, 지켜야 하는 생명의 법이다.
다윗은 주의 법을 항상 모시고 살고자 했다. “주님! 제가 어떤 여건 속에 있더라도 주님 보시기에 합(合)하게 살고 싶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주님의 법을 새겼다. ‘해(害)하면 안 된다’는 명료한 말씀을 붙들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양심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삼상24장)(삼상26장) 비록 궁핍한 날에도 결코 그의 양심을 흐리지 않았다. 양심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의 삶에는 양심을 흐리게 하는 편리한 환경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우린 양심의 법을 붙들고 씨름해야 한다. 오늘의 환경이 아무리 좋더라도 양심의 법을 거스른다면 차라리 그 환경을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차라리 하루하루 날품을 팔더라도, 초라한 삶을 살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길로 가야만 하지 않을까?
속고 속이고, 속아주고 또 눈감아주며 공생하듯 함께 굴러가야 하는 오늘의 현실을 미워하고 싫어하기엔 너무 닳아버린 우리의 양심, 어떻게 하면 상실해 버린 하나님의 법을 회복해야할지... 무뎌진 양심의 공범이 된 나는 오늘 또 다시 가슴을 찢으며 몸부림치고 있다.
2013년 5월 어느 날... 곽일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