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는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계3장)를 향하여 주님이 칭찬하신 내용의 일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장황하지 않다. 단지 일곱 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크고 많은 업적이나 공로를 치부하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깝기 때문이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이 말씀은 KJV에서는 ‘조그마한 능력’(a little strength)이라고 말하고,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에서는 ‘미약한 힘’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능력을 조금만 받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작은 능력으로도 넉넉히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생명나무이신 주님께 온전히 속하면 미약한 힘으로도 넉넉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포도나무가 가지에게 생명을 줄 때 강한 능력은 필요 없다. 다만 가지에게 부여하는 생명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생명을 공급할 뿐인데 그것으로 넉넉히 열매를 맺는다. 오늘 우리에게도 포도나무를 통해 가지에게 생명이 흘러오듯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세미하지만 그것으로 넉넉히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혼란과 혼돈(混沌)을 경험한다. 큰 능력 곧 많은 은사(달란트)와 권능이나 많은 체험이 있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줄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큰 능력이 필요 없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 비록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흘러 온 작은 능력이면 된다.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생명이 이끄심과 허락하심을 순간순간 힘입어 갈 때 이상하리만큼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원수가 내 뺨을 칠 때, 내가 그를 제압해야 큰 능력인가? 아니다. 나머지 한 쪽 뺨을 돌려대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겉옷을 빼앗아 가고자 할 때 그를 제압하려면 큰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속옷을 벗어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능력이면 된다. 내가 모욕적인 불이익을 당했을 때 그를 제압하려면 큰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작은 능력이면 된다. 본질상 우리 자신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면 가능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내가 어떤 큰 능력을 소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큰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작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겨야만 다윗이고, 끼니 걱정을 하면 다윗이 아닌가?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도 주님의 생명이었고, 광야를 떠돌면서 굶주려 한 끼 양식을 구해야 할 때도 주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늘 주님께 속한 어린 양처럼 주님께 매달렷다. “주님! 어찌할까요?”하는 마음에는 큰 능력이 필요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작은 것이면 된다.
어려우면 어떤가?
시련이 있으면 어떤가?
손해를 보면 어떤가?
골리앗을 이길 때(삼상17장)나 궁핍하여 나발에게 양식을 구할 때(삼상25장)나 다윗은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깨어있는 선한 양심을 지키는 자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작은 능력이면 된다.
조용한 사랑, 조용한 생명, 아주 작은 능력이면 된다.
2013년 4월 안디옥교회를 섬기는 곽일귀목사